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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21년 사탐 동아시아사 3번 문제로 죽간 조정서(趙正書)가 나왔습니다. 죽간(竹簡)은 ‘대나무에 쓴 글’이라는 뜻으로, 종이가 없던 시절 비단과 더불어 문자를 기록하는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얇은 대나무 가지를 다듬어 글을 쓰고 실로 엮어문서나 책을 만듭니다. 후한대 종이가 발명되고 널리 퍼지기 전까지 대부분의 책은 이 죽간이었습니다. 한자 ‘책(冊)’도 실은 죽간을 엮은 모양에서 기원했죠. 그러나 죽간은 오래 보관할 수 없었고 나중에 모두 종이책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최근 죽간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가 고고학 발굴로 땅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일단 문제에 죽간이 나오면, 전국시대, 진나라, 한나라, 삼국(오)나라, 네 시대 가운데 하나라고 유추하면 됩니다. 위의 문제는 이미 “중국 최초로 황제 칭호를 사용..
수능에 2년 연속, 그것도 1번 문제에 등장한 문화재! 하지만 두 번 모두 답이 아니었다는 건 안 비밀. 그럼 2022년 문제부터 볼까요? 정답은 상대 청동기 정(鼎: 솥 정) ②였지만 ⑤에 나오죠. 그럼 2021년 문제를 볼까요? 2021년에도 정답은 홍산문화 통모양 토기(중국국가박물관 소장) ③이었지만 ④에 보이죠. 이것은 화염형(일본어로 가엔가타) 또는 불꽃모양 토기라고 합니다. 일본 조몬시대 중기를 대표하는 토기이며,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2020년 도쿄 올림픽 성화대 디자인에도 사용했답니다. 조몬은 한자 '繩文'으로 새끼줄 문양이란 뜻입니다. 토기 표면에 새끼줄을 꼬아놓은 듯한 무늬가 있다고 해서 이것을 조몬토기라고 하고 이 토기가 사용되었던 시대를 조몬시대라고 합니..
먼저 판교박물관 방문을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 개관일: 화요일~일요일 09:00~18:00 (17:30 입장 마감) -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국경일, 설/추선 연휴기간 *서울에서 오시는 분들은 남대문시장, 고속버스터미널에서 9007번 버스를 타시면 바로 앞(성내미육교/판교박물관 정류장)에 내릴 수 있습니다. http://www.pangyomuseum.go.kr/pg/main/index.do / 문의전화: 031-729-4535~7 판교박물관에는 과거 판교에 있던 백제와 고구려의 무덤이 있습니다. 두 나라의 무덤 형식인 돌방무덤의 특징을 잘 살펴 볼 수 있죠. 백제 때는 수도 한성 주변의 요충이었을 테고, 고구려가 한성을 점령한 이후로는 백제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 합니다. 고려..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미디어 파사드가 오늘(2.25.) 첫 선을 보였다. 광화문을 찾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될 것 같다. 그럼 맛보기 영상은 아래에,
다이안지는 쇼토쿠 태자가 아스카에 지은 구마고리쇼샤(熊凝精舎)에서 시작하여 헤이조쿄로 이전하며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나라칠대사 가운데 하나로 당시 사찰의 규모는 도다이지(東大寺), 고후쿠지(興福寺)에 버금갈 정도고 커서 “남대사(南大寺)”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1017년에는 두 개의 목탑이 모두 불타버렸고, 에도시대 중건 시도가 있었지만 옛 모습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오늘날 사찰의 바깥에는 칠층탑 기단터가 남아있어 지금보다는 훨씬 컸던 예전 사역을 짐작케 해준다. 사찰 내에는 나라시대의 유품으로 8세기 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 9개의 목조불과 기와 등을 갖고 있다. 사찰이 쇠퇴했는데도 여전시 창건 시대의 신앙물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그런데 목조불..
