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인왕산, 국사당과 선바위 본문
서울 인왕산은 궁궐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산으로 불렸다. 방어 시설로 산자락을 따라 성곽이 있다. 오늘은 인왕산에 있는 문화유산 국사당과 선바위를 보러 올라갔다. 인왕산에 오르는 사람은 대개 사직단社稷壇이나 황학정黃鶴亭, 또는 수성동 계곡으로 능선을 타고 이동하기에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 내리지만 국사당과 선바위를 보려면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1번 출구)에서 내려서 가는 것이 편리하다. / 지도는 맨 뒤에 첨부
아파트 단지를 끼로 올라가다 보면 인왕사仁王寺 일주문이 나온다. 인왕사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된 사찰이나 연산군 때 궁궐이 내려다보인다고 하여 폐사되었다. 이후로 언젠가 다시 생겼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명맥이 끊겼다고 한다. 김상헌金尙憲(1570~1652)은 유서산기遊西山記에서,
“석굴의 앞에는 평평한 흙 언덕이 있었는데 동서의 너비가 겨우 수십 보쯤 되어 보였다. 비로 인해 파인 곳에 오래 묵은 기와가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바로 인왕사仁王寺의 옛 절터인 듯하였다. 어떤 이가 북쪽의 맞은편 골짜기에도 무너진 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옛 자취가 다 없어졌으니 분명하게 알 수는 없는 일이다.”(청음집 권 38/고전번역원 DB)
남한산이나 북한산이나 성곽이 있는 곳에는 응당 사찰이 있기 마련이다. 사찰은 성곽 수비대에 물자를 공급하기도 하고, 여차하면 승병을 동원할 수도 있다. 오늘날 인왕산 서사면에는 이 절 외에도 작은 사찰과 암자로 가득하다.(대부분 집들이 그렇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궁궐이 내려다 보여 폐사되었다는 이야기나 김상헌의 기록을 보면 인왕사는 인왕산의 동사면에 있던 절로 보인다. 즉 그때의 인왕사와 작금의 인왕사는 완전히 다른 절이라는 말이다. 이곳의 사찰들은 업력이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국사당이 옮겨 온 뒤 생겨난 절들로 그런 까닭에 다른 절들과 달리 무속적 성격이 강하다. (이름은 절이지만 내용은 당집) 인왕사는 절 건물이 이곳저곳 흩어져 있고 옆집 앞집 중간은 다른 절이나 암자다. 마치 몇 개 건물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미국의 일부 대학 캠퍼스 같다. 일주문을 지나 조폭 팔뚝 문신 같은 벽화 사이로 올라가면 인왕사 대웅전이 나오고, 거기서 몇 걸음 더 가면 국사당이다.
국사당은 본디 남산에 있었으나 1925년 조선신궁을 남산에 지으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당시 국사당을 거점으로 굿을 올렸던 무당들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이전비용을 받고 이곳으로 옮겼다.
(운명일을 기다리는 국사당과 관왕묘, 관유재산 정리에 걸려서 장차 어데로 돌아갈는지.) 관유재산의 정리를 팔아 불용지의 토지가옥이 모조리 팔리게 되는 터인데 남산 잠두 위에 있어 아침저녁으로 수십 명의 어리석은 부녀의 재물을 빨아들이던 국사당은 민중전이 세상을 떠나신 후 한참 동안 고요하여 마루에는 먼지가 켜로 앉고 철없는 거미줄만 엉키었으니 대정 8년(1919) 독립운동 이후로 소봉(小峯)이라는 교활한 일본인의 조직으로 소위숭신인조합이라는 이상한 간판이 붙어 있어 간간이 미신 좋아하는 여염가의 부인과 무당의 장구 소리가 들릴 뿐으로 여름이면 장안 피서객의 휴게장이 되고 겨울이면 눈보라 치는 속에 늙은 무당 몇 명이 세월을 보내더니 그것조차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 장차 일본인의 손으로 들어갈는지 서양인의 손으로 들어갈는지 또는 사람 속이는 영업으로 먹고 입는 무당의 손으로 들어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는데 그 건물이 남산에 올라앉기는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이라는 바, 그 운명도 지금은 다하였다 하겠다.(시대일보 1924.11.24.)
