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당나라의 돌궐 출신 용병 대장, 아사나사이 본문
아사나사이는 동돌궐 출신으로 이민족 때려잡는 이민족 장수로 열혈 활약했다. 당에 항복한 이후, 중앙아시아의 고창, 구자, 언기, 그리고 동아시아의 고구려까지, 그리고 그 결과 태종의 무덤에 배장되기도 하였다. 그는 태종이 죽었을 때 따라죽겠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흔히 중앙아시아의 코미타투스(Comitatus: 게르만 종사, 주군과 함께 살며, 전리품을 나누고, 죽을 때도 따라죽는 충성 끝판왕 집단 /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나옴.)의 일례로 곧잘 언급된다. 또한 고구려 원정에서 싸우던 중 화살을 맞았으나 화살을 뽑고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는 기사는 전래 설화에 안시성 공격하다 당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생기게 된 된 여러 실마리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신당서에는 여러 이민족 장수들의 일대기를 모아 제이번장전(諸夷蕃將傳)을 두었는데, 다음은 그곳에 실린 그의 전기다.
아사나사이는 돌궐 처라가한의 차자다. 11세에 지략과 용맹으로 널리 알려졌다. 척설에 배수되어 적북에 아장을 세우고 힐리의 아들 욕곡설과 철륵, 회흘, 복골, 동라 등의 부락을 나눠 다스렸다. 처라(가한)가 죽자 예에 따라 애도하며 몸에 상처를 냈다. 무리를 다스린 지 10년간 세를 부과하여 거두지 않았다. 혹 세금을 거두어 자신에게 보태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부락이 풍요로우면 나는 그걸로 족하오.”라고 했다. 따라서 수령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수 차례 전쟁을 일으키는 힐리에게 사이는 간언했지만 (힐리는) 듣지 않았다.
阿史那社尒, 突厥處羅可汗之次子. 年十一, 以智勇聞. 拜拓設, 建牙磧北, 與頡利子欲谷設分統鐵勒・回紇・僕骨・同羅諸部. 處羅卒, 哀毀如禮. 治衆十年, 無課斂. 或勸厚賦以自奉, 答曰: 「部落豐餘, 於我足矣. 」故首領咸愛之. 頡利數用兵, 社尒諫, 弗納.
정관원년(627) 철륵, 회흘, 설연타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욕곡설이 마렵산에서 패했고 사이가 공격해 그를 지원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듬해 남은 무리를 이끌고 가한부도성을 지켰다. 힐 리가 멸망할 무렵 서돌궐 통엽호(가한)도 죽어 해리필돌륙가한과 니숙이 나라를 두고 다퉜다. 사이가 병사를 이끌고 그를 습격하여 그 나라의 절받을 얻고 무리 10만을 가져 스스로 도포가한이라고 했다. 제부에서 이르길 “처음 난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파멸로 이끈 것이 설연타이니 내 이제 서방에 자리잡고 설연타를 평정하지 않으면 선대 가한을 잊는 것이니 (이는) 효가 아니다. 일이 틀어져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겠다.” 추장이 모두 말하길, “우리가 막 서방을 얻었으나 잠시 기다리며 추슬러야 합니다. 지금 바로 이곳을 버리고 멀리 연타를 공격하면 연타는 잡지 못하고 엽호의 자손이 우리 나라를 도로 가져갈 것입니다.” 사이가 따르지 않고 기병 5만을 선발하여 연타가 있는 적북을 토벌했다. 전쟁이 100일 넘게 진행되자 사졸의 고통도 장기화되고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연타가 마구 공격을 퍼붓자 대패하고 달아나 고창을 지키니 무리라고 고작 1만명이었다. 또한 서돌궐과도 평화롭지 않아 이에 무리를 거느리고 내속했다.
貞觀元年, 鐵勒・回紇・薛延陀等叛, 敗欲谷設於馬獵山, 社尒助擊之, 弗勝. 明年, 將餘衆西保可汗浮圖城. 會頡利滅, 西突厥統葉護又死, 奚利必咄陸可汗與泥孰爭國, 社尒引兵襲之, 得其半國, 有衆十餘萬, 乃自號都布可汗. 謂諸部曰: 「始爲亂破吾國者, 延陀也, 今我據西方, 而不平延陀, 是忘先可汗, 非孝也. 事脫不勝, 死無恨. 」酋長皆曰: 「我新得西方, 須留撫定. 今直棄之, 遠擊延陀, 延陀未禽, 葉護子孫將復吾國. 」社尒不從, 選騎五萬, 討延陀磧北, 連兵十旬, 士苦其久, 稍潰去. 延陀縱擊, 大敗之, 乃走保高昌, 衆纔萬人, 又與西突厥不平, 由是率衆內屬.
정관 10년(636) 좌효위대장군에 제수하고 (그의) 부락을 영주에 안치했다. 형양장공주와 혼인하여 부마도위 전위둔장이 되었다. 14년 교하도행군총관으로 고창을 평정하고 여러 장수들과 함게 상을 받았다. 사이는 조서가 내려오기 전까지 하나도 함부로 취하지 않고 조서를 본 연후에 받았다. 또한 가진 것은 모두 늙고 약한 이들과 별볼일 없는 것 뿐이었다. 태종은 그의 검약을 아름답게 여겨 고창의 보석나전칼, 잡채(고급비단) 천 단을 하사하고 북문좌둔영을 검교하게 하고 필국공에 봉했다. 요동(고구려)을 원정할 때 날아오는 화살에 맞았으나 (화살을) 뽑고 싸움터로 돌아가 소속 부대가 힘써 싸웠으니 모두 그의 공이었다. 돌아와 발탁하여 홍려경을 겸임하게 했다.
