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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상해망명 기도 사건 한 건으로 의화군義和君,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공 이강은 일약 황실의 독립운동가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실제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다. 그는 국권이 피탈된 뒤 일본 정부로부터 가장 많은 은사금(83만원)을 받았다. 또한 증빙할 수 있는 유일한 독립운동, 상해망명 기도 역시 첩을 데리고 가겠다는 둥, 돈은 준비되었냐는 둥 하며 시간을 끌어 결국 붙잡히는데 기여했다. (잡히고 나서 꼬리자르기 했던 일은 아버지 고종과 꼭 닮았다.) 어떤 이들은 "독립운동 특성 상 증거가 남지 않아" 그렇다고 주장하지만 직간접적 친일행적이나 주색에 매몰된 방탕한 생활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 불리한 자료는 조작이나 못믿을 이야기라며 눈을 돌리고 증거를 제시하면 식민사관 운운하며 프레임에 ..
"고종이 여자를 밝혔어, 그래서..." 모 국회의원 후보자가 고종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해 구설에 올랐다. 후보자는 “고종이 그렇게 여자를 밝혔어. 그래서 밤마다 파티를 했어. 그래서 나라를 망친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누구라도 ‘역사’라는 타이틀을 붙여 이야기할 때는 근거 없이 이야기해서는 곤란하다. 그럼 고종의 일상은 어땠을까? 경술국치 이후 고종이 어떻게 지냈는지 여기 신문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한자가 많고 옛 문투라 대충 고쳐보면 아래와 같다. 이태왕 전하의 근황(近狀) 이태왕 전하의 근황을 알아본(漏聞) 즉 매일 오전 10시경에 기침하시어 즉시 조찬을 받으시고 오후 2시경에 서양 요리를 받으시며 오후 7시 혹은 8시에 조선 요리를 받으시는 것이 상례라 하며 또 취침하시는 시각은 대개 오후 10..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피탈한 뒤로 여러 기념 행위를 이어갔다.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도 그 가운데 하나다. 한국병합기념장은 1912년 3월 28일 일본 천황의 칙령으로 제정되었다. 한국병합기념장은 단순한 기념 메달이 아니라 "한국병합"에 공이 있는 자들에게 주는 일종의 훈장이었다. 칙령이 반포되자 담당부서인 일본 내각 상훈국償勳局에서는 기념장의 디자인을 발표하고 제작에 착수했다. 지난달(3월) 28일 칙령으로써 한국병합기념장 제정의 건을 발표하였는데, 이 기장은 위 그림에 보이는 바와 같이 황동원형에 직경 1촌으로 상부에는 국수문(국화무늬)이오, 양측에는 오동 및 오얏의 꽃가지를 넣고 (또) 중앙 홍색 좌우 황색, 백색의 테두리가 있는 띠(綬)를 달았다. 이 기장은 한국 병합의 사업에 관여한 ..
국권 피탈, 즉 경술국치 다음날(1910.8.30.), 황성皇城엔 더 이상 황제皇帝가 없기에 황성신문皇城新聞은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이름을 바꿨다. 제호 사이로 여전히 태극기는 펄럭이지만 귀퉁이 날짜는 융희隆熙4년 대신 명치明治39년으로 바뀌었다. 흥미로운 것은 제호 아래 첫 기사는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이다. 조선 귀족들의 현실적인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것이 급선무였던 모양이다. 다음 2면에는 순종純宗의 조칙과 칙유, ‘일한합병조약문日韓合倂條約文’ 그리고 메이지 천황의 조서와 한(대한제국)황실 대우 조서가 실려 있다. 순종의 조서나 칙유, 조약문은 일본이 간여해 작성한 것일 터, 메이지 천황의 조서를 옮겨본다. 짐이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여 제국의 안전을 장래에 보장할 필요를 생각하며 또한 평상시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