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국립중앙박물관 디지털 광개토대왕릉비 본문
국립중앙박물관의 새로운 랜드마크, 이제 학생도, 어른도 여기서 모인다.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왕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린 비석이다. 고구려의 수도가 자리잡았던 오늘날 중국 지린성(吉林省) 퉁화시(通化市) 지안시(集安市)에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주변으로는 태왕릉, 장군총 등 고구려의 왕릉과 귀족들의 무덤이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비나 광개토왕비(능비 여부 논쟁?) 또는 호태왕비(시호 축약형) 등으로 불린다. 그래서 관련 도서를 찾기 위해서는 이 모든 단어를 한 번씩 입력해야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이하 비석으로 축약)는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대왕 사후 414년 9월 29일(음력) 왕릉을 조성하고 세운 비석이다. 비석의 내용은 대략 1면에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주몽 설화), 광개토대왕의 왕대와 즉위, 사망 등을, 1면 후반부부터 4면 전반까지는 고구려의 영토확장과 영향력 확대, 3면 후반부터 4면까지는 왕릉 관리 규정, 이른 바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기록했다.
*임라일본부설의 근거가 되었던 "倭渡海破" 구절은 1면 후반부에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일본인 학자들 조차도 왜가 건너와 백제,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 학자들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멋대로 "식민사학" 운운하며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학자들이 다 그렇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야말로 식민사학의 후계자들이다.(유의!!!)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멸망 이후 오랫동안 잊혀졌다. 조선의 기록에는 더러 여진황제의 비석으로 언급되기도 했으나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특히 청의 건국 이후에는 만주 지역에 울타리를 쳐서 사람들의 거주를 막았던 까닭에 미지의 공간이 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발견된 것은 1870년에 와서다. 청은 오랜 봉금을 해지하고 개간과 거주를 인정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행정기구를 설치했다. 일설에는 초기 현의 하급 관리가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관월산關月山이라고 전한다.) 청대 금석문의 유행과 더불어 탁본이 유전되기 시작했고 북경의 저명한 학자들도 하나 둘 씩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편 비석은 오랜 세월의 무게로 이끼와 덤불로 뒤덮여 있여 글씨를 파악하기도, 탁본을 뜨기도 불편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석 표면에 가축의 분뇨를 발른 뒤 불로 태워 이끼를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비석도 많은 손상을 입었다. 비석의 탁본은 북경의 저명학 금석학자, 수집가들에게 핫 아이템이 되었다. 청 종실, 저명 금석학자 등이 북경 유리창의 유명한 탁본 제작자 이운종(리윈총李雲從)을 보내 탁본을 제작해 오게 했다. 그러나 50세트가 못되었던 모양이다. (비석이 워낙 높아 탁본을 뜨려면 비계 같은 작업대도 필요하고 했을 터이니) 북경에서 이 비석의 탁본은 금값이나 다름 없었다. 그럼에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 이 시기 비석에 직접 종이를 발라 탁본한 것을 "원석탁본"이라고 부른다. 이와 함께 글자의 윤곽선을 딴 뒤 여백에 먹을 먹인 "묵수곽전본"이라는 것도 유통되었다.(어떤 데서는 쌍구가묵본이라고도 한다.) 오래된 비석의 탁본을 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글자 판독도 어려웠다. (총 1,775자 가운데 150자는 아에 마멸, 나머지도 확실하지 않은 글자가 수두룩하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더 판독이 용이한 탁본을 제작할 욕심에 사람들은 비석 표면에 석회를 발라 면을 고르고 불확실한 글자의 획을 정리했다. 이를 "석회탁본"이라고 한다. 묵수곽전본이나 석회탁본의 경우, 제작자의 판단이 개입되어 비석의 실제와 다른 글자가 포함되었다. 원석탁본을 중요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디지털 광개토대왕릉비는 비석의 실제 크기(높이 6.4m)를 그대로 보여주며 비문은 원석탁본을 기초로 복원했다고 한다. 청명 임창순 선생이 소장했던 '청명본'을 저본으로 청명본의 결손 부분은 다른 원석탁본(서울대학교 규장각본,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미즈타니본)을 사용했다고. - 뒤에 세 개의 탁본을 결합해 만든 복원 탁본도 전시 중이다. 그리고 실제 청명본은 고구려실에서 전시중이니 놓치지 말자!!!
광개토대왕릉비는 비록 중국에 있지만 영상 기술을 활용, 우리 박물관에서 전시할 수 있게 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를 빼고 고구려 역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이렇게 영상은 또 하나의 전시품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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