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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는 당 현종 시대의 일화를 모은 책이다. 모두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당의 전성기 풍경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다. 개원開元, 천보天寶 상, 천보 하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서는 개원 편에 초반에 있는 이야기 몇 개를 번역 소개한다. *개원開元(713~741) / 천보天寶(742~756) ‘태평太平’ 글자가 있는 옥(玉有太平字) 개원원년(713) 궁중 안에 비가 내려 물이 흘러 땅이 패였다. 밤에 그 사이로 빛이 나서 숙위가 그 장소를 기억했다가 날이 밝자마자 상주했다. 주상이 그곳을 파보라 하니 보옥 하나가 나왔는데, 모양이 박(拍板: 악기) 같았다. 위에 옛 전서체로 “天下太平(천하태평)”이란 글자가 있었다. 군신들이 경하했고 내고에 넣어 두었다. 開元元年,..
고조와 고종의 자만 쓰다. 高祖高宗獨書字 구당서舊唐書 본기는 황제의 자字를 모두 기록하지 않았고, 신당서新唐書는 고조高祖와 고종高宗 두 황제의 자만 기록했다. 단, 스무 명의 황제 가운데 이 두 명의 황제만이 자가 있었을까, 돌아보면 그런 건 아니다.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사마씨(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씨(반고班固의 한서漢書)는 한의 본기에서 고제高帝의 자를 쓰고 휘를 기록하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휘와 자 모두 쓰지 않았다. 사마씨와 반씨는 한의 신하였기 때문이다. 나머지 역사서는 모두 휘와 자를 썼다. 구당서에서 자를 쓰지 않은 것은 고구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당서에서 두 황제의 자만 쓴 것은 그 기준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舊紀各帝皆無字, 而新書於高祖・高宗二帝獨書其字, 但二十帝之中只此..
유비 휘하의 대표적 문신, 손건의 열전이다. 손건孫乾은 자가 공우公祐로 북해인北海人이다. 선주先主가 서주徐州를 다스릴 때 종사從事로 벽소했고 [정현전鄭玄傳: 정현이 건을 주州에 추천했다. 건이 (유비로부터) 벽소된 것도 현이 천거했던 것이다.] 훗날 (선주)를 호종했다. 선주는 조공曹公에게 등을 돌리고 건乾을 보내 원소袁紹와 결탁했고 형주荊州에 머무르려 할 때 건은 다시 미축麋竺과 함께 사신이 되어 유표劉表에게 갔는데 모두 뜻대로 되었다. 훗날 표表(유표)는 원상袁尙에게 편지를 보내 형제 분쟁의 변란을 이야기하며 “매번 유좌장군劉左將軍[유비]・손공우孫公祐[손건]와 이 일을 함께 논했는데, 그 고통이 뼈속까지 스며 서로 붙잡고 슬퍼하였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중히 여겼다. 선주先主가 익주益州를 평정하고 건..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는 기독교의 지파인 네스토리우스교가 중국에서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비석으로 동시대 동서양 문화교류와 당대 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학력고사 사회탐구부터 각종 세계문화사 시험까지 종종 출제되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페르시아 출신 선교사 이사伊斯(Yazdhozid)가 당 덕종德宗 때인 건중建中2년 2월(太蔟月) 7일 대진사 경내에 세운 것이다. 비문은 조의랑朝議郎 전행태주사참군前行台州司參軍 여수암呂秀岩이 정관연간 대진사大秦寺 승려 경정景淨의 서술을 적었다. 비의 높이는 197cm, 아래 귀부가 있어 전체 높이는 279cm다. 비신의 너비는 위가 92.5dm, 아래가 102cm이다. 정면에 ‘大秦景教流行中國碑(대진경교유행중국비)’와 송문이 적혀 있다. 비신에는..
양왕대차거안주조상비는 1903년 독일 조사단에 의해 독일로 반출되어 베를린박물관이 소장했다. 아래 글은 뤄전위가 청말 정치가이자 수집가로도 유명했던 단방端方(1861~1911)이 유럽에 시찰 갔을 때 구해온 탁본을 고증한 글이다. 서구열강 및 일본에 의해 투루판 지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기존 중국 역사 기록에는 몇 페이지에 불과했던 고창국 역사가 밝혀지기 시작했고, 뤄전위 또한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양왕대차거안주조상수사비발 涼王大且渠安周造象脩寺碑跋 이 비석은 근년 신강에서 출토되어 지금 독일수도박물원(베를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서 을사년 상서上書 단오교端午橋(端方)가 태서로 정치를 시찰하러 갔을 때 탁본 한 매를 떠서 가져왔다. 비는 양왕凉王 대차거안주大且車安周가 불상을 조성한 사실을 기..
