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친일파의 징표, 한국병합기념장 본문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피탈한 뒤로 여러 기념 행위를 이어갔다.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도 그 가운데 하나다. 한국병합기념장은 1912년 3월 28일 일본 천황의 칙령으로 제정되었다. 한국병합기념장은 단순한 기념 메달이 아니라 "한국병합"에 공이 있는 자들에게 주는 일종의 훈장이었다. 칙령이 반포되자 담당부서인 일본 내각 상훈국償勳局에서는 기념장의 디자인을 발표하고 제작에 착수했다.
지난달(3월) 28일 칙령으로써 한국병합기념장 제정의 건을 발표하였는데, 이 기장은 위 그림에 보이는 바와 같이 황동원형에 직경 1촌으로 상부에는 국수문(국화무늬)이오, 양측에는 오동 및 오얏의 꽃가지를 넣고 (또) 중앙 홍색 좌우 황색, 백색의 테두리가 있는 띠(綬)를 달았다. 이 기장은 한국 병합의 사업에 관여한 자 및 병합 사이에 조선에서 근무한 관리, 한국 정부의 관리 등에게 수여하는 것이라. 후지이(藤井: 후지이 요시고) 상훈국償勳局[신문의 '掌장'은 오기이다.] 서기관은 아직 이 기장 제정의 칙령이 발포하였을 뿐이오, 지금부터 주조에 착수할 터인데 주조 매수는 약 30,000개가량이나 인원은 확정하지 못했고 이 기장은 칙령에 있음과 같이 왼쪽 가슴에 패용하는데 그때까지 받은 여러 기장과 함께 착용할 경우에는 헌법발포기념장을 제1에 달고 다른 기장은 제정 순서에 따라는 바 지금 기장이 맨 나중으로 왼쪽 끝에 패용할 것이라 하더라.[매일신보 1912.4.7./현대어로 고침]
제작에는 1년 가량이 소요되었다. 위의 사진이 바로 실물이다. 신문기사대로 중앙에 붉은색을 기준으로 양 옆 노란색, 가장자리 백색의 띠가 있다. 메달 앞면에는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무늬가 중앙에 있고, 양 옆으로는 왼쪽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 꽃 가지를, 그리고 오른쪽에는 일본정부를 상징하는 오동나무 가지(화투의 똥)가 있다. 그리고 뒷면에는 한자로 " 韓國倂合記念章(한국병합기념장)"과 국권피탈일자인 "明治四十三年八月二十九日(명치사십삼년팔월이십구일)"을 넣었다. 기념장은 나무함(위 사진 왼쪽)에 넣어 증서와 함께 수여했다.
위 사진은 기념장과 함께 수여된 증서로, 중의원 서기였던 히로세 요시로(廣瀨吉郞)의 것이다.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병합기념장 증서 중의원서기 관 정5위, 훈 4등 히로세 요시로 메이지45년(1912) 칙령 제56호의 지에 의거하여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함 다이쇼 원년(1912) 8월 1일 [원형도장: 대일본제국상훈국] 상훈국총재 종2위 훈3등 백작 오오기마치 사네마사(正親町實正)[방형도장: 상훈국총재인] 이 증서를 검사하여 제31672호로 한국병합기념장부책에 기입함 상훈국서기관 정5위 훈 4등 후지이 요시고(藤井善言)[방형도장: 상훈국서기관인] |
1913년 4월 조선으로 발송된 기념장은 대한제국 황제 이하 황실 가족, 귀족(작위수여자), 대한제국 관원과 통감부 및 조선주차군 소속원들에게 배부되었다. 각 행정기관 및 군부대마다 수여식이 개최되었다. 1913년 5월 16일 용산 군사령부에서 열린 수여식에는 후작 이재완李載完, 이준李埈 공, 조동윤趙東潤, 어담魚潭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며 진정한 친일파임을 인증했다.
