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 글은 <조선통치비화>(조선행정편찬총국, 1937)에 실린 글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로 전환하던 시기 식민통치 각 방면에 있던 사람들의 회고담을 실은 것이다.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다다시는 책을 출간하기 1년 전 2.26. 사건 시 살해 당한 까닭에 정무총감이었던 미즈로 렌타로가 중심이 되었다. 총 14장의 주제로 되어 있으며, 이강공 사건은 10장에 해당한다. 당시 이강공의 신문을 맡았던 지바 료(千葉 了)의 증언으로 신뢰성이 높다.
일제협력자, 주색잡기로 평생을 일관했던 이강(전 의친왕) 옹호자들은 애당 초 일본인이 발간한 자료는 거짓으로 치부한다. 당시 일본 정계에서는 의친왕을 더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도 공공연히 있었고, 특히 심문을 담당했던 지바 료는 이강을 의심하고 치밀하게 조사했다. 그럼 해당 원문을 몇 차례에 나누어 게재한다. 아래는 그 다섯 번째 편으로 이강 탈출 사건이 식민 통치에 미친 영향을 증언한다. 그들은 의친왕이 망명했을 때 미칠 영향을 축소해 말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강공이 국경까지 단순히 끌려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망명 정부의 수반으로 국민들에게 존경받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정은 거기까지다. 경성으로 끌려온 이강공은 탈출 사건을 모두 전협의 탓으로 돌렸다. 이 일로 신문을 받았던 김흥인(수인당)도 끌려갔다고 말했다. 이강공은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일제가 바라던 대로 답을 했다. 그리고 그 답이 근거가 되어 전협 등 관련자들은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본 사건 이후 이강은 전협 등 관련자들과 다른 세상을 살았다. 전협이 감옥에서 죽어갈 때 의친왕은 규슈에서 온천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후손들은 온천욕을 압송이라 말한다. - 제4화를 보면 사건 이후 "총독부가 도쿄로 끌고 가려고 했다"는 세간의 소문이 실은 의친왕 자신이 사건을 무마해 보고자 던진 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립운동과 워싱턴 회의
이강공 전하의 탈출 사건의 내용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상하이까지 가셨더라면, 당시 이른바 불령선인들은 반드시 전하를 내세워 독립운동의 기세를 한층 드높였을 것이고, 이는 조선 통치에 중대한 동요를 초래함은 물론 국제 여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태를 위기일발의 순간에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국가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믿습니다. 이와 같은 위험성은 1921년 워싱턴 회의 당시 미국에서 전개된 선전 활동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워싱턴 회의 참석 명령을 받고 도미하여 1922년 1월 1일 뉴욕에 체류하고 있을 때, 이강공 전하를 비롯한 조선인 명사 260명의 서명이 기재된 독립 청원서가 발표되었습니다. 저는 당시의 사정을 비교적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청원서에 전하의 이름이 포함된 것은 위조라는 확신을 가지고 워싱턴 현지에서 이를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저는 이강공 전하 탈출 사건의 대략을 문서로 정리하여, 당시 총독부 신예산 성립 문제로 상경 중이던 미즈노 정무총감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곧 회신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조선 경찰관들의 노고를 생각할 때 이 예산을 성립시키지 못한다면 자신은 직을 걸고서라도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각의에서 강경히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에 깊이 감동하였고, 당시 소집한 경찰서장 회의에서 이를 인용하여 더욱 분발할 것을 독려하였습니다. (이상 지바 료)
탈출 사건과 경찰관들의 긴장
(이하 전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 이강공 탈출 사건은 조선 통치상 상당한 중대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그 처리 과정에서 경찰이 겪은 고심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국경에서 전하를 발견하여 경성으로 모셔온 뒤, 어디에 모셔야 할지를 두고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결국 총독 관저 내 녹천정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녹천정 경비 문제 역시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지바 경찰부장은 이에 대해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당시 녹천정 경비를 맡았던 종로경찰서 소속 한 순사는 훗날 제게 그때의 상황을 직접 들려주었습니다. 12월 말의 혹한 속에서 문전 경비를 서는 일은 실로 고된 일이었다고 합니다. 밤이 깊어지면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어도 한기가 스며들어 견디기 어려웠고, 발은 감각을 잃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1시간 교대였으나, 추위를 견디기 어려워 30분 교대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지바 경찰부장은 수시로 현장을 순시하며 이렇게 강조하였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다시 탈출하시거나 독립운동 세력에게 신병이 탈취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단순한 경찰의 실책이 아니라 조선 통치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훈시는 말단 순사에 이르기까지 깊은 긴장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경찰 조직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근무하였고, 저는 그러한 분위기가 조선 13도의 치안을 유지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당시의 긴박함과 책임의 무게가 선명히 되살아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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