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도리이 류조의 광개토대왕릉비 조사 (1905) 본문
아래 기록은 1905년 도쿄제국대학 남만주조사 인류학 분야를 담당했던 도리이 류조(鳥居竜蔵, 1870~1953)가 남긴 광개토대왕릉비 조사 기록이다.
호태왕의 비문(제52도 A,B)은 오래 전에 일본에 전해져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그 존재가 알려졌지만 어떤 상태인지 대략이나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까지 이 비석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료로 메이지12년(1879) 발행된 회여록會餘錄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호태왕비는 어느 때인가 한 번 계곡물에 잠기기도 했지만 언젠가 흙을 파내 오늘과 같이 지상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비가 있는 장소는 평원인데다 이런 큰 비석이 쉽게 매몰될 수 없으니 가령 그 하부는 깊이 묻혀있다고 해도 상부는 여전히 건립 당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높이를 측량해 보면 바닥돌은 땅속에 묻혀있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으나 바닥부터 정상까지는 2장 5치다. 비석은 진사각의 장방형 화강암이며, 비문은 압록강을 면한 동쪽부터 시작하는데, 이 면에는 “惟昔始祖···”로 시작하는 글이 있고 폭은 5척, 남쪽 면은 폭 5척으로 “利城彌鄒城也…”로 시작하고 북쪽 면은 폭 6척 5촌으로 “三家爲看烟豆奴城····”으로 시작하며 서쪽 면은 폭 4척 8촌이다. 한 번 보면 그 거대함에 놀랄 뿐 아니라 고구려 시대의 비문이 압록강 상류에 있다는 점에 눈길이 간다. 그리고 이 석재를 어디서 운반했는지는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碑麗不息□, 又躬率往討巨富山, 負碑至鹽水上破其丘, 部落六七百當用馬兼羊不可稱數”라고 했다.
*역자 주: 최신 판독은 다음과 같다.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稗麗不□, □人躬率往討, 過富山負山□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따라서 비석 석재와는 무관한 이야기다. 아래 이야기도 의미 없다. 양이 어찌 돌을 나르겠는가.
이에 따르면 이 석재는 거부산巨富山에서 말과 양을 써서 운반했는데, 양을 수송에 투입했다는 것이 매우 재밌는 사실이다.
이 고비古碑가 수천 수백 기의 고분이 존재하는 고국원故國原 안에 있다는 점은 사실 고구려의 문화를 오늘날까지 과시하는 것이 아닐런지, 더구나 그곳이 압록강 상류라는 점에 더욱 역사적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鳥居竜蔵, 南満洲調査報告(東京: 秀英舎, 1910), pp.171~172.
일본국회도서관 디지털콜렉션(https://dl.ndl.go.jp/)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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