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신강통신초新疆通信抄 (2) 본문
이하 "신강통신초"는 20세기 초 일본 니시혼간지의 문주였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가 중앙아시아로 보낸 탐험대, 즉 오타니탐험대의 대원으로 2~3차 탐험을 주관, 참여했던 학승 다치바나 즈이초의 기록이다. 이하 1~2주 단위로 한 단락씩 연재해 보고자 한다.
별처럼 달리는 역마
9월 15일 세미팔라틴스크(세메이: 카자흐스탄)를 떠났다. 큰 짐은 이곳 상인 아브다루만 세하무시유츠친(アブダルマン セハムシユツチン)에게 운송을 맡겼다. 며칠 동안 정들었던 이리티시 강을 배로 건넜다. 세 마리 말이 끄는 마차(輕車)는 키르기스 마부의 채찍질과 함께 좌안으로 질주했다. 물줄기는 유유히 동쪽으로 꺾어지고 길은 정남쪽으로 향하며 강이 점차 시야에서 사라졌다. 강가 모래섬에 흩어져 있는 수목은 사리시네에, 포프라스로 반은 청색, 반은 황색으로 가을 색이 완연해졌다. 알타이, 천산은 세 길이나 눈이 쌓여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잦은 채찍질에 일행 세 명과 작은 짐을 실은 마차는 광활한 이르티시의 뭉게구름을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질주한다. 돌아보니 푸른 첨탑과 하얀 벽으로 된 회교당과 그리스정교 교회에 낙조가 비치며 이내 저녁이 되었다. 25리(러시아리)를 지나 최초의 역정(驛亭)인 프로고드에 투숙했다. 어디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역사(驛舍)는 탁자와 의자, 침대를 갖추고 양등(洋燈)을 켜놓았다. 인도의 어두침침한 방갈로를 방불케 했다. 고작 새뮤얼(サモアル)에게 부탁해 뜨거운 물을 얻을 수 있는 정도였다.
이튿날 울퉁불퉁한 언덕 사이를 남쪽으로 달렸다. 외로운 달이 칭기스 산 위에 걸릴 때쯤 다섯 번째 역정에 도착해서 말을 바꾸느라 기다렸다. 마침 두 사람의 투르크인이 새뮤얼을 둘러싸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 사람이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일어나 의자를 양보하고 차를 권했다. 나는 사양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한 사람이 물었다. “어디에서 오셨나요?” 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다른 투르크인이 물었다. “세미팔란티스크에서 오셨습니까?” 나는 그렇다고 답하고 “그대들은 어디로 갑니까?”라고 물었다. “우리도 세미(팔란티스크)로 갑니다.”라고 하기에 “그러면 상인(デアガル)이신가요?”라고 묻자 “아닙니다. 아라비아로 참배하러 가려고 카슈가르에서 왔습니다. 그대는 어디로 가시나요”라고 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저들은 만 리의 산을 넘고 천 길의 강을 건너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회교 교조敎祖의 영지를 찾아가려 한다. 나도 지난 겨울 홀로 카라코룸 산맥을 넘어 아라비아에 가듯 야르칸드로 갔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는 카슈가르를 입에 올리진 않았다. 그들은 만 리를 멀다 않고 아라비아로 건너 건너가는 것을 평생의 꿈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장래는 과연 어떨까. 적잖히 감동하는 빛을 띠고 나는 “카슈가르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청나라 사람입니까?”라고 묻자, “아닙니다. 일본인입니다.”라고 하니 “역시나 청나라 사람과는 다른 것 같소.”라고 혼잣말을 한다. 말이 준비되어 출발했다. 달빛이 희미해지고 어두컴컴해지자 추워졌다. 26여 리(이하 모두 러시아리露里)를 가서 아루카츠토(アルカツト) 역에서 숙박했다.
이튿날 이르티시 강 유역을 떠나 아야구즈 강(Ayagoz R.) 우안의 세루기프포-루에 숙박했다. 수백 가구가 사는 취락에 지나지 않는다. 세미(팔란티스크)와 지나 영토로 이어지는 우편길의 분기점 중 하나로 아야구즈 강을 따라 내려가면 이리에 도착한다. 하나는 내가 도착한 치유구치야츠쿠(チユグチヤツク)를 통과한다. 아야구즈강이 남서쪽으로 흘러 발하슈-아라콜(バルツカツシユ, Balkhash-Alakol) 호수로 흘러들어간다. 이르티시(イルチツシユ) 강 유역과 발하슈 아라콜 호수의 감입부는 겨우 해발 수천 척의 칭기스 산맥을 사이에 두고 있다.
