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중국의 역사인식: 담기양譚其驤의 생각 본문
담기양譚其驤(1911~1992)은 중국역사지도집의 편찬자로 오늘날 중국이 생각하는 자국사의 영역을 정의하는 데 기여한 학자다. 즉, "역대 중국이 점령(심지어 영향력을 행사)했던 땅은 모두 중국땅"이라는 뻘소리의 이론적 기초를 만든 학자다. 그는 다른 나라의 지배는 강점이고 중국의 지배는 덕치인 까닭이라는 전근대적 사고를 갖고 있다. 근대 중국에서 내내 "반봉건"을 외쳤고 공산당 역시 낡은 체제를 뿌리 뽑자고 했지만 실은 그들은 그 낡은 체제의 충실한 제자이자 적자였다. 담기양은 이를 그대로 보여준다. 아래는 그가 중국역사지도집을 편찬하고 발표한 원고로 그의 생각이자 오늘날 중국의 역사(영토)인식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가운데가 고힐강顧詰剛, 왼쪽이 담기양譚其驤, 오른쪽이 후인지侯仁之
역사상 중국과 중국의 역대 강역 歷史上的中國和中國曆代疆域
1981년 5월 하순 '중국민족관계사연구학술좌담회' 발표를 일부 수정한 것이다.
옹독건(翁獨健) 동지가 내게 이번 회의 기간 중 대회에서 공통강연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민족사 전문가도 아닌데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요.”라고 하자 그는 “다른 말씀은 하실 필요 없고 여러 선생님께서 중국역사지도집을 편찬할 때 각 역사 시기 중국의 강역을 어떻게 획정했는지, 역사상 동시에 존재했던 여러 국가지구[國家地區]와 민족을 어떻게 중외로 구분했는지 어떤 것은 중국에 포함하고 어떤 것은 뺐는지 그 기준은 무엇이었는지만 이야기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의 구체적인 요구에 나는 중국역사지도집의 주편으로서 사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오후 여러분들께 이 지도책이 이상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알려드리며, 이 강연의 제목을 ‘역사상 중국과 중국의 역대 강역’으로 이름하고자 한다. 여러분들께서 들어보시고 만일 편찬 작업에 불합리한 부분이나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시면 내일 소조 회의에서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중국역사지도집>의 편찬 작업은 1955년 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양수경(楊守敬)의 <역대여지도(歷代輿地圖)>를 ‘재편집’할 것만을 요구받아 그 범위도 양수경의 지도를 보완하는 것이었으나 이때 여전히 역사상 중국의 범위라는 문제가 남았다. 양수경의 지도는 시대마다 중원왕조가 직할 통치했던 영역만 그려 넣었다. 전한(前漢) 1책에 서역도(西域圖) 한 폭을 덧붙였던 것을 빼면 나머지 각 책에는 왕조의 기미(羈縻) 지구는 모두 그리지 않았으니 중왕왕조와 동시에 병립했던 각 변경 민족 정권의 강역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양수경이 ‘역대여지도’로 이름한 지도는 춘추시대부터 명대까지 기본적으로 청대 내지 18성의 범위 이내의 건치만 수록하고 신강(新疆)·청해[靑]·티벳[藏]·길림[吉]·흑룡강[黑]·내몽골[內蒙古] 등의 변구(邊區)는 포함하지 않았다. 편찬 작업에 착수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우리는 양수경 지도의 범위를 우리 지도 작업 범위로 삼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중국의 역사학자는 중원왕조의 판도만을 역사상 중국의 범위로 간주했던 양수경의 모델에서 어떤 배울 점도 없었다. 위대한 조국은 변경 지구 의 여러 민족을 포함해 각 민족이 함께 일궈낸 것이다. 우리는 전 중국을 아우르는 중국역사지도를 제작해야 했다. 단지 진, 한, 수, 당, 송, 원, 명 등 중원왕조에 국한된 지도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이후 지도의 제목을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으로 변경하고 범위도 각 역사 시대의 전 중국을 포괄하기로 결정했다. 각 시기의 중국 전역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는 이때부터 거듭 신중하고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첫 번째 문제가 되었다.