뤄전위(羅振玉)의 여러 학술적 업적 가운데 손꼽는 것이 돈황문서를 필두로 한 서역 사료의 분석이다. 서수석각록은 신강지역 금석문을 모은 것으로 청의 신강 지배로 얻은 신사료다. 신해혁명으로 그동안 모아 뒀던 자료가 사라지자 그는 무전손繆荃孫(1844~1919)의 자료를 사용했다. 이 책은 1914년에 발간되었지만, 그는 멸망한 청조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는 이후 그의삶에 흑역사가 되는 만주국행의 단초를 보여준다 하겠다. 서수석각록서西陲石刻錄序 내 나이 17세에 처음으로 금석묵본을 수집했다. 강회에서의 성장기를 돌아보면 교유도 드물어 변경의 석묵본(탁본)을 접할 수 없었다. 수집품이라고는 배잠裴岑, 강행본姜行本 두 비석 탁본뿐 다른 것은 없었다. 광서 임진년(1892) 태수 오흥 사람 균보均甫 시보화施補華..
정지절비발程知節碑跋 뤄전위(羅振玉)가 정지절程知節(589~665) 비문을 읽고 고증한 글로 병인고丙寅稿에 실려있다. 정지절은 당대 명장 중 한 명으로 본래 이밀李密의 휘하였으나 왕세충王世忠에게 붙잡혔다가 당에 항복했다. 진왕부秦王府 좌삼통군左三統軍이 되어 송금강宋金剛, 두건덕竇建德, 왕세충과의 전투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능연각凌煙閣 24공신 중 19위로 올라갔으며, 고종 때는 총산도행군대총관蔥山道行軍總管으로 서돌궐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의 반란을 진압했다. 현재 정지절 비는 소릉박물관昭陵博物館에 있다. 이 비는 일찍이 ≪금석록일록金石録日録≫에 수록한 바 있다. 20년 전쯤 허경종許敬宗이 지은 비문이 출토되었다. 글씨는 양정暢整이 썼는데, 그는 ≪청하장공주비清河長公主碑≫도 썼다. 비문의 글자는 또렷했으나 매..
뤄전위(羅振玉)가 자신이 소장한 베트남 동전을 고구한 글로 면성정사잡문갑편 面城精舍雜文甲編에 수록되어 있다. 동전 명문으로 베트남 왕조의 연호를 고구한 글로, 빨대꽂아 알아냈다(濡管識之)는 표현이 두고두고 남을 듯하다. 전문고錢文考 내가 가진 옛 동전 가운데 16개는 모양이 얇고 작은데 표면은 편평하고 윤곽이 없다. 크기는 대개 일정하고 재질은 붉은 동銅이다. 아주 옛날의 물건은 아닌데, 가장 오래된 것이 약 4백년 전, 근자의 것은 1~200년 전 것이다. 동전에는 ‘원풍통보元豐通寶’, ‘소풍평보紹豐平寶’, ‘대정통보大定通寶’, ‘천부원보天符元寶’, ‘정륭원보正隆元寶’, ‘치평성보治平聖寶’, ‘한원통보漢元通寶’, ‘태화통보太和通寶’, ‘성원통보聖元通寶’, ‘천성원보天聖元寶’, ‘상통원보祥通元寶’, ‘안..
미축麋竺은 자가 자중子仲으로 동해東海 구인朐人이다. 조상 대대로 돈을 벌어[貨殖] 동객僮客 만 인을 거느리고 재산 거억을 모았다. [수신기搜神記: 미축이 일찍이 낙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집까지 수십 리를 남겨 두고 길가에서 부인 한 명을 보았다. 축에게 (말 또는 가마를) 태워달라 하여 수 리를 지나자 부인이 감사의 인사를 하고 떠나며 미축에게 말했다. “나는 천사다. 동해 미축의 집에 불을 지르러 가던 차에 그대가 태워준 것이 고마워 이야기해 준다.” 미축이 사사로이 부탁하자 부인이 말했다. “태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그대는 빨리 가라. 난 천천히 갈터이니 한낮에 불이 날 것이다.” 미축이 집에 도착해 재물을 모두 밖으로 꺼내놓자 한낮에 화재가 크게 일어났다.] 후에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이 별가종사..
추코문고中公文庫로 나온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901~1995)의 “중국에서 배운다(中國に學ぶ)”다. 초판은 1986년 9월 10일이나 본 책은 1998년 2월 20일 7판(가격 699엔, 세별)이다. 겉표지 뒷면의 책소개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중국에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중국사학 분야일 것이다.”라는 깊은 인식에 기초해 중국의 사상, 역사, 민속, 인물 서적을 이야기하고 정치, 시사를 논한다. 나아가 우리가 중국에서 배울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오늘날 중국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단서를 제시하는 명작 에세이 저자인 마야자키 이치사다는 일본의 중국 사학, 그 가운데서도 교토학파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학자다. 우리나라에서도 나가노 현 북부 이야마 시(飯山市)에서 태어났다. 1925년 교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