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바다의 왕자 의친왕, 일본인에게 어업권을 넘겨주다 본문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국권을 피탈당할 때 제일의 부자는 왕실이었다. 왕실은 역둔토며 전국의 산림수택을 소유했다. 군함 하나 사는 데도 낑낑거렸던 대한국이었지만 이권이 있는 곳에는 황실이 있었다. 바다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족 또는 왕족 가운데 어장 소유자로 제일 유명한 사람은 조선의 의화군, 대한제국의 의친왕, 일제강점기의 이강공, 즉 이강李堈이다.
고종,
바다가 자기 것이라며
왕자에게 주다
통영군 연해에서 고기잡이하는 어민 3,268명은 연명하여 이영재, 옥치기, 이주목, 김종혁, 황치종 등을 대표자로 해서 이강공 전하 소유의 어장(漁區)개방 청원을 총독부와 이강공저(李堈公邸)에 제출하였는데, 그 일에 대해 혹 이강공저 사무관 구로자키(黒崎) 이강공저李堈公邸 사무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강공 저하 소유의 어장에 대해서는 연래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며 지원서를 제출한 자도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전하의 어장이 유리한 것을 보고 소위 계획한 것인 듯하며 또 이 어장을 갖고 사기치려는 자가 종종 있어 늘 신경쓰고 있던 터다. 그 어장은 구한국시대(대한제국 때)에 관유인지 사유인지를 분명하게 조사해 관유에 속한 것인 즉, 그 어장을 (고종이) 전하에게 하사하신 것이니 그 당시에 칙령으로써 반포된 것이다. 그 기한으로 말하면 일한병합 후에는 어장취체령에 의거하여 일반 다른 어장과 같이 관리했던 것인데, 금년 5월이 그 허가 기한이 만료되는 터인 고로 사무소에서는 이제 갱신 수속을 하는 중이요. 이 어장에 대해 이강공과 가시이 겐타로(香椎源太郞)와의 계약 연한은 20년인고로 아직도 만기되기까지는 10년이 남아 있기에 통영 연해의 어민이 이러니 저러니 말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하더라. [매일신보 1920.02.22. / 현대어 풀이로 변경]
의친왕,
일본인에게 바다를 넘기다
3.1.운동 직후 상해로 가려고 했다 발각되었기에, 그나마 왕족 중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지만 그 역시 일제강점기 안락한 삶을 누렸던 구 황실가족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통영군 연안의 어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어장 전체를 일본인에게 임대했다. 임차인은 수산재벌이자 조선와사전기회사 사장으로 부산의 유명인사였던 가시이 겐타로(香椎源太郞)였다. 그럼 이 어장은 언제 어떻게 빌려주게 되었을까? 임대차 계약은 을사늑약 직후이긴 해도 아직 대한국이 살아있을 때였다.
[의왕부 어장 임대 허가] 정부에서 통감부 조회가 조회했기에 농부農部로 조회하니 의친왕부 소유인 경상남도 가덕도에서 거제도로 이어지는 연안의 대구어 어장 전부를 이번에 일본인 가시이 겐타로에게 만 20년간을 해당 친왕부에서 별지와 같이 차여했다고 당부에 신청・제출하였기에 이 어장이 친왕부 소유인 고로 궁내부에 조회했더니 이 어장 권리는 동부(궁내부)에 딸린 것이라고 회답하였으니 귀 정부에서 승인하라 했기에 부속서류를 교부하니 승인여부를 즉각 명시하심이 필요하다 하여 의친왕궁 전하와 가시이 겐타로 사이에 약조함이 다음과 같다.
- 해당 임차 기한은 만 20년으로 정할 것.
- 일금 1만 5천원이 1개년 납세액인데 매년 3월 30일에 상납할 것.
- 지금 어획은 1년에 평균 계산하면 대가의 견적이 8만원이 될 터 어획이 늘어날 때에는 증가분(8만원을 상회하는 금액)의 2/10를 전기한 정액 외에 반드시 상납할 것.
- 매년 친왕궁에서 직원을 보내 어획을 조사할 것
- 어구漁具나 어법漁法(고기잡는 법)의 개량 및 어장을 정리할 것.
