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대한제국 현충원, 장충단 본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에 내려 국립극장 또는 자유총연맹 방향 초입에 장충단공원이 있다.
장충단은 대한제국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제향을 올리고자 1900년에 세운 현충시설이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광무4년(1900) 10월 27일(양력)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첫 제향은 이해 11월 10일 정오에 거행되었다. 소나무로 홍여문虹如門을 세우고 국기를 사면에 게양하고 단의 제1위에는 홍계훈洪啟薰을, 제2위에는 이경직李耕稙의 신위를 두고 이하 전몰자들의 위패를 세웠다. 이때 각부府, 부部, 원院 대소 관인과 각대 장졸, 무관학도가 모여 도열하고 군악을 연주했다. 또한 전몰자 가족들도 초청되어 오후 4시에 끝났다. 홍계훈은 을미사변 때 훈련대장으로 광화문에서 일본군을 막다가 전사했으며, 이경직은 궁내부 대신으로 광화문에 난입한 낭인들을 제어하다 살해당했다. 고종은 일본의 영향력이 일시 줄어든 틈을 타 을미사변의 희생자들을 현창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장충단 제사는 매년 봄과 가을 2회 국가예전으로 거행되었다.
대한제국 시대의 서화가 지창한池昌翰은 황성신문(1900.11.16.)에 장충단유감奬忠壇有感이란 시를 게재했다.
萬死非難一死難 만 번 죽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나 한 번 죽기 어려워
人臣大節亂時看 신하의 절개는 어려운 때 볼 수 있도다.
吾輩偸生生亦恨 우리들은 구차하게 살았으나 삶 또한 한스러워
秋風慟哭奬忠壇 가을바람 통곡 소리 장충단에 퍼진다.
手擎黃麻去酹靈 누런 마포를 걸고 영령께 제사를 올리니
南山九月滿朝廷 남산의 구월 달빛 조정을 가득 채우고
捐身殉國惟今日 나라에 몸 바치는 건 오직 오늘뿐,
血氣家家出一丁 혈기에 집마다 장정들이 나선다.
육일당六一堂은 이 시에 대해 “글자 하나마다 눈물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마다 피한 방울로 핏빛이 가을 단풍과 우열을 다투는 듯하다”라고 평했다. 또, 이듬해인 1905년 2월에는 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 백성기白性基의 상소로 무관뿐 아니라 을미사변 전몰자 이외에 임오군란 때 죽은 이최응李最應, 김보현金輔鉉, 민겸호閔謙鎬, 민창식閔昌植, 그리고 갑신정변 때 죽은 민태호閔台鎬, 조영하趙寧夏, 민영목閔泳穆, 한규직韓圭稷 등의 문관의 위패도 함께 모셨다.(고종실록, 광무5년 2월 16일)
장충단은 남산 자락에 개천이 흐르고 너른 뜰이 있어 나들이, 또는 각급 학교나 단체의 운동회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별의별일도 다 있었는데,
1906년 여름에는 대한제국 육군 연성학교硏成學校(기초군사훈련소) 교성대 위관이 병사 수십 명을 데리고 장충단에 놀러 갔는데 그중 하사 한 명이 담을 넘어 들어왔다. 장충단은 헌병이 지키고 있었는데, 헌병 2명이 이를 보고 하사에게 왜 문을 두고 담을 넘냐고 하다 시비가 붙어 싸움이 되었는데 결국은 쪽수에 밀린 헌병은 두들겨 맞고 달아났다. 이때 연성학교 위관은 수수방관했다고. (황성신문, 1906.8.7.) 당시 대한제국 군대의 꼬락서니를 볼 수 있는 일화다.
1908년 일부 시설을 보수했으나 1909년 가을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모식이 이곳에서 열리고 또 이내 대한제국도 멸망하면서 장충단 제사는 더 이상 거행되지 못했다. 1919년 조선총독부는 장충단공원을 조성했고 또 1932년에는 부지 내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했다.
장충단에는 장세당壯歲堂, 양위헌揚威軒, 장충포열獎忠褒烈 등의 부속건물도 있었으나 현재는 비석만 남아있다. 또 비석 앞에는 ‘제일강산태평세계第一江山太平世界’ 비석과 장명등 두 개가 있고, 뒤로는 청계천에서 옮겨 온 수표교水標橋가 있다. 장충단의 옛 사진을 보면 장명등 2기가 있는 데, '제일강산태평세계' 비석 옆에 장명등을 두었으나 실은 장명등이야 말로 옛 장충단의 추모 석물인 셈이다. (*그런 걸 잘 알려주면 좋겠으나, 설명엔 그런 내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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