‘역사상 중국’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청조가 통일을 이룩하고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입하기 전 청조의 판도, 구체적으로 말하면 18세기 50년대부터 19세기 40년대 아편전쟁 전까지 이 시기 중국의 판도를 역사 시기 중국의 범위로 삼았다.
몇백 년이든, 몇천 년이든 이 범위에서 생활했던 민족은 모두 중국사 상의 민족으로 인식했고 이 범위 내에 수립된 정권은 우리는 모두 중국사 상의 정권으로 인지했다. 이 범위에서 벗어날 경우, 중국의 민족도 중국의 정권도 아니다.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가. 우리의 이유는 이렇다.
첫째, 우리는 현대 중국인으로 옛사람이 생각하는 “중국”을 중국의 범위로 삼을 수 없다. 우리는 당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중국과 송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중국이 이 범위인가? 아니다. 이는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당대인도 송대인도 아닌 까닭에 당대인이 생각한 중국을 중국으로, 송대인이 생각한 중국을 중국이라고 볼 수 없기에 이 범위를 중국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중국” 두 글자의 의미를 말하면 “중국”이 두 글자의 함의는 본래 고정불변이 아니며 시대가 바뀔 때마다 변화했고, 시대가 발전하면서 진전되었다. 시경 등의 고적에 나오는 “중국”은 어떤 의미인가, 간단히 말하면 “중국” 두 글자는 우리나라의 주권이 도달하는 범위로 이 관념은 아편전쟁 이후 비로소 형성되었다. 그 이전 “중국” 두 글자는 여러 가지 배경에서 다양한 용법으로 등장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아편전쟁 직후 이 관념은 완전히 고정되지 않았다. 하나의 예를 들면 위원 위원(魏源)이 쓴 성무기(聖武記)에 사용된 중국은 어떤 때는 현대의 관념에 부합된다. 예를 들면 그는 몽골을 말하며 몽골을 중국이라 하고 러시아를 외국이라고 했다. 서장을 말하며 서장을 중국이라고 했고 인도를 외국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도 옛 관념에 따라 십팔성(十八省)과 신강, 서장, 몽골을 나누어 십팔성만을 중국으로 불렀다. 어떤 명청 저작 가운데는 심지어 작자 본인이 서남의 귀주, 광서 소수민족 지구를 다녔으면서도 귀주, 광서 일대의 소수민족 지구를 중국으로 보지 않고 황하유역, 장강유역 만을 중국이라고 기술했다. “중국” 두 글자의 오늘날 용법은 상당히 늦게야 형성되었다. 아편전쟁 직후에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기본적으로는 만청시기에야 비로소 형성되었다. “중국”이 우리나라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라고 하는 것은 아편전쟁 이후 10년이 더 지나서야 나오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현대인으로 우리는 옛 사람의 “중국”을 중국으로 삼을 수 없다. 이는 우리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배워서가 아니라 자고이래로 그런 것이다. 한 시대가 이전 시대의 중국을 중국으로 여길 수 없다. 예를 들어 춘추시대 황하 중하류의 중왕조, 진, 정, 제, 노, 송, 위 등 이들 국가는 자신들을 중국이라 하면서 진, 초, 오 월은 이적으로 중국이 아니라 했다. 이것이 이른바 춘추시대의 중국이다. 그러나 이 관념은 진한지대 변화한다. 진한시대 사람에게 중국은 이와는 달라 그들은 진, 초의 땅도 중국의 일부로 보았다. 과거의 관점이 이후에 변화한 것이다. (서)진이 남천했을 때, 동진은 십육국을 이적으로 보고 외국으로 생각했다. 남북조시대에 남조는 북조를 삭로(索虜)라고 욕했고 북조는 남조를 도이(島夷)로 비하했다. 