十年入朝, 授左驍衞大將軍, 處其部于靈州. 詔尚衡陽長公主, 爲駙馬都尉, 典衞屯兵. 十四年, 以交河道行軍總管平高昌, 諸將咸受賞, 社尒以未奉詔, 秋毫不敢取, 見別詔, 然後受, 又所取皆老弱陳弊. 太宗美其廉, 賜高昌寶鈿刀・雜綵千段, 詔檢校北門左屯營, 封畢國公. 從征遼東, 中流矢, 揠去復戰, 所部奮厲, 皆有功. 還, 擢兼鴻臚卿.
(정관)21년(647) 곤구도행군대총관이 되어 계필하력, 곽효각, 양홍례, 이해안 등 다섯 장군과 함께 철륵13부 및 돌궐 기병 10만을 발동하여 구자를 공격했다. 군사가 서돌궐에 주둔하여 처밀, 처월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언기로 들어가 서쪽으로 나오자 병사들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오자 구자가 두려움에 떨었다. 적북에 진을 치고 이주자사 한위가 천 기로 먼저 나가고 우효위장군 조계숙이 뒤를 이었다. 다갈성에 도착하자 그 왕이 무리 5만을 거느리고 맞서 싸웠다. (한)위가 겉으로 틈을 보이자 왕이 병사를 모두 동원해 북쪽으로 추격했다. 위와 계숙이 만나 목숨을 걸고 싸워 대파했다. (아사나)사이가 이에 도성을 빼앗자 왕이 경기(경무장 기병)과 달아났다. 사이가 곽효각을 남겨 지키게 하고 자신은 정예 기병을 이끌고 뒤를 밟아 600리를 갔다. 왕이 대발환성에 웅거하며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방어했다. (아사나)사이가 40일간 공격한 끝에 들어가 그 왕을 사로잡고 다섯 개의 큰 성을 모두 빼앗았다. 좌위낭장 권지보를 보내 여러 추장을 돌며 화복을 보여주자(협박하자) 70여 성이 항복했다. 위엄과 신의로 황제의 뜻을 알리자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 자 업었다. 돌에 공적을 새기고 돌아왔다. 우전왕을 입조하게 하니 왕이 말 등 가축 300마리를 군량으로 제공했다. 서돌궐, 언기, 안국 모두 앞다투어 군량을 제공했다. 효각이 군에 있으며 금옥으로 장식한 장막과 집기들을 사이에게 주었으나 사이는 받지 않았다. 황제가 이를 듣고는 “두 장수의 우열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겠소”라고 했다. 황제(태종)가 붕어하자 따라 죽어 능침을 지키겠다고 했으나 고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우위대장군으로 승진했다. 영휘6년(655) 죽었다. 보국대장군, 병주도독에 추증하고 소릉(당 태종의 릉)에 배장하고 무덤을 총산[파미르]처럼 만들었으니 시호는 원이다.
二十一年, 以崑丘道行軍大總管與契苾何力・郭孝恪・楊弘禮・李海岸等五將軍發鐵勒十三部及突厥騎十萬討龜茲. 師次西突厥, 擊處蜜・處月, 敗之. 入自焉耆西, 兵出不意, 龜茲震恐. 進屯磧石, 伊州刺史韓威以千騎先進, 右驍衞將軍曹繼叔次之. 至多褐城, 其王率衆五萬拒戰. 威陽卻, 王悉兵逐北, 威與繼叔合, 殊死戰, 大破之. 社尒因拔都城, 王輕騎遁. 社尒留孝恪守, 自率精騎追躡, 行六百里. 王據大撥換城, 嬰險自固. 社尒攻凡四十日, 入之, 禽其王, 幷下五大城. 遣左衞郎將權祗甫徇諸酋長, 示禍福, 降者七十餘城, 宣諭威信, 莫不歡服. 刻石紀功而還. 因說于闐王入朝, 王獻馬畜三百餉軍. 西突厥・焉耆・安國皆爭犒師. 孝恪之在軍, 牀帷器用多飾金玉, 以遺社尒, 社尒不受. 帝聞, 曰: 「二將優劣, 不復問人矣. 」帝崩, 請以身殉, 衞陵寢, 高宗不許. 遷右衞大將軍. 永徽六年卒, 贈輔國大將軍・幷州都督, 陪葬昭陵, 治冢象葱山, 謚曰元.
아들 (아사나)도진은 좌둔위대장군을 역임했다. 함형 초 나사도부대총관이 되어 설인귀와 함께 토번을 공격하고 토욕혼을 지원했으나 (토번의) 논흠릉에게 패해 병사를 모두 잃었다. 담당 관리에게 죄상을 묻고 사형에서 감형해 백성으로 삼도록 했다.
子道真, 歷左屯衞大將軍. 咸亨初, 爲邏娑道副大總管, 與薛仁貴討吐蕃以援吐谷渾, 爲論欽陵所敗, 盡失其兵. 詔有司問狀, 免死爲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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