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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보광사

자불어 2024. 1. 27.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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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내려다 본 보광사

파주 광탄면 고령산 보광사普光寺는 사찰 기록에 진성여왕 8년(894)에 도선국사(827~898)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려, 조선을 이어오며 여러 차례 중창되었으나 현재의 사세를 갖춘 계기는 영조의 모친 숙빈 최씨의 원당이 되면서로 보인다. 이후 조선 왕실의 후원을 받았으며, 고종 때 상궁들에 의해 취전鷲殿을 비롯하여 건물 단청과 불화를 조성했다. 

조선시대까지는 고령사高嶺寺로 불렸던 듯싶다. 동국여지승람뿐 아니라 이곳에 유람왔던 서거정徐居正(1420~1488)도 시에서 ‘고령사’라고 했다. 

벽제碧蹄

碧蹄驛上雨新晴 벽제역 가에는 비가 처음 개었고
高嶺寺前溪水生 고령사 앞에는 시냇물이 불었는데
十里靑山羸馬影 십 리라 청산 곁엔 말의 그림자 파리하고
一鞭紅日急砧聲 한 채찍 석양 아랜 다듬이소리 급하여라
乾坤濩落行何適 천지는 하 쓸쓸하여라 어느 곳으로 갈꼬
歲月侵尋夢自驚 세월은 자꾸 흐르니 꿈이 절로 놀라누나
客裏相逢少相識 객지에서 만난 이는 서로 아는 이 적은데
唯餘白髮故多情 오직 흰 머리털만 아직 다정할 뿐이로다
(고전번역원DB)

보광사 올라가는 길, 개천

사찰 입구에 큰 주차장이 있어 여기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면 된다. 신도나 영각전(납골당) 방문객은 사찰 앞까지 차를 몰고 올라갈 수 있으나, 다소 혼잡하며 도보 5~10분 정도이니 개천을 따라 운동 삼아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낫다. 올라가다 보면 부도밭 맞은편에 사방댐 표석이 있다. 개천은 산세도 가파르고 물도 적지 않다. 조선 태종9년(1409)에는 “벽제(碧蹄)와 고령(高嶺) 사이에 산이 무너진 곳이 2백 70곳이나 되었는데, 고령사(高嶺寺) 아랫마을에서 한 가족 22인이 모두 압사(壓死)”하는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사방댐 공사는 파주시 임업협동조합에서 시공해 1999년 완공했으며, 총 공사비 87,160천원이 투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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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사 대웅보전과 대웅보전의 현판

사찰로 들어서면 중심 건물인 대웅보전이 눈에 들어온다. 대웅보전은 1740년 경에 중건해다고 한다. 대웅보전의 편액의 글씨는 매우 시원스러운데, 절에 따르면 영조의 친필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건 현판은 “甲子中秋玉澗書(갑자중추옥간서)”로 볼 때 옥간(미상)이 쓴 것이지 영조가 쓴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사찰 연표에서는 1740년 영조가 친필 현액을 내렸다고 했으나 1740년은 갑자년이 아니다. 대웅보전 외벽에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뛰어난 벽화가 있다. 벽화 내용은 코끼리, 반야용선, 역사, 호랑이, 위태천, 까치 등으로 그림 솜씨가 훌륭한 것으로 볼 때 불화를 그리는 화승이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미처 찍지 못했으나 건물 안에 고종 때 조성한 불화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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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벽화



대웅보전 앞으로는 만세루가 있다. 만세루는 승방이 딸려 있다. 툇마루에는 목어가 걸려 있는데,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이다. 잉어가 용문을 넘으면 용이 된다는 등용문의 고사가 떠오른다. 만세루 곁에는 종루가 있다. 본디 보물로 지정된 숭정칠년(1634)명 동종을 걸었던 곳이나 지금은 새 종으로 교체했다. (진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어딘가 잘 두셨겠지.)


보광사는 예로부터 나들이 장소로 유명했다. 아래는 옛 신문 속 보광사.

신라 제51대 진성여왕 8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고령산 기슭 울창한 숲속에 위치하고 있는 절이다. 이 절은 창건 이후 고려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세 차례나 증축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화로 소실된 것을 영조 때 대왕의 모후인 숙빈 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당으로 다시 세웠다. 또한 주위에는 숙빈 최씨의 묘인 소령원과 고려 때 천연석에 조각한 광탄석불 등이 있다. 홍은동 시외버스정류소에서 광탄행 버스를 타고 1시간가량 가서 광안에서 내려 도보로 약 30분 간격으로 완행과 준급행이 있는데, 요금은 1인당 1백원. (매일경제 1970.4.16.)

신라 진성여왕 8년(894) 어명으로 창건했다고 하며 고려 고종2년(1215) 원진국사園眞國師의 재창과 우왕14년(1388)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중창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회진灰燼. 현종7년(1666) 삼창三創 된 후 여러 차례 중수를 했다. 높이 80cm의 종이 하나 있을 뿐인데 이조 후기 작품으론 수법이 정교하고 문양도 섬세한 편이다. (조선일보 197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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