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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 미국문화원

자불어 2024. 1. 2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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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 미국문화원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서울 구 미국문화원이다. 구 서울 미국문화원이라고 해야 하나 '구 서울'이 마음에 걸려 이리 지은 듯하다. 지하철로는 시청역(1,2호선) 또는 을지로입구역(2호선)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된다. 롯데호텔 차량 출입구 바로 맞은편에 있다. 

이 건물은 본디 미쓰이물산(삼정물산三井物産) 경성지점 사옥이었다. 미쓰이물산은 메이지 시대 외국 상회가 독점했던 무역의 주도권을 일본이 되찾고자 1876년 설립했다. 면사방적기계와 면화를 수입하고 생사, 면사, 면포의 수출을 담당했다. 곧 일본 면사 수출의 절반을 다룰 정도로 성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에도 발 빠르게 진출했다.

(관삼출구官蔘出口) 객년 12월 27일 연태煙台에 향할 차를 인(천)항에서 출범한 창룡호蒼龍號가 인항해관창고(인천항세관창고)에 보관한 작년도의 관삼 반액을 장재하고(싣고) 삼정물산회사 경성지파소주임 오가와 요시히코(小川吉彦) 씨가 감독하여 연태로 향했는데, 관삼 방매할 일을 한국 조정에서 미쓰이물산회사에 위탁했기 때문이라고 조선신보에 실렸다더라.” (황성신문 1901.1.5.)

미쓰이물산은 대한제국에 군함도 팔았다. 또한 대한제국 해군의 첫 함정인 양무호는 미쓰이물산이 석탄운반선으로 구입해 썼던 것을 군함으로 개조해 재판매한 것이다. 국권 피탈 이후 미쓰이물산은 더욱 성장했다. 1910년 9월 혼마치本町 1초메町目(충무로 1가)에 출장소를 신축했으며 1913년 11월 1일에는 사업확장을 위해 출장소에서 지점으로 승격했다. 미쓰이물산은 이전 신축을 목표로 동시대 유명 건축가이자 미쓰이물산의 여러 지점 설계를 담당했던 건축가 마쓰이 기타로(松井貴太郞, 1883~1962)에게 경성지점의 설계를 의뢰했다. 의뢰할 당시에는 5층(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콘크리트 건물로 공사비용 50만원이었다. 공사비용은 이후 100100만 원으로 증가했다. 1937년 8월 착공해 1938년 7월 준공할 계획이었으나 조금씩 늦어져 1937년 9월에 착공, 1938년 10월 28일 낙성식을 거행했다.

*마쓰이 기타로의 대표 작품으로는 현존하는 것으로 도쿄역 앞 일본공업구락부日本工業俱樂部 건물, 구 미쓰이물산 오타루지점 등이 있다.

(미쓰이물산 경성지점 낙성식) 미쓰이물산 경성지점 낙성식은 28일 오후 4시 반부터 신관 4층에서 거행. 재주齋主의 수불헌찬修祓獻饌, 축사옥환봉전祝詞玉串奉奠 등 (신도식) 의식을 치르고 공사 청부 다다구미(多田組)의 공사 보고, 다다구미에게 감사장 증정 후 식을 마치고 별실의 축하연으로 이동해 오쓰카(大塚) 지점장의 인사, 주요 내빈의 축사로 오후 6시 성황리에 마쳤다. (경성신문 1938.10.30.)

삼정물산은 해방 직후까지 남아있었으나 다른 일본기업과 마찬가지로 철수했다. 삼정물산이 다시 이름을 날린 것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다.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현 롯데정밀화학)이 건설자재인냥 사카린을 수입하다 걸려 전국민적인 공분을 샀다. 중앙정보부가 비자금 마련을 위해 기획했다가 걸리니 삼성에 뒤집어씌운 일이라는 주장도 있고, 실제 삼성가 후계 구도에서 이건희 회장으로 넘어오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다시 건물 이야기로 돌아와 이 건물은 미국대사관이 사용했고, 1977년 미국대사관 공보원이 개관했다.

