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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대한국? 정식 국호는? 본문

이왕가 사람들

대한제국? 대한국? 정식 국호는?

자불어 2021. 7. 2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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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은 성공한 역사 마케팅 중 하나다. 실체에 접근하기보다는 격동의 근대에 우리가 좀 잘했으면 하는 심리에 (일본만 아니었으면) "잘했어", 또는 (계속 존속했더라면) "잘했을 거야"라는 애정이 더해져 매스미디어에는 곧잘 고종과 명성황후(민비)가 우국의 아이콘으로 등장한다. '드라마나 소설을 역사로 보지 말아야' 하는 건 당연지사고 또 두 부부에게서 나라 살릴 마음이 없었다고 단언하기 어려우나 신하와 백성들은 나라를 살리겠다고 목숨을 내던지는 판에 일본 황실의 일원이 되어 호의호식하거나 정권욕에 불타 일가친척을 요지에 앉히고 미신에 휘둘려 국정을 농단했다는 점에 지나친 미화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각설하고, 조선이 독립을 선언하고 제국으로 국체를 바꾸고 국호도 바꾼 1897년 이후를 대한제국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착 당시 사료를 보면 어디서는 '대한국', 또 어디서는 '대한제국'이고 나온다. 그래서 그 용례를 검토해보았다.

고종실록 1897(정유) 광무원년 10월 13일 국호 개정을 선포하는 조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98) 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 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이에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노라.” (국사편찬위원회 DB)

1899년(광무3) 8월 17일(양력) 법규규정소가 정한 국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여기에서도 “대한국”이라고 지칭하였으나, 제1조에 “대한국은 제국”으로 규정하고 제2조에는 “대한제국”이란 명칭이 등장한다. [고종실록 검색 결과 대한제국이 처음 등장하는 사례다.]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
(제1조) 대한국(大韓國)은 세계만국에 공인된 자주독립(自主獨立)한 제국(帝國)이다.
(제2조)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치는 과거 500년간 전래 되었고, 앞으로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 정치(專制政治)이다.
(제3조) 대한국 대황제(大皇帝)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지니고 있다. 공법에 이른바 정체(政體)를 스스로 세우는 것이다.
(제4조) 대한국 신민이 대황제가 지니고 있는 군권을 침손(侵損)하는 행위가 있으면 이미 행했건 행하지 않았건 막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인정한다.
(제5조) 대한국 대황제는 국내의 육해군(陸海軍)을 통솔하고 편제(編制)를 정하며 계엄(戒嚴)과 해엄(解嚴)을 명한다.
(제6조) 대한국 대황제는 법률을 제정하여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고 만국(萬國)의 공통적인 법률을 본받아 국내의 법률도 개정하고 대사(大赦), 특사(特赦), 감형(減刑), 복권(復權)을 한다. 공법 이른바 율례를 자체로 정하는 것이다.
(제7조) 대한국 대황제는 행정 각부(各府)와 각부(各部)의 관제와 문무관(文武官)의 봉급을 제정 혹은 개정하며 행정상 필요한 각 항목의 칙령(勅令)을 발한다. 공법에 이른바 치리(治理)를 자체로 행하는 것이다.
(제8조) 대한국 대황제는 문무관의 출척(黜陟)과 임면(任免)을 행하고 작위(爵位), 훈장(勳章) 및 기타 영전(榮典)을 수여 혹은 박탈한다. 공법에 이른바 관리를 자체로 선발하는 것이다.
(제9조)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국에 사신을 파송주재하게 하고 선전(宣戰), 강화(講和) 및 제반 약조를 체결한다. 공법에 이른바 사신을 자체로 파견하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DB)

벨기에 총영사가 브뤼셀에서 개최될 만국위생회에 한국이 참여할 것인지를 조회하는 문서에는 “대한제국”이란 호칭을 사용하였다.

照會 第十六號
駐京比國總領事의 照會를 接하온즉 一千九百年 曾設萬國衛生會於巴里 繼自一千九百三年九月二日起 八個日間 將又設行此會於武勒薩京都 列國各有代表 於此會 講討人民衛生改進之方 大韓帝國 如果連結該會 派員代表 則本國政府 行將歡迎 且本領事 亦可轉遞此信于武勒薩該委員會長等因이온바 此에 査하온즉 人民衛生은 事關貴部이기로 玆에 照會하오니 査照하오셔 是否派員을 迅卽示明하시와 以便作復케 하심을 爲要.
議政府贊政外部大臣 趙秉式
議政府贊政內部大臣臨時署理議政府參政 金奎弘 閣下
主任 交涉 局長 課長 大臣 協辦
光武六年十二月十五日
光武六年十二月十五日 起案 (국사편찬위원회 DB)

한일의정서(1904.2.23. 체결)에도 “大韓帝國”이라고 명기하였다.(일본은 大日本帝國으로 지칭)

한일의정서

여권(박기오, 1904.12.19. 발행)에서도 “大韓帝國”으로 명기하였다.(영문은 the Empire of Korea)

여권(박기오)

그리고 한청통상조약(韓淸通商條約, 1899)에는 “大韓國”으로 명기하였다.(청은 “大淸國”)

한청통상조약

그러나 을사조약(1905) 및 한일합방문(1910)의 경우, “대한제국” 대신 “韓國”으로 표기하였다.(일본은 “日本”)

이상을 살펴 볼 때, 공식 국호는 “大韓”이며, 외교관계에서는 “大韓帝國”을 사용하였지만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 大韓國, 大韓帝國, 韓國을 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 통용되는 문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田畓官契(1903.12.11. 작성,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상단에는 국기 도안과 함께 “大韓帝國”이 명기되어 있다. 그리고 후면에 있는 전답소유 등에 대한 8가지 규정에도 “大韓帝國”이 등장한다.

전답관계

순종이 일본특파대사 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후일 제2대 조선총독)에게 수여한 훈장증서(1907.8.27.)에서도 대한국과 대한제국이 혼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본문에는 大韓國皇帝(대한국황제)라 하고, 중앙에는 “大韓國璽(대한국새)”를 좌측에는 훈포장을 담당했던 표훈원의 “大韓帝國表勳院印(대한제국표훈원인)”을 찍었다.

훈장증서: 순종이 한성 경운공(현 덕수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날인해 주었다고 쓰여있다.

당시 교과서로 사용했던 最新高等大韓地誌(최신고등대한지지, 1909 발행)에는 “我大韓帝國(우리 대한제국)”이라고 하였다. 이상 자료로 보면 국내 문서 및 도서에는 대체로 “大韓帝國”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최신고등대한지지

결론은 대한국 또는 대한제국은 국호를 통일해서 쓴다는 인식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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