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사람들

조선통치비화 - 의친왕 탈출 사건의 진상(2)

자불어 2026. 2. 26. 00:21

이하 글은 <조선통치비화>(조선행정편찬총국, 1937)에 실린 글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로 전환하던 시기 식민통치 각 방면에 있던 사람들의 회고담을 실은 것이다.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다다시는 책을 출간하기 1년 전 2.26. 사건 시 살해 당한 까닭에 정무총감이었던 미즈로 렌타로가 중심이 되었다. 총 14장의 주제로 되어 있으며, 이강공 사건은 10장에 해당한다. 당시 이강공의 신문을 맡았던 지바 료(千葉 了)의 증언으로 신뢰성이 높다. 
일제협력자, 주색잡기로 평생을 일관했던 이강(전 의친왕) 옹호자들은 애당 초 일본인이 발간한 자료는 거짓으로 치부한다. 당시 일본 정계에서는 의친왕을 더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도 공공연히 있었고, 특히 심문을 담당했던 지바 료는 이강을 의심하고 치밀하게 조사했다. 그럼 해당 원문을 몇 차례에 나누어 게재한다. 아래는 그 두 번째 편으로, 지바 료 지휘 아래 일제 경찰이 이강의 뒤를 쫓는 부분이다. 여기서 지바 료는 자신이 이강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라며, 이강이 독립운동에 뜻을 두었던 것도, 자발적으로 출발한 것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이강공 사건 이후 이강공을 엄단 조치, 형사 처벌 해야 한다는 일본 내 논의로부터 이강공을 보호하려는 뜻에 덧붙인 수사라고 생각한다. 의친왕 옹호자들은 왕공족이어 처벌할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일본정계에서 처벌할 의지만 있었다면 그 정도 못했을까. 의친왕 이강이 조선인의 신망을 받아서 차마 처벌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랬다면 개벽 같은 잡지에서 그를 축첩왕으로 다루었겠는가. 여하튼 그럼 이하 전개를 보자. 


