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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북연의 두 번째 황제 풍발馮跋의 재기載記다. 북연의 창업주는 모용운慕容雲, 즉 고운高雲이었다. 고운은 측근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때 자제도 함께 죽었다. 풍발은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황제에 즉위한 뒤, 모용운 정권을 고스란히, 국호까지 물려받았다. 풍발은 신도信都 사람으로 기록 상 한족漢族이었으나 이민족 국가를 인수했기 때문에 재기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고운은 후연後燕 모용씨 왕족들과 한 권에 입전된 반면, 풍발 이하 북연 군주는 서진西秦 걸복씨乞伏氏 뒤에 실렸다. 전, 후 두 편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진서) 고운의 북연을 인수한 풍발(전편) 북연의 두 번째 황제 풍발馮跋의 재기載記다. 북연의 창업주는 모용운慕容雲, 즉 고운高雲이었다. 고운은 측근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때 자제도 함께 죽었다. 풍발은 반란..
북연의 두 번째 황제 풍발馮跋의 재기載記다. 북연의 창업주는 모용운慕容雲, 즉 고운高雲이었다. 고운은 측근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때 자제도 함께 죽었다. 풍발은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황제에 즉위한 뒤, 모용운 정권을 고스란히, 국호까지 물려받았다. 풍발은 신도信都 사람으로 기록 상 한족漢族이었으나 이민족 국가를 인수했기 때문에 재기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고운은 후연後燕 모용씨 왕족들과 한 권에 입전된 반면, 풍발 이하 북연 군주는 서진西秦 걸복씨乞伏氏 뒤에 실렸다. 전, 후 두 편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풍발 馮跋 풍발馮跋은 자가 文起로 장락長樂 신도信都 사람이다. 어렸을 적의 자는 걸직벌乞直伐로 그 필만畢萬의 후손이다. 만萬의 자손이 풍향馮鄉을 채읍(영지)으로 받아 이것으로 씨를 삼은 것이다. 영가의 난(..
후연後燕과 북연 北燕을 잇는, 북연 초대 황제 모용운慕容雲의 전기로 진서晉書(재기載記)에 실려 있다. 모용운은 본디 고씨로 고구려 왕족의 지파였다. 고구려 출신인 모용운이 천왕天王으로 추대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를 추대한 풍발馮跋 역시 고씨高氏를 명문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모용씨 선비족과 고구려의 관계, 경계를 이동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모용운 慕容雲 모용운慕容雲의 자는 자우子雨로 모용보慕容寶의 양자다. 조부 화和는 고구려 왕족의 지파로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 하여 고高를 성으로 삼았다. 운은 사려 깊고 체계적인 사고력을 갖추었으며 중후하고 말수가 적었다. 사람들이 모두 우매한 것 아닌가 생각했으나 오직 풍발馮跋 만은 그의 뜻을 높이 사서 벗으로 삼았다. 모용보가 ..
진서晉書에 수록된 후연의 마지막 군주 모용희의 전기다. 무공은 탁월했지만 어려서는 형수 정씨丁氏와 간통하고, 나중엔 부씨苻氏 자매에게 빠져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십육국 시대는 워낙에 폭군이 많았던 터, 그 가운데 한 명이다. 광개토대왕과 동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모용성 때에는 장수로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과 함께 영토 700여 호, 백성 5천 여호를 빼앗았는데, 정작 자신이 군주일 때는 광개토대왕에게 발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용희 慕容熙 희熙는 자가 도문道文으로 모용수慕容垂의 작은 아들이다. 처음에 하간왕河間王에 분봉되었다. 단속골段速骨이 난을 일으켰을 때 모용씨 여러 왕이 살해당했지만 희는 고양왕高陽王 숭崇에게 총애를 받아 죽임을 면할 수 있었다. 난한蘭汗이 모용보를 죽인 뒤 희를..
선비족 삼대 그룹 중 하나인 모용씨가 세운 여러 연나라 가운데 하나로 남연南燕이 있다. 이하는 남연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황제 모용초(385~410, 재위 405~410)의 이야기로 진서 재기에 수록된 이야기다. 남연은 우리 고대 문화와도 관련이 깊다는 삼연三燕 가운데 하나다. 모용초慕容超의 자는 조명祖明으로 모용덕慕容德의 형인 북해왕北海王 모용납慕容納의 아들이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업鄴(전연前燕)을 물리치고 납을 광무태수廣武太守로 삼았으나 몇 년 뒤 관직에서 물러나 집을 장액張掖으로 옮겼다. 모용덕이 남정에 종군할 때 금도金刀를 남겨두고 떠났다. 모용수慕容垂가 산동에서 거병하고 부창苻昌이 모용납과 모용덕의 아들들을 잡아다 모두 죽였다. 납의 모친 공손씨公孫氏는 나이가 많아 사면받았고 납의 처 단..
전조前趙의 대산臺産 (전조前趙의 황제, 흉노족) 유요劉曜 때 재난과 이변이 너무 심해 공경에게 명하여 각기 박식하고 직언하는 인사 1인을 천거하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대사공大司空 유균劉均이 대산을 천거했다. 유요가 친히 동당東堂에 나가 중황문中黃門을 보내 대책을 묻게 했다. 대산이 그 연유를 두루 설명하자 유요가 살펴보더니 찬탄하여 친히 불러 대면하고 정사에 참여시켰다. 대산이 흐느껴 울며 재변의 화를 진술하고 정치와 교화의 부족한 부분을 언급하니 그 언사가 심히 간절했다. 이에 유요가 표정을 바꾸고 예를 차리더니 그를 박사좨주博士祭酒・간의대부諫議大夫・영태사령領太史令에 임명하였다. 이듬해 그 말의 징험이 드러나자 요는 그를 더욱 중용하여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명되었다. 한해에 세 번 승진하여 상서尙書・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