쌍방 모두 자신들이 사는 곳을 중국으로 여겼다. 이는 모두 사실이다. 단 당대인은 그렇지 않았다. 당대인은 그들을 남북조로 보았다. 이연수(이연수)가 남북사를 편수하며 양쪽을 동일시하여 쌍방 모두 중국의 일부로 보았다. 마찬가지로 송왕조도 요, 금, (서)하 모두 외국으로 생각하고 이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원대인은 이미 이와 달리 요, 금, 하를 송과 같은 “중국”으로 보았다. 원대인도 송대의 관점과 달랐는데, 어떻게 우리가 송대인의 관점에 서겠는가. 따라서 현대인은 옛사람의 “중국”을 중국으로 부를 수 없다. 나중 시대의 사람이 이전 시대의 사람과 관념을 달리하며 옛사람들의 개념을 채용하지 않는 것은 이미 그 유래가 올된 것이며 예로부터 그랬던 것이니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동진인이나 송대인을 자처할 수 없다. 결론으로 말하면 우리 현대인은 옛사람의 중국을 중국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둘째, 우리가 옛사람의 “중국”을 역사상의 중국으로 부를 수 없듯 오늘날 중국의 범위로 우리 역사상의 중국의 범위를 한정할 수도 없다. 우리는 역사 시대를 거치며 수천 년간 역사 발전 속에서 저절로 형성된 중국을 역사상의 중국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19세기 중엽 이후 1840년 이전 중국의 범위는 수천 년간 우리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저절로 형성된 중국이다. 이것이 우리 역사상의 중국이다. 현재까지 중국의 강역은 이미 역사상 자연스럽게 형성된 범위가 아니라 이 100여 년간 자본주의 열강과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우리 영토를 조금씩 쪼갠 결과다. 왜 청조의 판도는 역사 발전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인가. 청제국이 확장, 침략한 결과라고 하지 않는가? 역사적 사실이 그렇듯 청조의 판도는 정확히 역사 발전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러시아제국과 다르다. 러시아제국은 16세기 이전까지 우랄산맥 이동의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와 어떤 관계도 없었다. 16세기 이후 동쪽으로 참략, 확장하면서 비로소 현재의 거대한 판도가 되었다. 그러나 청조 이전 우리 중원지구는 각 변강 지구와 오랜 기간 밀접했다. 경제, 문화방면에서 가까웠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여러 차례 중원지구와 함께 같은 정권의 통치 아래에 있었다. 동북지구는 당대 이미 약간의 기미도독부, 기미주를 두었다. 요, 금 시대 판도는 동으로 일본해, 북으로는 외흥안령(外興安嶺)에 도달했고 원대를 지나 명대 노이간도사(奴爾干都事)는 모두 이와 같다. 북방 역시 이와 같다. 몽골고원 상의 흉노는 서한 시기 한과 맹려하게 다투었는데 결국 흉노는 한에 투항하고 심지어 동한 초년에는 한왕조의 판도 안으로 들어왔다. 당 태종은 돌궐 힐리가한, 설연타, 거비가한을 멸망시킨 후 한때 몽골고원과 멀리 시베리아 남부까지 통치했다. 돌궐은 몇십 년이 지나고서야 나라를 되찾았다. 원대 몽골고원은 원의 영북행성(嶺北行省)이었다. 서북방면도 이와 같았다. 서한은 서역도호부를, 당은 안서(安西),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를 두었다. 원은 일찍이 아력마리(阿力麻里), 별실팔리행중서성(別失八里行中書省), 선위사(宣慰使) 등등을 설치했다. 비록 일관성있게 연속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계속 몇 차례에 걸쳐 모두 중원지구와 하나의 정권에 속했다. 경제, 문화 관계로는 더욱 긴밀했다. 이 장기간의 경제, 문화, 정치적 관계는 점차 발전하고 날로 밀접해졌다. 우리는 며칠 전 옹독건 동지의 말한 이야기에 찬성했다. 