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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세종시와대한황실의독립운동기록과시대의증언 비판 01. 삼성장군 의친왕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의친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역사왜곡으로 점철된 “집안 띄어주기”에 불과했다. 그날 허위 사실을 하나씩 잡아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육군 3성 장군" 의친왕 편이다. 자료집 첫머리의 의친왕 소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1905년 귀국하여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서양 의술을 적극 들여오는 한편 대한제국 육군 3성 장군으로 군대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당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무슨 업적을 세웠는지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일단 “대한제국 육군 3성 장군” 시절을 보자. 고종실록에는 의친왕에게 육..
The fall of the Korean Empire was largely due to the role of King Gojong, who was an incompetent and foolish ruler. Sunjong, the next king, lacks presence even as much as the recent statue episode, leading people to pin their hopes on Prince Yi Kang. However, as Yi Bangja and even Yun Chi-ho pointed out earlier, Yi Kang was known for his reckless spending and was notoriously indulgent, especiall..
의화군 이강, 훗날 의친왕은 행실이 불량했다. 이는 이방자도, 윤치호도 지적한 바 있다. 일단 그에게는 낭비벽이 있었다. 의친왕의 후손들은 의친왕의 미국 유학하며 만났던 사람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승만이 목도했듯 그는 "유學"하며 공부에 별 뜻을 두지 않았다. 나라는 풍전등화에, 백성들은 주렸지만 의친왕은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다녔다. 매년 대한제국은 그에게 매년 4,000달러를 보내주었음에도 그는 미국의 대부업자들에게 30,000달러라는 거액의 빚을 졌다. 미국신문은 동양의 작은 나라 왕자의 거대한 씀씀이를 이렇게 기록했다. (사진 아래 번역 있음) 돈을 기다리며 왕자의 코니아일랜드 방문, 대부업자의 청구서엔 3만 달러가. 뉴욕, 2월 6일: 한국 이희 왕(고종)의 셋째 아들인..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사망했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독살설이 1919년 이래로 이어지고 있다. 매일신보에는 고종의 최후를 지켜본 의사들의 진술이 있다.태왕전하 훙거 환후 경과 전하께서는 며칠간 불면증에 시달리시더니 21일 아침 1시 45분 주무시던(暇寐睡眠) 중 돌연 우측 반신에 경련이 일어나고 이어 좌측까지 이어져 약 3분간 완화(緩解)되신 바 즉시 진료하니 오른쪽으로 누워 주무시는 위치에서 맥박은 115로 가지런해 조금도 이상이 없었고 체온도 36도 5분을 보여 정상 범위를 넘지 않았다. 동공은 모두 간신히 축소되어 반응에도 다시 이상이 있지 않았으며 동공은 좌우가 모두 간신히 축소가 되어 반응에 다시 이상이 있지 않았고 또 지각계에는 하등 이상(變調)을 보이지 않..
사건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전직 경찰관 60대 a씨는 개를 데리고 산책하던 이웃의 여성 b씨에게 지 집앞으로 개를 데리고 다닌다며 욕설을 하고 각목으로 폭행 9주의 상해를 입혔다. 심지어 폭행 후 "아직 안 죽었네"라고 비아냥거리기도. 2. 이 정신나간 전직 경찰관 a씨의 부인은 전 목포시 의원 c씨였다. 3. JTBC 기자는 이 사건을 c씨까지 거론하며 소개했다. 이유는 피해자 b씨와 그 가족이 a씨 가족의 지역의 유지인 탓에 사건이 유야무야 될까 걱정되어서였다. 4. 아니나 다를까? 기사가 나가자 b씨의 사촌이라는 인간 f가 등장, 기자에게 연락해 고소미 먹이겠다는 둥 기사를 내리라며 겁박했다. 심지어 자기도 기자 출신이라고 했다. 5. 그런데 알고보니 그 f는 목포경찰서(서장: 김범상 총경) ..