행적의 수사

그 후 다음 날에 이르기까지 필사적으로 대대적인 수색을 계속하였으나, 전하의 행적은 끝내 묘연하여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 가지 단서를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명월관 지점의 주인 황원균(黄元均)이라는 자가 출두하여 말하기를, 전날 밤부터 명월관의 좌석 등을 형사 순사들이 빈번히 조사하고 있는데, 전해 듣자 하니 이강공 전하를 수색 중이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자신에게 약간의 짐작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에 저는 사실이 그러하니, 짐작이 있다면 반드시 들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자의 진술에 따르면, 전날 밤 전하께서 명월관 지점의 문 안으로 들어오셨다가, 그 안에 있던 인력거를 타고 다시 외출하시는 모습을 목격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즉시 조치를 취하여 그 인력거꾼을 심문한 결과, 전하를 공평동의 어느 문가까지 모셔 드렸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곧바로 그 문 안을 수색하였으나, 몇 채의 집이 있었음에도 의심할 만한 집은 한 채도 없었고, 다만 한 채의 빈집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빈집에 이전에 거주하던 자들까지 조사하였으나, 그 방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빈집이 전하의 탈출과 어떠한 관련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추정 아래, 여러 방면으로 수배를 내어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로 기억합니다만, 제3부장실을 수사본부로 삼고, 경무국에서는 마루야마(丸山) 사무관, 구연수(具然壽) 사무관 등이 참여하여 수사 방안을 협의하던 중, 마침 안동현(安東縣)으로부터 한 통의 전보가 제게 도착하였습니다. 이를 개봉해 보니, 전하를 안동현 정거장에서 발견하여 여관에 체류하시도록 청해 두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후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라남도의 석동(錫東)이라는 부호가 전하께 어기권(漁基權)을 담보로 삼아 3만 원을 융통해 드리겠다는 취지를, 그 대리인을 자처하는 이민하(李敏河)라는 자가 총독부 촉탁 정운복(鄭雲復)을 통하여 전하께 두 차례에 걸쳐 서신으로 전달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에 전하께서는 3만 원의 자금을 융통받게 된다는 말을 듣고, 김삼복(金三福)이라는 시종 한 명을 대동하시어 공저의 후문으로 나와, 명월관 지점 문 근처에 거주하던 김정완(金貞完)의 집으로 가셨으며, 그곳에서 돈을 건네받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자의 권유로 공평동의 집까지 가 달라는 요청을 받아, 명월관 지점 문 안에서 인력거를 타고 공평동까지 이동하셨습니다. 공평동의 한 집으로 안내되어 들어가시자, 이민하라는 자가 나와 가방을 열어 3만 원의 현금을 보여 드렸습니다. 이는 후일 확인한 바에 따르면, 맨 위에 백 원권 한 장이 놓여 있고 그 아래에는 전부 신문지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방의 입구를 살짝 열어 전하께 보여 주며, 자금은 이와 같이 준비되어 있으니 언제든지 융통해 드리겠으나, 이 기회에 특별히 상하이로 출행해 주시기를 간청한다고 강요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전하께서는 곤란하다 하여 이를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뒤쪽의 미닫이문을 걷어차고 다섯, 여섯 명의 불령선인(不逞鮮人)이 갑자기 방 안으로 뛰어들어, 전하를 둘러싸고 권총을 들이대며 상하이 탈출을 강요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평소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바라셨고, 또한 자금 융통을 원하셨던 마음도 다소 있었으나, 눈앞에서 권총으로 위협을 받자 심한 공포를 느끼셨다고 합니다. 이 점은 뒤에 말씀드리겠으나, 전하께서 친히 제게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틀림없는 사실로 확인한 바입니다. 이와 같은 협박을 받으신 전하께서는 부득이 상하이행을 승낙하셨고, 불령선인들은 전하의 눈을 가린 채 인력거에 태워, 경성 창의문(彰義門) 밖 약 1리쯤 떨어진 산속의 한 농가로 모셔 갔습니다. 그 농가에는 앞서 언급한 정운복을 비롯하여 다섯, 여섯 명의 불령선인이 모여 있었고, 모두 권총을 준비한 채 전하를 상하이로 데려갈 방안을 의논하며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그 후 수색역(水色驛)에서 전하를 하인 차림으로 변장시켜, 두세 명의 불령선인이 그 주위를 둘러싼 채 안동현까지 탈출을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신의주 경찰의 활동

당시 제가 보낸 수배 전보가 평안북도 경찰부에 도착하자, 경찰부는 즉시 요네야마(米山)라는 경부를 신의주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발 늦어 열차는 이미 출발한 뒤였으므로, 요네야마 경부는 자동차를 급히 몰아 압록강 철교를 건너 열차를 앞질러, 안동현 정거장에서 하차하는 사람들을 감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천우(天祐)라 할 만하게도, 마침 전하께서 내리시는 모습을 알아보고, 즉시 전하를 여관으로 모셔 간 뒤 저희 쪽으로 전보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이는 후일 확인된 사실입니다만, 압록강을 건너는 열차 안에서는 관할 경찰관이 통행증을 검사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전하께서는 하인 차림으로 변장하시고 타인 명의의 통행증을 소지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 신분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로써 수사본부는 크게 안도하였고, 곧바로 경무과장 고무타(小牟田) 경시에게 수명의 경찰관을 대동시켜 전하를 모셔 오도록 안동으로 파견하였습니다. 동시에 전하의 탈출을 기도한 불령선인을 검거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전하에 대한 조사를 전보로 요청하였고, 그 결과가 수시로 전보로 회신되어 와 대체적인 경과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뒤에 계속)

조선통치비화 좌담회의 좌장이자 전 정무총감이었던 미즈노 렌타로, 일제의 문화통치를 상징하는 사진이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