우리 역사상 중원왕조와 변강소수민족의 관계가 도대체 어떤 관계였는지? 주류는 무엇인지? 평화공존했는지 길항하였을지? 깊이 탐구할 필요도 없이 분명 어떤 시기에는 매우 좋아서 평화 공존했고, 어떤 시기에는 길항하며 더러는 험악하게 다투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바적인 관계는 더 밀접해졌다. 이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역사가 발전함에 따라 변구 각 민족과 중원 한족의 관계도 점차 밀접해져 일종의 상호 의존적 관계가 되었고 단지 경제, 문화적인 교류 관계는 부족하여 17, 18세기에는 역사적 발전이 중국을 하나의 통일된 정권으로 만들고 그 아래 중원지구와 각 변구를 하나의 정권 아래로 두도록 하였다. 청은 역사적 발전 방향에 순응하여 이 통일 임무를 완수하였다. 17, 18세기 청이 이처럼 거대한 범위로 통일을 완수했던 것은 결코 단순히 청의 강력한 무력이 군사상 일련의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단순히 일시적인 군사적 승리와 정복은 사회, 경제적 기초가 유지되지 못했다면 통일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은 통일을 완성한 후, 공고해졌고 안정되어 19세기 중엽 이후 제국주의가 동, 서, 남, 북 각 방면에서 침입하여 침략받아 점유된 일부 토지를 그들에게 분할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유지했다. 왜 그랬을까. 주요 원인은 중원은 변구를 필요로 하고 변구도 중원을 필요로하여 하나의 정권 아래 통일되는 것을 필요로 했고 이것이 중원 인민들에게도, 변구 인민들에게도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조의 통일은 사실 먼저 만족의 지구, 즉 광의의 만주를 통일했고, 다음 한족 지구, 즉 명조의 고토를 통일했다. 다시 몽고족 지구와 몽골족이 통치했던 위구르와 장족 지구를 통일했다. 요는 만, 몽, 한 삼구의 통일이다. 한족 지구는 원래 명조의 지역을 가리킨다. 한족 외에도 여러 남방 소수민족이 포함된다. 몽골족 지구는 내외몽골 이외에도 청해, 서장 및 남강의 위구르 지구다. 이 지구는 본래 모두 예트(厄魯特) 몽골 치하로 모두 준가르의 지배 하에 있었다. 당시 준가르의 강역은 천산북록의 준가르 본부뿐 아니라 남로의 위구르 지구, 청해, 서장, 투시예트(套西厄魯特) 모두 준가르의 통치 하였다. 갈단은 갈카 몽골, 즉 외몽골을 침입했다. 내몽골은 청조 입관 이전 일찍이 청조의 판도로 들어왔다. 후에 준가르는 다시 외몽골에서 내몽골로 침입했다. 이것이 청과 준가르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쌍방은 강희, 옹정, 건륭 70년 간의 전쟁 끝에 청이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청은 준가르 본부뿐 아니라 원래 준가르 통치 하에 있던 청해, 서장, “회강(回疆)”, 즉 천산남로까지 판도에 넣었다. 따라서 청의 통일은 기본적으로 만, 한, 몽 지구의 통일이었다. 몽골 지구는 실질적으로 위구르 지구와 서장 지구를 포함한다. 이 삼구의 통일이 완성된 시기는 건륭 중엽으로 18세기 50년대다. 사실 만, 몽, 한 세 민족의 인민이 하나의 왕조를 구성했던 것은 이미 청조의 입관 이전이었다. 1636년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금에서 대청으로 바꿀 때 신하가 올린 권진표를 만, 몽, 한 세가지 문자로 쓴 것은 만, 몽, 한 3종의 인민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충분했다. 내가 볼 때, 이는 역사의 흐름을 따른 것이다. 16세기, 17세기 한, 만, 몽 등 중국 각 민족에게 통일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점은 명조와 여진부족 즉 이후의 후금 사이의 교통로가 개설되고부터, 명이 몽골과 교통로를 개통할 때부터 분명해졌다. 이 시기 중원의 명과 동북의 만주, 북방의 몽골은 때로 길항하며, 전쟁을 벌였다. 