여성 선각자 하란사 또는 김란사깊어 가는 어느 날 밤이었다. 훌륭하게 차린 귀부인이 하녀들의 등불을 따라 스크랜튼 부인의 방을 두드렸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 불을 껐다. “지금 내 속이 이렇게 캄캄합니다. 나에게 지식의 등불을 밝혀주십시오.” 귀부인은 이렇게 말하며 자기를 입학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경향신문 1962.7.2., 대학가의 리창(裏窓), 이화여대(2)]위의 귀부인이 바로 남편의 성을 써서 하란사河蘭史로 불렸던 여성, 김란사다. 그녀는 평양 출신으로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첫 미국 학위소지자다. 그녀는 귀국해서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여러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제자를 양성하는 한편 여권 신장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건 암군이자 혼군 고종의 역할이 컸다. 순종은 최근 동상 에피소드만큼도 존재감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친왕 이강에게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이방자도, 더 앞서 윤치호도 지적했듯, 돈씀씀이 헤프고 축첩질엔 당대 으뜸으로 방종하게 살았다. 그의 아이 낳은 여성이 몇 명, 또 간간히 기사에 나오는 애첩 몇 명. 하지만 정실부인에갠 아이가 없었다는. 그럼에도 상해 망명 기도 사건 탓에 그나마 다른 황실가 사람들 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1. 상해 망명 사건의 진실월경 직전에 붙잡히자 그는 억지로 끌려온 것이라며 꼬리 자르기를 구사했다. 그의 진술 조서가 남아있는데, 그는 모든 문제를 전협 이하 대동단원의 탓으로 돌렸다. 팔아먹은 거다. 일제의 조작이라고 하나 일제가 조작할 이유는..
유학은 일제강점기에도 그 생명력을 이어나갔다. 조선 500년의 통치 이념이었으나 유학의 여러 덕목은 식민통치자들에게도 유효했다. 충성의 대상, 즉 임금만 바꾸면 이보다 좋은 이데올로기도 없었다. 유학은 사무라이의 교양이기도 했기에 그들에게도 익숙했다. 1915년 3월 17일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수하를 이끌고 석전대제 참석했다. 이하는 그 신문기사다. 석전 거행, 데라우치 총독 참배 2월 17일은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경학원經學院에서 춘기 문묘文廟의 석전대제釋奠大祭를 거행하였는데 이날은 즉 중춘仲春의 상정일上丁日이라. 융융한 화기는 반궁泮宮에 가득하고 생기가 그치지 않는 춘풍은 묘정에 불어와 명륜당明倫堂 앞의 화훼교목에는 호생지덕好生之德이 나타나니 혼연한 덕기德氣가 초목에 미치는 듯하더라..
[출전: 山本四郎 編, 『寺内正毅日記-1900~1908』(京都女子大學研究叢刊5)(京都女子大學, 1980), pp.1~6.]○ 1852년(嘉永5) 2월 5일 야마구치(山口) 번사藩士 우타다 마사스케(宇多田正輔)의 삼남으로 출생. 유명幼名은 주사부로(寿三郎)○ 1864년(元治1) 다지히타이(多治比隊)에 입대해 조쿠론도(俗論党)*로 전투에 참가[ *조쿠론도: 바쿠후 반대파]○ 1865년(慶応1) 미타테타이(御楯隊)*에 입대 [ *금문의 변(禁門の変)(1864)에서 패배한 오타 이치노신(太田市之進, 미호리 고스케(御堀耕助)), 야마다 아키요시(山田顕義), 시나가와 야지로(品川弥二郎) 등을 중심으로 결성. 총독은 오타 이치노신, 대사 23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미타지리(三田尻)에 주둔. 같은 해 12월 다카스기 신..
고종은 어떤 군주인가? 매스미디어에서는 얼치기 작가, PD들이 고종을 미화하고, 또 모 전직 대학 교수는 종교를 믿듯 고종을 바라보며 온갖 상상력과 자기 복제로 각주 달며 찬양고무하고 있다. 그 덕분인지 많은 사람은 고종을 근대군주, 혹은 시대의 한계로 주저앉은 애석한 군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종의 치세를 돌아보면 그는 아버지가 만들어 준 강력한 군권으로 제 멋대로 하다가 망국의 길을 연 군주이며, 근대의 물산을 좋아하면서도 전근대의 군주권을 휘두르고자 했던 자다. 고종의 진면목은 그가 신하를 대할 때 드러났으니, 이 방면에서만큼은 사악하리만큼 악독했다. 자신을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신하를 헌 신짝 버리듯 했다. 그 일례가 고종 독살 미수 사건이다. 고종은 이상한 냄새에 마시진 않았으나 별생각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