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사람들

의친왕이 제위 계승 1순위였다고?

자불어 2026. 7. 24. 01:03

"왕위계승 1순위"이런 것은 왕실전범이 성문화된 왕조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누구도 말이 안 나오는 것은 당연히 "적장자"다. "적장자"라고 하면 그저 나이가 많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적자여야 된다는 말이다. 즉 어머니가 정실부인, "후(后)"여야 한다. 그러나 조선과 대한제국의 임금 27명 가운데 적장자는 고작 7명 뿐이다.(그중에 한 명이 연산군)

사실 적장자를 포함해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할 권한은 전적으로 왕에게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중요한 변수는 모친의 지위다. 모친의 위계는 후손의 지위인 동시에 왕의 총애를 의미한다.

의친왕 후손들은 종종 영친왕과 의친왕을 수평적인 관계로 생각하며, 심지어 연장자라는 이유로 의친왕이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상이자 망상이다. 모친의 지위를 보자. 매천 황현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신묘년(1891) 겨울에 명성왕후는 고종에게 강을 의화군(義和君)으로 봉하자고 권하였다. 의화군강은 상궁 장씨의 아들이었다. 강이 태어났을 때 명성왕후는 화가 나서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장씨의 거처로 가서 그 칼을 문지방에 꽂았다. (중략) 그(장씨)는 땅에 엎드려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중략) 명성왕후는 그가 가여운 생각이 들어 칼을 던져 버리고 웃으며 “과연 대전의 사랑을 받을 만하구나. 지금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만 다시는 궁중에서 거처할 수 없다”고 한 후 역사(力士)를 불러 그를 포박하게 하였다. 그러고 그의 음부 양쪽의 살을 도려낸 후 그를 낭가에 실어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 후 장씨는 그의 형제들에게 10년 동안 의지하고 살다가 그 상처로 인하여 죽고 말았다.

고종실록 1900년 9월 17일자에는,

궁인(宮人) 장씨(張氏)를 숙원(淑媛)으로 추증했다.

황현은 상궁이라고 기록했으나 실록은 그냥 궁인으로 표현했다. 상궁은 내명부 정5품으로 궁인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다. 따라서 황현이 상궁이라고 한 것은 예우 차원에서 ‘승은상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어쨌든 장씨는 죽은 뒤에야 왕의 후궁 반열에 올랐다. 숙원은 종4품으로 후궁의 말단이다. 1906년 5월 27일 장씨는 다시 귀인으로 초고속 승진한다. 귀인은 종1품이다. 장씨의 지위는 귀인에서 끝이 났다. 장서각 소장 왕가기신(王家忌晨)에 따르면 장씨는 1838년 10월 12일(天保九年十月十二日)에 태어나 1887년 10월 14일(明治二十年十月十四日)에 사망했다. 장씨는 아들 이강이 의화군에 책봉되는 것도 못 보고 생을 마감했다. 궁인 장씨의 승봉은 사실 친자 이강이 의친왕에 책봉되면서 수반된 조치였다.

그러면 영친왕의 어머니 엄씨는? 엄씨는 1897년 10월 20일 역시 궁인 신분으로 황자를 출산한다. 그리고 바로 이틀 뒤 귀인이 된다. 이어 1900년 8월 3일, 정1품인 빈의 지위에 오른다. 그리고 다시 1901년 10월 14일 비의 지위에 오른다. 비는 품계가 없다. 그리고 1903년 12월 25일에는 다시 황귀비로 책봉했다. 끝내 황후란 타이틀은 지닐 수 없었지만, 죽기 전까지 내명부의 수장이었다.

문제는 나이가 아니라 지위다. 의친왕의 장자 이건은 이희공의 양자로 입적되어 먼저 공이 된 동생 이우에게 깍듯하게 예우를 갖추어야 했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왕조 국가의 법도다. 영친왕과 의친왕의 지위는 이미 태(胎) 안에서 갈렸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종은 의친왕에게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매천야록에는 명성황후가 순종의 후계가 없을 경우, 의화군의 자식으로 대를 이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의친왕이 왕위 계승 1순위"라고 쓰는 사람들은 심지어 "의친왕이 양보를 했다"는 이런 이야기도 한다. 증좌 없는 허구일 뿐이다. 의친왕이 양보를 했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의친왕은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이토 히로부미에게 비벼서 어떻게 해보려고도 했다. 총독이나 정무총감이 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런 열패감의 흔적은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1919년 그 유명한 망명 거사가 실패하고 돌아오자, 그는 자신이 경성을 벗어나려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이왕직의 시선을 꼽았다. 

“나는 별로 일본에 반대하는 생각은 없으나, 아무튼 이왕직 내부에는 나에게 반대하는 자들뿐이어서, 당 사무소 같은 곳도 나와 내 일가에 대하여 반대하고 냉담하기 짝이 없어, 도저히 외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다. (중략) 아시다시피 성급한 성질이라 나쁜 일을 보고 들으면 그대로 참고 견디지 못하는지라, 성질상 반대를 받기도 하지만, 아무튼 불평이 쌓여 답답한 심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때로는 이를 술로써 풀려다가 취하면 난폭해지는 일도 있어 점점 신용을 잃는다. 신용을 잃으면 더욱 번민하여 몸 둘 곳이 없어진다. 게다가 가족이 많아 예산 안의 금액으로는 비용을 충당할 수 없어 여기저기에 빚을 쌓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부득이 난폭하나마 사무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은밀히 돈을 빌려 그 급한 사정을 넘기고 있으나, 그 부자유스러움과 불쾌함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경찰서조서(警察署調書) 이강공(李堈公) 신문조서(訊問調書)(제1회) -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 가운데)

사실과 어긋난 이야기가 무분별하게 퍼지는 듯 하여 이야기를 보탠다. “구술사”로 포장한 거짓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자들이 횡행한다. 다음에 시간이 허락하면 숙명여자대학교 설립자 순헌황귀비와 의친왕의 관계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왕가기신 ( 王家忌晨 )_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