- 임차인은 어구, 어법 및 어장을 개량할 의무를 부담하되 만일 태만하여 어획이 감소할 경우에는 이 계약을 무효로 하여 친왕궁에서 회수하여 타인에게 임차할 수 있음.
- 만 20년 해약 시에는 어장 설비 및 어구는 일체 헌납할 것.
- 임차인은 어떤 이유든지 타인에게 양여할 수 없되 단 친왕궁에 허가를 얻은 경우에는 이 제한을 두지 않을 것.
[황성신문, 1906.08.29. / 현대어 풀이로 변경.]
계약만큼은 너무도 정상적이다. 즉 어장 주인에게 유리한 조건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다. 이 계약으로 그곳에서 고기잡이로 먹고살던 조선인 어민의 삶은 초토화되었다. 경상남도慶尙南道 거제군巨濟郡의 정범용鄭範鎔 등은 황국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연일 광고를 게재하며 부당함을 역설했지만 허사였다. 이 계약은 결국 가시이 겐타로의 양보(?)로 일부 어장을 주민들이 임차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조정되었으나 그 수혜는 일부에 그쳤다. 이강 소유의 어장은 남해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인 수산업자는 재벌이 되고
우리 어민의 삶은 초토화 되다.
원한 폭발인 영흥 억기면민대회
일반 면민이 죽을 지경에 빠진,
이제 문제의 5개 조항을 결의, 생의 서광은 차를 실행함에,
함남 영흥군 억기면은 용흥강 연안에 31개 동리의 촌이 구역을 상접하여 1500여 호의 인구가 9천명 이상이나 되는 데 중에 반농반어로 생활을 유지했는데 이강공 전하가 용흥강 연안의 어업권을 점령한 뒤로부터 십수 년간에 9천의 민중은 고유의 천산(天産: 하늘이 준 산업)을 잃고 해마다 홍수의 침해를 당해 참상이 많았으므로 당국에서는 수년 전에 어업권의 일부를 억기면민에게 허가하였으나 이것은 31개 동리 중에서 오포, 구만, 율산, 덕상 ...(중략)... 동리에만 한하고 7개 동리 중에서도 겨우 70인에게만 한한 것임으로 극히 소수 개인의 사리에 불과하고 생활에는 아무 영향도 없을 뿐 아니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재에 여간 농작품을 잃고 죽을 지경에 빠진 무산대중은 교육기관 하나도 설치하지 못하여 일반 민중은 비분통탄함을 금할 길 없더니 지난 18일에 면내 유지 이정선, 전손석 두 사람 외26인의 동의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중략)......(중략)... 억기면민대회를 앞서 언급했던 김병흡씨의 집에서 개최하였다더라. [조선일보 1924.08.24.-현대어 풀이로 변경]
이강 공이 어업권을 점령한 뒤로
민중은 천산을 잃다.
실로 "바다의 왕자"라 하겠다. 대한제국이 망한 것은 근대국민국가로의 전환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고갈되어도 고종을 비롯한 왕실은 자기의 재산을 놓지 않았다. 마치 기업은 망해도 사재는 최선을 다해 보전했던 일부 기업인들을 보는 듯하다. 독립운동을 꿈꿨던, 그리고 일제 앞에 당당하고 늘 강직했다던 의친왕이라면 왜 어장을 어민들에게 돌려주겠다는 통큰 결단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대한황실문화원은 "의친왕께서는 수산협회를 결성(매일신보 1922.5.4. 인용)하여 한국 어업권보호에 앞장서셨고 경상도 진해 통영 창원 그리고 함경남도 영흥 어장에서 발생되는 수익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셨습니다."라고 소개했다. 실상을 이리 포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매천 황현은 국권 피탈 후 자결하며 말했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죽는 사람 없다면 슬프지 않으랴.(吾無可死之義, 但國家養士五百年, 國亡之日, 無一人死難者, 寧不痛哉)" 여러 선비들이 죽어나갔지만 이왕가에서는 책임지고 지목숨 거는 사람 없었다. 여전히 황현의 이야기에 울림이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의친왕 또는 대한제국 황실을 재조명한다면 반드시 직시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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