[참고] 이재완(1855~1922)은 선조의 아들 경창군의 9대손으로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로 들어갔다. 갑신정변 때 병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처벌받지 않았다.(삼일천하 후 서울에 남았던 천재 홍영식은 죽임을 당하고, 김옥균은 망명했으나 후일 고종의 지시로 상해에서 암살된 뒤 시신까지 들여와 부관참시당했던 것과 비교된다.) 국권 피탈 전부터 일본의 침략에 적극 협력하였으며, 병합 후에는 일본 육군 중장의 예우를 받았다. / 이준(1870~1917)은 흥선대원군의 장남 이재면의 아들로, 고종의 친조카다. 흥선대원군의 사랑을 받았으며, 늘 제위 또는 왕위를 찬탈할 가능성이 있는 후보자로 여겨져 고종에게 위협이 되었다.(실제 그를 옹립해 일으켰던 쿠데타도 몇 차례 일어났다.) 국권피탈 직전에는 친일단체 신궁봉경회 총재를 맡아 활동했다. / 조동윤(1817~1923)은 풍양 조씨 일족으로 대한제국 육군법원장, 육군무관학교 교장, 시종무관장 등을 지냈다. 일진회 회원이었으며, 국권 피탈 후에는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 어담(1895~1943)은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대한제국 육군 포병 참위로 임관했다. 국권피탈 직후에는 이왕직 친위부에서 근무했고 1930년에는 일본제국육군 중장이 되었다가 이듬해 예편해 중추원참의 등으로 활동하며 지원병제를 홍보했다.
일본은 "일한병합"에 공로가 있는 자들에게 일한병합기념장을 나눠주고 주요 인사에게는 아래와 같이 훈등勳等도 부여했다.
9일 관보로써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 친왕(伏見宮貞愛親王) 전하를 비롯하여 각 귀족, 이왕, 이태왕, 이왕세자 기타 각 조선왕족, 도쿠다이지(德大寺), 제2차 가쓰라(桂) 내각원, 조선총독부원, 조선주차군관계자, 외무성고등관, 궁내관, 귀족원과 중의원 양원 의원 일동에게 대정원년 8월 1일부로써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한다는 지를 공표했는데, 우 내 조선의 관계자 57명에게는 오늘 이후 이어서 (병합의 훈등) 수여를 공표했는데 다음과 같다.
대훈위 창덕궁昌德宮 이왕李王
대훈위 덕수궁德壽宮 이태왕李太王
훈1등 왕세자 이은李垠
이왕비 윤씨尹氏
훈1등 이강공李堈公
훈1등 이희공李熹公
훈1등 이준공李埈公
이강공비 김씨
이희공비 이씨
이준공비 김씨
중추원고문 자작 박제순朴齊純
중추원고문 자작 조중응趙重應
중추원고문 자작 이용직李容稙
충추원부의장 백작 이완용李完用
이왕직장관 자작 민병석閔丙奭
이왕직장관 자작 고영희高永喜
3만여 개를 주조했다고 하나, 또 일설에는 8천여 개라고도 한다. 여하튼 그 첫 장에는 이왕李王 이하, 구황실 가족들이 있었다. 앞서 유길준 같은 자는 작위와 은사공채를 거부했고, 또 여러 사람이 일한병합기념장을 수령하지 않았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자손 가운데 거부한 이 하나 있던가. 고종이 독살로 죽었다며 분개해 하지만, 설령 독살설이 사실이라 해도 면전에서 꽥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죽은 것에 통탄해 해햐 하지 않을까? (헤이그 밀사 사건처럼 신하들 갈아 넣은 것 말고 말이다. 순종은 즉위 후 이상설은 교수형에, 이준과 이위종은 종신형에 처할 것을 재가했다. 이들을 위해 황실이 무엇을 했나. 일본의 압박이었다는 변명이 일국의 군주로서 할 말인가.) 또한 역사를 돌아보면 망국의 군주가 어찌 운명을 마쳤던가. 심지어 이민족에게 나라를 내주고 말이다. 그야말로 고려 우왕이나 창왕의 죽음보다 못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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