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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현종 때의 도사들

자불어 2022. 8. 25.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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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원 羅思遠

출전: 개천전신기開天傳信記(태평광기太平廣記 77-03)

태평광기太平廣記 권77에 수록되어 있다. 태평광기는 북송北宋 태종太宗의 칙명에 따라 태평흥국太平興國3년(978) 이방李昉 등이 편찬한 필기류筆記類 총서叢書로 50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漢나라에서 송초宋初까지의 야사, 전기, 소설에서 기사를 수집하고 내용에 따라 분류하였다. 신선에서 잡록까지 92종류로 구분하고, 다시 150여 세목으로 나누었다. 아울러 각각의 문미에는 출전을 기록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오늘날 전하지 않는 문헌도 많이 있다. 대부분 사실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는 사회의 풍속과 관습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시대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본 내용의 원출전인 개천전신기開天傳信記의 원본은 현재 산일되었다. 신당서新唐書 권58 예문지藝文志 을부乙部 사록史錄의 잡사류雜史類로, 송사宋史 권26 예문지藝文志에는 자류子類 소설류小說類로 분류되어 있다. 찬자인 정계鄭棨는 건부연간乾符年間(874~879) 강회江淮지역에서 자사刺史를 역임하였다.

당나라의 나사원羅思遠은 신비하고 기이한 도술을 많이 부렸으며 특히 은형술隱形術(투명인간)이 가장 뛰어났다. 명황明皇[현종]은 은형술을 좋아했기에 나사원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고 배웠다. 나사원은 비록 전수해 주긴 했지만 그 요체를 다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황제는 나사원과 함께 도술을 부릴 때는 아무도 알아보는 이가 없었지만 혼자 시험해 볼 때면 요대 끝이 보이거나 두건 모서리가 드러나 궁중에 있는 사람들은 매번 황제가 있는 곳을 알아차렸다. 황제는 선물도 주고 죽이겠다고 위협하기도 하면서 다방면으로 가르침을 구했지만 끝내 모두 전수받을 수는 없었다. 황제가 분노하여 고력사에세 명하여 그를 기름자루에 싸서 착유기 아래 넣어 눌러 죽이고 매장하도록 하였다. 채 열흘이 지나기도 전에 촉으로부터 돌아온 관리가 있었는데 길에서 사원을 만났다고 한다. (나사원은) 나귀를 타고 웃으며 사자에게 “황제의 장난이 어찌도 이리 가혹하신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唐羅思遠多祕異術, 最善隱形. 明皇樂隱形之法, 就思遠勤求而學之. 思遠雖傳授不盡其要. 帝每與思遠同爲之, 則隱没人不能知, 若自試, 則或餘衣帶, 或露幞頭脚, 宮中人每知帝所在也. 帝多方賜賚或懼以死, 而求之終不盡傳, 帝怒命力士, 裹以油襆置於油榨下, 壓殺而埋瘞之. 不旬日, 有中官自蜀道回, 逢思遠於路. 乘驢而笑謂使者曰 :“上之爲戲, 一何虐也

현종玄宗은 나사원羅士遠에게 은형술隱形術을 배우고자 했지만 나사원羅士遠은 모든 비법을 전수해 주지 않았다. 결국 나사원은 황제의 노여움을 사 사형을 받았다. 하지만 도를 터득한 까닭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 이야기는 신당서新唐書에도 기재되어 있다. 나사원에 대해 더 이상의 정보는 찾아볼 수 없다. 위 이야기에서 현종은 도술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갖고 있으며, 급한 성질로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현종이 도술에 대해 어느 정도 집착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본인 스스로 도교의 인물, 즉 신선 또는 선인이 되기를 희망했던 것은 확실하다. 천보년간(742~756) 3회에 걸친 노자老子의 추증작업에서 “대성조大聖祖”등의 호칭을 부가하여 노자老子와의 혈연관계를 강조하였다. 특히 천보원년(742) 서남각西南角에 현워황제묘玄元皇帝廟를 축조하여 노자상老子像을 건립하고, 그 왼쪽에 본인의 상을 시립하도록 한 것은 현종 본인의 욕망을 반영한 행위로 볼 수 있다.

맹영광필선객도孟永光筆仙客圖 / 국립중앙박물관(덕수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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