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사람들

조선통치비화 - 의친왕 탈출 사건의 진상(1)

자불어 2026. 2. 23. 00:23

이하 글은 <조선통치비화>(조선행정편찬총국, 1937)에 실린 글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로 전환하던 시기 식민통치 각 방면에 있던 사람들의 회고담을 실은 것이다.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다다시는 책을 출간하기 1년 전 2.26. 사건 시 살해 당한 까닭에 정무총감이었던 미즈로 렌타로가 중심이 되었다. 총 14장의 주제로 되어 있으며, 이강공 사건은 10장에 해당한다. 당시 이강공의 신문을 맡았던 지바 료(千葉 了)의 증언으로 신뢰성이 높다. 
일제협력자, 주색잡기로 평생을 일관했던 이강(전 의친왕) 옹호자들은 애당 초 일본인이 발간한 자료는 거짓으로 치부한다. 당시 일본 정계에서는 의친왕을 더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도 공공연히 있었고, 특히 심문을 담당했던 지바 료는 이강을 의심하고 치밀하게 조사했다. 그럼 해당 원문을 몇 차례에 나누어 게재한다. 


 
조선 귀족의 동요
(山上 昶) 치안 유지와 관련된 문제로서, 당시 국내외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이른바 이강공(李堈公) 탈출 사건에 관하여,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당시의 진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千葉 了) 다이쇼 8년(1919) 9월 이래의 불안한 정세는 10월 1일의 폐점 운동(閉店運動) 진압에 의해 다소 완화되었고, 이어 10월 31일 천장절(天長節)에 있어서의 축하 분위기와 함께 단속 당국의 조치에 힘입어 어느 정도 진정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1월에 이르러 귀족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는 정보가 곳곳에서 들려오게 되었습니다. 특히 남작 김가진(金嘉鎭)이 이종욱(李鐘郁)에 의해 상하이로 유인·납치되었다는 확실한 보고를 접하였으므로, 귀족저택에 대한 특별 경계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즉시 이에 대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경위(警衛) 측에서는 오랜 기간의 정세 속에서 현 시국에 대한 긴장감이 다소 해이해 진 듯한 경향도 있었으므로, 11월 10일 각 귀족 저택을 담당하는 경위 순사를 절반씩 저의 집무실로 소집하여, 제가 직접 시국의 중대함을 설명하고 귀족 경위에 만일의 소홀함이 없도록 엄중 훈시했습니다.
그날은 오전 11시경으로 기억합니다만, 제3부 경위반의 주임이 훈시 도중 제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로 보고하기를, 전날 밤 이강공 전하께서 공저(公邸)를 탈출하셨을 의혹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저는 마침내 중대한 사태가 발생하였음을 자각하고 훈시를 서둘러 마친 뒤, 경위 순사들을 각 귀족 저택으로 돌려보내고 즉시 이강공 전하의 행방을 조사하는 데 착수하였습니다.
 
이강공의 탈출
이에 먼저 이강공 전하께서 탈출하셨다는 정보의 근거를 확인한 바, 전날 밤 10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이강공 저택의 후문을 경계하고 있던 도지(土師)라는 형사 순사가, 어둠 속에서 마침 이강공 공저의 후문 근처에서 키가 큰 두 사람의 모습을 어렴풋이 목격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수상히 여겨 그 곁을 지나며 밤눈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미리 주의를 받고 있던 전하의 모습인 듯이 여겨져 두 사람의 뒤를 따랐으나, 마침 명월관 지점 부근에서 그 자취를 놓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실을 곧바로 이강공 저택을 경비하던 순사에게 알리고, 이어 제3부 숙직자에게 보고하였다는 정보가 제게 전달되었습니다.
이에 저는 과연 그 인물이 전하이신지를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여, 즉시 경위과 직원을 이강공 공저로 보내 구로사키(黒崎) 이왕직 사무관을 만나 전하의 재택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후 3시경 그 회답이 제게 도착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구로사키 사무관의 답변은 전하께서 분명히 저택 안에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사무관의 확인에 착오가 있을 경우, 전하께서 해외로 탈출하신 것이 되어 조선 통치에 미치는 영향이 지극히 중대하리라 판단하였으므로, 저는 사무관이 전하의 재택을 명확히 단언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재차 확인하였습니다. 이에 사무관은, 먼저 비전하(妃殿下)를 배알하고 전하의 재택 여부를 여쭈었더니, 비전하께서 전하께서는 무사히 저택에 계신다고 답하셨다는 점이 하나의 근거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재택 여부를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하여 서류의 재가를 청하도록 보이를 보냈더니, 전하께서 재가는 나중에 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 두 번째 근거라고 하였습니다.
 
구로사키 사무관과의 교섭
이에 저는 두 번째 근거로 제시된, 보이가 전하의 말씀을 받들었다는 점에 대하여, 그것이 과연 전하의 모습을 직접 배알한 뒤에 받은 말씀이었는지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방 안에서 미닫이문을 사이에 두고 말씀이 전해졌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비전하의 말씀도, 보이의 회답도 모두 전하의 모습을 직접 배알한 결과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에 저는 구로사키 사무관의 보고를 여전히 불확실한 것으로 판단하여 안심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사무관 자신이 직접 전하의 모습을 배알하고 아뢰지 않는 한,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이로 인해 책임 문제가 발생한다면, 경비상의 필요에 따라 제가 이 요구를 한 것이므로, 그 책임은 제가 어떠한 형태로든 감당하겠다고 밝히며,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끝까지 전하의 모습을 배알할 수 있는 수단을 취해 달라고, 더욱 강경한 교섭을 구로사키 사무관에게 요구하였습니다.
그때는 이미 오후 4시를 넘긴 시각이었고, 사무관은 이미 자택으로 돌아간 뒤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와 같은 강한 요구를 받고 사무관은 놀라 다시 집을 나와 사무실로 출근하였으며, 사무관 자신이 다시 비전하를 배알하고, 단호한 태도로 반드시 전하를 배알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과거에도 조선에서 유사한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현하라더니) 결국 왕이 이미 훙거(薨去)한 뒤였다는 전례가 있다고 하며, 그 사실 또한 비전하께 아뢰어, 만에 하나의 착오도 없도록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으니 전하의 모습을 배알하고자 한다고 강력히 상언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비전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여시어, 그토록까지 말한다면 사실을 이야기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실은 전하께서 전날 밤 저택을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처지가 그러하므로, 경찰이 주변을 경계하게 되면 오히려 전하께서 돌아오시는 데 곤란을 겪으실 것이니, 경찰에서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해 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오카모토라는 고등과장이 제게 전해 온 것은 오후 5시가 조금 지난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에 저는 중대한 사태가 마침내 발생하였음을 직감하고, 즉시 다시 이케(池) 경무국장을 만나 그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 전역은 물론, 일본 본토, 만주, 시베리아, 상하이 방면에 이르기까지 전보를 발송하여 수색의 조치를 긴급히 강구하도록 하였습니다.
(이하 계속)

조선통치비화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