때로 화의를 맺어 명은 매년 여진, 몽골과 호시(互市)의 개설을 포함하여 얼만큼의 물건을 선사할지를 논의하기도 했다. 전쟁이건 화의건 목적은 여진인은 인삼, 수달피를 중원지구의 옷감, 양식과 농기구와, 몽골인은 그들의 말을 중원의 옷감, 곡식과 차로 교환하는 것이었다. 매년 호시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충분히 얻지 못하면 쳐들어와 약탈했다. 한편으로는 노략질을 한편으로는 새로운 화의를 진행하며 선물의 양을 늘렸다. 이는 명 변경지구의 발전이 16, 17세기가 되면 중원지구의 농산품과 수공업품이 간절해졌다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중원지구도 변경 지구의 인삼, 수달피, 마필 등등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비교해 보면 변경지구의 중원의 물자를 더 필요로 했다. 따라서 호시로든, 전쟁으로든 결국은 통일이 필요했다. 통일 후에는 중원은 포필, 양식 등의 물자를 변구의 수요를 만족시키는 데 사용함으로써 평안무사할 수 있었으며 통일도 공고해질 수 있었다. 따라서 청조가 조성한 대통일의 국면은 더욱 굳건해져 역사의 조류에 순흥하고 이는 역사 발전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청조가 이런 판도를 이룩한 것은 외부로 확장한 결과로 보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청이 몽골에서 한 군사행동을 궁병독무(窮兵黷武: 무력을 남용하여 전쟁을 일삼은 것)라 할 수 없다. 이는 한 무제가 흉노에게 한 군사행동을 궁병독무라고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무제가 조선, 동월, 남월을 침략했다 비판할 수 있지만 흉노에 대해서는 침략했다고 할 수 없다. 그가 흉노에 그리하지 않았다면 흉노가 쳐들어왔을 것이다. 당태종이 돌궐에 대해서 한 것도 궁병독무라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청조가 준가르에게 한 일도 그렇다 아니할 수 없다. 이 시기 준가르는 기세등등하여 신강, 청해, 서장, 외몽골을 점령했고 청제국 통치하의 내몽골에도 창을 겨눴다. 만일 갈단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럼 재채 변강민족이 중원으로 들어오는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즉 액로특이 중원으로 들어와 다시 왕조를 교체했을 것이다 황조교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 정황으로 보면 청조는 준가르에 비해 진보했던 만큼 청이 중원을 통치하는 것이 준가르가 중원을 통치하는 것보다 더 이로웠을 것이다. 따라서 청이 준가르를 격파한 것은 궁병독무라 할 수 없다. 이것은 너죽고 나살자하는 투쟁이다. 청조는 준가르 통치 지구를 하나씩 거두어 판도에 넣었고 이는 철저하고 준가르를 무찌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로 이 지역을 정복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청이 준가르를 물리친 후 아프간, 코칸드, 바다크 산 등 중앙아시아의 소국이 청조로 귀속한 일이 있으나 청은 거절했고 단지 이들 국가를 번속에 두었을 뿐이다. 당시 청조의 군사력으로 보면 중앙아시아로 충분히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청이 이런 판도를 갖게 되었다고 이들을 확장주의자로 볼 수는 없다. 이것은 역사의 조류에 순응한 것이다. 따라서 청이 18세기에 형성한 이 판도는 중국 역사 발전의 결과로 이 판도로 역사상 중국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은 합당하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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