(미국공보원 재개관) 미국공보원이 13일 중구 을지로 1가 163 전미국대사관 건물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2년 만에 개축, 이날 문을 연 공보원에는 도서관과 소강당 녹화-영사실을 갖추고 있다. 개원식에는 이우주 연세대 총장, 김준엽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장, 이원경 전문교부장관 코너 영국문화원장 등 문화계, 학계, 언론계 인사 100여 명이 참석했으며 스나이더 주미대사, 구자춘 서울시장, 헤스 문화원장이 개관 테이프를 끊었다.(조선일보 1977.6.14.)

이 건물은 오랫동안 외국의 상사, 대사관, 문화원 등으로 사용되었으나 우리 현대사의 중요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1959년 1월 13일에는 이승만 치하에서 국가보안법반대전국국민대회에 참석하려던 야당 의원들이 이 앞에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 붙들려 가는 일이 있었다. 경찰은 몇 명이면 제지할 수 있겠지 싶었으나 의원들의 저항이 거세자 급히 200명을 추가 투입했다. 도보로 가려던 의원은 강제로 경찰 지프에 태워졌다. 조병옥 의원은 차로 돌파하려 했으나 이내 사복 경찰 100명이 진로를 막고 차에서 강제로 끌어냈다. 조병옥 의원은 “왜 통행을 막느냐? 이게 뭔 꼴이냐.”라고 하자 중부경찰서 정모 경위는 “편안히 가시라고 안내해 드리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런 매너는 이승만 매니아들의 뿌리 깊은 전통인 듯하다. (단 언젠가는 그들도 경험해봤으면) 결국 이듬해 4.19.4.19. 혁명으로 이어졌고, 이때 역시 주요 장소가 되었다. 4.26. 이승만이 하야를 확약한 날, 많은 국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만세만세! 방방곡곡서 만세. 8.15. 해방을 다시 만난 듯 흥분) “만세”소리가 퍼져 나오고 흥분한 군중들로 뒤덮인 미국대사관과 반도호텔 창구에선 외국인들이 연상 박수를 치며 군중들의 궐기를 찬양해 주는 태도였다. (동아일보 1960.4.27.)

미문화원점거사건(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무엇보다 이 건물이 주목받은 것은 1985년 대학생 주도 미문화원 점거사건이다.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위원회(삼민투위) 소속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균관대학교 학생 73명이 5월 23일 미문화원으로 사용했던 동 건물을 점거했다. 학생들은 창밖으로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 등의 구호를 붙이고 미국대사와의 면담 등을 요청했다. 미대사관에서 정치담당 참사관 던롭, 문화원장 래빈 등이 학생들과 면담했고, 이때 미국은 광주사태에 책임이 없고 사과할 일도 없다고 밝혔다. 정부는 치외법권 지역인 까닭에 경찰 투입을 하지 못하고 대신 식사와 물 등 물자의 반입,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5월 25일 미국은 다시 면담을 요청, 학생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농성을 풀 것을 요청했고 학생들은 신변 보장을 요구했다. 오랜 농성에 지치고 탈진자도 나오자 결국 점거 72시간만인 5월 26일 낮 12시 5분 전후 자진해산 했다. 출입문의 셔터를 열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반정부구호를 외치며 건물밖으로 나왔다. 강제 해산에 대비해 서로의 팔을 헝겊으로 묶은 상태에서 5분 정도 미대사관과의 면담 내용을 적은 유인물을 뿌리고 노래와 구호를 외쳤다. 학생 다수는 형사처벌은 물론 퇴학, 출교 처분되었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있다.)

미국문화원 건물은 이후 서울시 소유가 되어 1990년부터 2014년까지 서울시청 을지로별관으로 사용되었다. 또 그렝뱅뮤지엄(밀랍인형 전시관)이 생기기도 했으나 지금은 안전 문제로 가림막을 쳐놓은 상태다. 다시 시청사로 쓴 다는 뉴스가 있으나 오세훈 시장이 워낙에 부수기를 좋아해 껍데기만 남기고 안은 죄 때려 부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 현대사를 기억하는 중요한 건물로 보존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서울 구 미국문화원 / 외벽엔 한국전쟁의 상흔이 있다(좌) , 후문 출입구(중), 백엽상(우)

 

서울역(1호선) 5번 출구 또는 을지로입구역(2호선) 1-1번출구에서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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