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길에 내쫓긴 구왕족 의친왕 아들 이곤 씨 일가
홍릉 마굿간 집 강제 철거
어제 천막치고 노숙
생계를 덜기 위해 딸을 친척집에
구왕족의 후예가 살던 집에서 쫓겨나와 길가에 나앉았다. 서울 동대문구 청량2동 205 홍릉 한 낡은 마굿간을 개조하여 8년간 살아온 의친와 이강(영친왕 이은의 맏형) 공의 여섯째 아들이곤(李銀·50)씨 일가는 23일 오전 9시 문화재관리국이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기거하던 집을 강제철거하는 바람에 노숙하는 신세가 되고만 것이다. ...(중략)... 부친인 의친왕이 삼일운동 전 독립결사 대동단에 의해 대한임시가정부 황제로 추대되어 한만국경을 넘다 발각되어 왜경에 의해 신의주에서 잡혀 오자 이씨가 아버지 따라 일본에 끌려간 것은 아홉살때였다. 지금의 종로예식장 자리 4천여 평의 사동궁(寺洞宮)서 자란 이씨에겐 다섯형이 있으나 4명이양자로 나가고 맏형인 이건 공 씨가 일본에 귀화한 바람에 사실상의 후사(後嗣)가 되어왔다. 어릴 땐 이왕직에서 주는 매달 백원 씩(당시 초등학교 교사월급이 16원)의 학자금은 생활의 궁색을 모르게 했으나 벗을 사귀고 노는 일상사가 장막에 둘러쳐져 울적한 삶을 달래다가 시름시름 몸이 약해져 릿쇼(立正) 대학 영문과도 2년 만에 중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과 함께 이씨도 조용한 서민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잇따른 인플레로 왕실보조비가 명목만의 액수밖에 되지 않아 물려받은 부동산을 까먹기 시작했 다. 6.25사변때는 병신행세를 하고 다녀 납북의고비를 넘길수 있었다. 피난시절에는 해운대 어느 미군부대 통역관으로, 거제도포로수용소 미군노무처식당의 카운터로 생활전선에 나서기도 했다. 환도해보니 종로구 궁정동1번지 150평짜리 집은 혼란기를 틈타 이미 엉뚱한 사람의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었다. ...(중략)... 경성여의전(현 수도의대)을 중퇴한 황 여인과는 광복 이듬해 중매 결혼...(하략)[조선일보 1969.4.24.]
불과 10년 전 평화신문은 릿쇼중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릿쇼대학 영문과"라고 주장. 하지만 릿교대학에 영문과가 생긴 것은 1950년. 당시 이곤 씨는 본인이 다닐 때 릿쇼대학 영문과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또 어디에는 "독어독문학과"라고 했는데, 릿쇼대학에 독문과는 지금도 없다.

기자가 옮긴 이곤의 증언은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많이 뒤섞여 있다.
1. “의친왕이 대동단에 의해 대한임시가정부 황제로 추대”, 대동단 왕당파가 주축이 되어 망명을 주도했던 것은 사실이나 황제로 추대한 적은 없음. 물론 대동단 명예총재란 말도 거짓. 그리고 “가정부”는 가짜 정부란 뜻으로 일제가 사용했던 용어다.
2. “왜경에 의해 신의주에서 잡혀오자 이씨가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끌려간 것은 아홉 살 때” 의친왕이 망명에 실패하고 붙잡혀 온 것은 1919년, 그는 1920년생으로 아홉 살 때는 1928년 무렵, 망명 피착 이후 거의 10년이나 지난 뒤임. 연속적으로 이야기할 일이 아닌 데다 의친왕이 일본에 끌려 갔다는 것부터 거짓.
3. “릿쇼대학 영문과 2년만에 중퇴” 앞서 이야기 했듯 존재하지 않는 학과를 다닐 수 없으므로 당연히 거짓.
4. “환도해보니 종로구 궁정동 1번지 150평 짜리 집은 혼란기를 틈타 이미 엉뚱한 사람의 이름으로 등기” 그런데 궁정동 1번지는 일반 주택이 아니다. 조선왕실 후궁 사당인 “칠궁”으로 살림집이 아닌 왕실 사당이며 그리고 현재도 국가유산청 관리 중이다. 어쩌면 이곤은 이곳을 자기 집처럼 생각했던 것일지도,
5. “경성여의전을 중퇴한 황 여인과는 광복 이듬해 중매결혼” 1953년 사기혐의로 재판 받았을 때 처는 "윤씨"로 나오며 당시 슬하에 딸 둘을 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광복 이듬해 결혼? 설명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설명을 좀... 이상한 생각할 필요 없이 구술이 틀렸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인플레로 왕실보조비가 명목만의 액수 밖에 되지 않아 물려받은 부동산을 까먹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 의친왕비 김씨 관련 기록이 있다.
“의친왕이 1955년 8월 16일에 타계한 후 의친왕비는 그동안 안국동별궁에서 지내던 안전한 생활도 사라지고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거처를 화양리에 있는 의친왕 묘 재실로 옮겨 국가에서 지급하는 생활비로 궁핍한 삶을 이어갔다. 정환희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격변하는 시기 의친왕비는 거취문제가 심각하여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고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지냈다고 한다. 이는 국가적 무관심도 문제였지만 의친왕의 가족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의친왕의 많은 후실과 자녀들은 의친왕비에게 의존하며 생활을 이어가려 했고 왕실 명의로 되어 있는 토지를 매각하는 등 사회적 문제를 일으켜 의친왕비가 금곡 재실이나 안국동별궁 등에서 지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유상순. (2025).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의 문화유산 보존 활동과 종교 유산화 과정: 대한제국 의친왕비 유물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동의대학교.]
이곤 씨의 행동은 의친왕비에게 시름이었던 듯하다. 이곤 씨의 증언은 사실과 다른 것이 많다. 물론 당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어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수는 있지만 역사가 될 수 없는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다. 집안의 증언이란 이런 것이다.
다음에는 위의 논문을 참고로 오륜대순교자박물관 소장 의친왕 가전 유물의 기증자가 누구인지, 그 기증자가 이곤이라는 의친왕 기념사업회 이준 회장의 주장을 논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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