건물은 남산 시절 모습과 비슷한데, 양쪽에 협칸을 더 댔다. 현재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설명판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무신도가 봉안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앞서 1987년 무속, 무신도의 권위자인 김태곤 교수(경희대학교)는 "남산 국사당에 봉안했던 그림과는 완전히 다른 그림"으로 "원래 그림이 없어지고 다른 그림이 걸리게 된 경위에 의문"을 지적했다. 여기에 국사당 소유자 김창권金昌權 후손은 남산 그림 그대로라는 들었을 뿐이라며 자신도 영문을 모르겠다고 했다. 70년 중요민속자료 지정 시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김창권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150년 전쯤 준화원급이 그린 좋은 작품들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작고해 물어볼 수 없었으며, 문공부 공무원들 또한 모르겠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두 명의 미술사학자는 수작과 졸작이 일부 있고 나머지는 평균 수준이며 제작연대도 150년 전까지 올라갈 수 없으며 일제 초기 것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또한 곽곽선생 그림은 “경성부 서린동”이라는 지명이 있어 이 역시 일제강점기 작품임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했다.(동아일보 1987.7.23.) 문이 닫혀 있어 차마 열어 보진 못했다. (무서워서 또는 혼날까 봐)
(무학재로 간 국사당) 남산 상봉에 있는 국사당은 그간 조선신사가 낙성되자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던 바 국사당에서 굿을 하는 무당들의 힘으로 총독부에서 이전비를 얻어 그간 현저동 무학재 산 위에 옮겨 세웠는데 임의 단청까지 끝이 나서 불원간에 큰 굿을 하리라더라. (매일신보 1926.5.10.)
그리고 일제강점기 민속학자 송석하가 조사할 때는 협칸이 없었던 것을 보면 협칸은 나중에 증축한 모양이다. 그리고 건물 곁에 무목巫木이 있었는데, 현재 우측 협칸 앞에 있는 나무가 바로 그 것 같다.(글 아래 별도 사진 참조)
국사당에서 왼편을 보면 선바위가 보인다. 걸어서 채 5분도 안 걸린다. 선바위는 예전부터 기복의 대상이었으며, 특히 선바위 중간중간에 있는 구멍에 돌을 넣으면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이야기가 있어 기자암祈子岩이라고도 불린다. 옛 속설에는 이성계 부부의 형상이라고 한다. 또 전설에 따르면 조선이 건국하고 수도를 정하며 풍수 상 선바위를 도성 내에 들이면 불교가 흥하고 선바위를 도성 밖에 들이면 불교가 망하는데 정도전이 이를 알고 선바위가 도성 밖에 있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학대사가 땅을 쳤다고.(이 이야기는 입구 설명문에도 있다.) 선바위 계단 양쪽에는 언제 만든 것인지 모르는 석등이 있는데 제법 잘 어울린다. 선바위에 올라가니 “새해 복 많이”, “수험생 합격 기원” 등 인왕사에서 걸어 놓은 현수막이 바로 눈에 띈다. 의미와 별개로 보기 좋지 않다. 선바위가 인왕사의 것은 아니련마는. 어쨌든 이곳에는 무당 한 분과 신도 한 분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 선바위가 산자락에 붙어있는 바위인 줄 알았는데, 이제 직접 가서 보니 바위만 우뚝 서있는 것이 꽤나 기이하다. 손기정 마라톤 우승,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범인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도 친일파 신용욱이 조종하는 비행기에서 선바위를 내려다보며 구를까 무섭다 했으니, 어찌 이런 바위가 생겨났는지 자연의 조화란... 선바위는 서울특별시 민속자료다.
신록의 대경성부감기(12)
기자 이길용李吉用, 사진반 문치장文致暲 조종(일등비행사) 신용욱愼鏞頊
은익에 뻗힌 세태양극 한 많은 거리 무학재 강 넘어 다시 여의도에,
다시 인왕산 허리를 꺾어 서로 향하니 범 무서운 줄도 모르듯이 산 이 골짜기로 산 저 골짜기로 빠락이 오르고 또 오르고 있다. 범이야 지금에 있으랴만 인왕산 선바위 구를까 무섭다. 거의 직경으로 키를 휘잡아 무학재 고개를 발아래 두니 저기 독립문이 보인다. 철책으로 에워 쌓인 독립문. 입을 봉한 지 오래이니 말이야 없으련마는 전에 맞지 않던 먼지까지 덮치고 덮치었으니 홍제원 화장장행 송장 자동차 먼지다....(하략) (동아일보 1933.6.26.)
(이하는 나머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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