경남 해안가 몇 곳에는 왜란 때 일본 장수들이 쌓은 왜성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성과 없이 그 큰 전쟁을 끝낼 수 없었을 테고, 경상도 일부라도 점령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몇 년 전 왜성이 궁금해서 울산왜성을 찾았다. 그런데, 울산왜성 주차장으로 검색하니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아 인터넷에서 이리 저리 찾아보니 울산하면 떠오르는 지명, 학성공원이 울산왜성이었다. 성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전망이 좋고 태화강이 바다와 만나는 길목에 있어 이곳에 성을 지은 까닭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산등성이 중간 중간에 위치한 평지에는 각기 삼지환(三之丸), 이지환(二之丸), 본환(本丸) 팻말이 있다. 산노마루, 니노마루, 혼마루를 우리식 한자로 표현한 것이 약간 어색했지만, 그것은 선택의 문제..
순창군이 군내 용궐산에 명필거리를 만들겠다며 여기 저기서 집자해서 바위에 드릴로 새기고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고사성어길이라는 것도 어불성설이며, "요즘 세대가 선현들을 잊고 있어 안타까워"라는 발상도 우습기 짝이 없다. 어디 요즘 세대를 함부로 진단하며, 그 자신들은 얼마나 선현들을 기억하고 있는지, 여기 참여한 공무원, 군의회 의원, 수주한 회사 직원들까지 모아다 시험이라도 쳐보고 싶은 심정이다. 모자이크 속 담당 공무원은 말한다. "한석봉 선생에 글씨 한 점을 구경해본 사람이 없어요. 여기에 그 글씨가 있구나라고 해서 우리나라 선인들도 알리고" 아무렴 산에 간 사람들이 그 글씨보러 산에 갈까? 그리고 진본성도 없는 그 글씨보고 감화를 느낄 수 있을까? 뉴스에 언듯 언듯 새겨 놓은 글자가 보이는데,..
3. 끝내 열리지 못한 행사 즉위 40주년 기념식 10월 18일을 얼마 앞두지 않은 10월 4일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고종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장예원 경 서리(掌禮院卿署理) 이용선(李容善)이 아뢰기를, "왕위에 오른 40돌 경축 의식을 음력 계묘년(1903) 4월 4일로 날을 받아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승정원일기는 조금 더 자세하다. 의정부 의정 윤용선이 삼가 말씀드립니다. 어극 40년 칭경예식을 이듬해 좋은 날로 잡아 거행하도록 조서를 내리심이 어떠하십니까. 장예원에 명하여 다시 날짜를 선정해 거행하겠다는 뜻을 전하겠사옵니다. 상주한 대로 하라. 장예원경 서리, 장예원 소경 이용선이 상주합니다. 의정부 주본에 의거하여 어극 40년 칭경예식을 다시 날자를 선..
2. 잔치에 진심인 고종 1902년 4월 24일 고종은 조칙(詔勅)을 내려 10월 18일(陰9.17.)에 경운궁(慶運宮)에서 칭경예식을 거행하겠다며 신료들에게 의식 및 절차에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당부하였다. 약 3개월 뒤인, 7월 20일 의정부 의정 윤용선은 고종의 조칙에 대한 회답으로 의식 및 세부 사항을 보고하였다. 공식적인 "잔치의 서막"이었다. 고종39년(1902) 7월 20일(양력) 의정부 의정 윤용선이, ‘어극(御極) 40년을 칭경(稱慶)하는 예식을 참작하고 의논해서 마련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신들이 정부(政府)에 일제히 모여 자세히 상의해서 의정(議定)한 내용을 별단(別單)에 써 들입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윤허하였다. 【별단 1. 올해 10월 18일 대황제 폐하(大皇帝陛下)의 즉..
역사 마켓팅으로 새롭게 태어난 "대한제국", 그 실제를 들여다 보면 고구마도 이런 고구마가 없다. 드라마, 뮤지컬에서의 모습과 달리 고종은 자신을 잘해보겠다는 마음은 있어도 나라를 잘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 대표적 증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와 비각이다. 교보문고 옆에 딱 달라붙어있어 지나가는 사람은 많아도 대개 그저 지나칠 뿐 유심히 들여다 보는 이는 별로 없다. 그럼 이 비석이 섰던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 그날을 돌아본다. 1. 고종 잔치를 결심하다. 1901년 12월 22일 동지, 훗날 순종이 될 황태자는 상소를 올렸다. “신자(臣子)가 군부(君父)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복록이 그치지 않고 장수하는 것뿐입니다. 때문에 나라의 경사는 그 일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