이튿날 아침 아야구즈 강을 건넜다. 강은 넓은 자갈밭 위로 작은 물줄기가 세차게 흐를 뿐. 남동 방향으로 꺾어져 80리를 지나 도하루타사(ドハルタサ) 역에 도착했다. 광경이 조금씩 변하며 서남방으로 아득하게 석조가 조각구름을 물들인다. 세루기오포-루(セルギヲボール)를 출발해 2가지 문제가 발생해 2개 역, 80리에 이틀이 걸렸다. 하나는 세미에서 치유구치야츠쿠(チツグチヤツク)로 보내는 우편물의 통과 때문에 마부(馭者)를 얻을 수 없었다. 하나는 차축이 망가져 사용이 곤란했다. 다행히도 뒤이어 온 투루크인의 마차에 동승하고 산거(山車)는 5인과 마부와 짐을 실어 다음 역사에 도착했다. (기록에 오탈이 있을 수도)
다음날 아침 새 마차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했다. 좌측 수십 리를 사이에 두고 타르바가타이 산맥이 동서로 이어져 있다. 대략 고도가 5천 척, 이르티시 강 상류와 발하슈-아라콜 호수의 분수령이다. 동남쪽으로 흐르는 개천 수 개를 건너 두 개의 촌락을 지났다.
9월 21일 초경初更(오후 7~9시) 러시아 국경 바쿠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나와보니 산 위로 달이 떠 밤을 환히 비쳤다. 바쿠타는 제22 역정으로 547리 거리라고 한다. 도로에서 마차를 달리자 모래 먼지가 자욱하게 일며 평탄한 도로가 나왔다.
도중에 키르기스 펠트 천막이 흩어져 있고 소와 양을 몰며 이리저리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예전에 갔던 칼카 지방에서 수 백천 가축을 쳤던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치유구치야츠쿠(チユグチヤツク, Chuguchak) 방면에서 수출한 양모피류의 카라반은 못해도 수십 차량, 큰 것은 수백 차량에 달하고 또 세미 방면에서 온 농구, 석유 등 수십 차량으로 이루어진 대상과도 만났다. 날은 지나 7일째가 되었지만 전진한 시간은 5~60시간에 불과하다. 잠삼岑參의 “한 역, 한 역을 지나 별처럼 달리는 역마, 해뜰녘 함양을 출발해 저녁엔 농산 머리에(一驛過一驛, 驛騎如星流, 平明發咸陽, 暮及隴山頭)”의 시가 떠올랐다.
이튿날 동북쪽으로 달리자 말은 모래 먼지와 땀 범벅이 되었다. 21.5 노리를 지나 노청 국경 츄구치야츠쿠(チユグチアツク, 塔爾巴哈臺)에 도착했다. 도중 흙집 한 채가 있는데 거기가 국경이다. 마을에 가까이 가자 눈앞에 전개되는 광경은 앞서 다녔던 천산남로를 방불케 한다. 이 산하 도시의 풍경도 역시나 애잔하다. 러시아 거류지의 한 집에 투숙해 여장을 풀었다.
이곳이 이번 여행의 기점이다. 따라서 짐말과 차량을 구입하고 일꾼을 선발하고 환전, 큰짐의 수령 등을 하느라 10일간의 체재도 여유가 없었다.
1주일 뒤 큰 짐이 바쿠타에 도착해 홉스를 데리고 여기 세관에 도착해 검수를 마친 뒤 수령했다. 환전은 매우 어려웠다. 노청은행露淸銀行이 러시아와 청 양국의 화폐를 교환해주지 않았다. 러시아 지폐 500루블을 러시아 금화로 바꾸려 했는데 고작 200루불 밖에는 못 바꿨다. 결국 지방관리의 호의로 관은官銀의 송금을 의뢰해 대부분을 우루무치에서 받기로 하고 현지인 대상인(豪商)에게 1000루블 내외를 환전해 갖고 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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