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스타인의 투루판 아스타나 무덤 발굴 기록 3. 본문
이하는 헝가리계 영국인 탐험가 아우렐 스타인(Sir Marc Aurel Stein, 1862~1943)의 투루판 아스타나 고대무덤 발굴 기록으로 그의 저서 Innermost Asia(Oxford, 1928)에 수록되어 있다.
608년, 624년 기년이 있는 벽돌 묘지
무덤 i. 4로 연결되는 트렌치를 정리하며 우리는 입구로부터 26피트 떨어진 지점, 거의 지표면과 일치하는 높이에서 명문이 있는 전돌 3건이 남쪽을 향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출로 군데 군데 희미해진 문자는 검은 바탕에 붉은으로 썼다. 이 명문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어려웠던 까닭에 인화해도 만족할 만한 사진을 얻지 못했음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어쨌든 Li Ssû-yeh와 L. Giles 박사는 606년과 646년에 해당하는 기년을 확인해 주었다.[Dr. L. Giles의 판독 결과는 Appendix I.를 참고하기 바란다. 608년 기록은 장숙경(張叔慶)의 미망인이 죽음을 기록한 것이다. 그녀 자신의 성은 국씨(麴氏)였다.(국씨는 640년까지 고창을 지배했다.) 646년 두 개의 명문은 같은 집안의 여성과 그녀의 부군 장연형(張延衡)을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은 옆의 무덤 Ast.i.6.에서 발견한 632년 기년 묘전(Pl.75)과 부합된다. Appendix A.에 M. Maspero의 번역을 수록했다.
Ast.i.4.에서 발견된 한문 기록
무덤에서 세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명문전돌의 개수와 일치한다. 그들은 머리를 북쪽에 두고 있었으며 모두 심하게 부패된 상태였다. 그들의 머리에서는 얼굴커버나 안대, 동전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벽돌로 구분된 매장 수이다. 그들은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하고 누워있었고 모두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다. 그들의 머리에는 얼굴 덮개도, 안경도, 동전도 없었다. 입구 가까이 놓인 시신 근처에서 커다란 조각을 포함한 한문 사본 문서 잔편이 다수 발견되었다. [M. 마스페로의 기초 조사 결과, 그 중 일부는 불교 관련 문헌으로 밝혀졌다. 반면 큰 문서(018)는 당이 투루판을 정복한 이후 공문을 기록한 것이다. 다양한 문서 내용이 담긴 기록은 행정 관료 조직 및 직장을 밝혀주는 데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염습용 또는 그 비슷한 용도로 사용된 폐지 문서 외에도 양뼈와 포도줄기를 포함한 식품, 나무나 도자기로 만든 항아리와 사발이 북쪽과 남쪽의 벽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Fig. 320) 템페라로 흰색 연주문을 그려 장식한 용기는 Ast.i.1과 2에서 발견된 것과 매우 유사하다. Ast.i. 4.01~8의 표본이 보여주듯 나무로 만든 것은 속이 꽉 차고 입구만 얕게 움푹 팠는데, 이는 무덤 내 모든 그릇이 장례용으로 특별히 제작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토기조각[Ast.i.4.012(Pl.90)]이다. 동물의 짧은 다리와 발굽 모양으로 안에 선과 원을 선각했다.
Ast.i.5.에서 발견된 직물
남쪽으로 Ast.i.1.과 가장 가까이 있는 Ast.i.5. 무덤에서는 3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모두 남쪽에 머리를 두었다. 입구 바로 안쪽에 놓인 큰 시신 a는 남성임에 분명했다. 반면 중간에 있는 시신 b는 작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여성으로 생각된다. 이 시신을 덮고 있는 직물은 심하게 부시되었다. 단, 시신 a, b 모두의 머리에서 발견된 모자 같은 얼굴싸개와 a가 입고 있던 비단 옷(garment) 옷깃에 남아있던 일부 조각은 예외였다. 입에서 발견된 얇은 금화(Pl.120)는 Ast.i.3.에서 발견된 것과 마찬가지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 형식이었으나 한 면만 주조한 것이 꽤 이후 시기의 모조품처럼 보였다. 그리고 은제 안대[Ast.i.5.a.02 (Pl.89)]도 발견되었다. 얼굴을 감싼 천의 중앙 부분[i.5.03(P.76)]은 다색 무늬 비단을 썼는데, 전형적인 사산조 디자인의 수작으로 주목할 만한데, 다행히도 잘 남아있었다. 멧돼지 머리를 각도를 조정하여 역동적으로 보이게끔 만든 매우 도식화된 도안에 사산조 직물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적인 연주문을 돌렸다. 동일한 시신에서 무늬가 있는 비단 조각[i.5.a.01(Pl.84)]도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다마스크 c는 틀림 없이 초기 중국에서 기원한 문양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b의 얼굴싸개는 다색 무늬 비단[i.5.b.01(Pl.79)]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중국 모티브에 사산조 배열이 결함된 형식의 디자인이라는 점에서 더 흥미를 끌었다. 여기서도 은제 안대(Pl.89)가 발견되었다.
얼굴을 덮었던 비단 그림
젊은 남성으로 추정되는 시신 c의 머리는 심하게 부식된 몇 겹의 얇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다. 가장 바깥쪽의 파란색 비단은 몸도 휘감고 있는데, 얼굴을 덮은 부분 옆면, 백색 회분의 인토나코(intonaco 프레스코 표면 처리) 위에 선명하고 굵은 선으로 두 개의 얼굴을 그렸다. 자세히 조사하기 위해 머리를 무덤 밖으로 들고 나가자 그림 비단은 채 사진을 찍기도 전에 산들바람에 산산조각 흩어져버렸다. 비단은 분리해보려고 했으나 겉감, 안감 모두 손만 대면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안감 가운데 빨간색 땡땡이 무늬 등등을 그린 것이 나왔다. 눈 구멍을 덮어 두었던 나무 또는 박의 한 면을 자른 듯한 원형 조각도 발견되었다. 촘촘하게 컷팅한 나무 빗 조각(i.5.07.)은 한 때 시신이 들었던 관 안에 화장용품을 보관했음을 시사한다.
* 천장에 걸어놨던 복희/여와도가 떨어진 것일 수 있다.(역자)
632년 기년의 Ast.i.4.의 명문
인접한 무덤 i.6은 매우 흥미롭다. 묘전[Ast.6.08(Pl.75)]이 양호한 상태로 참호에서 발견되었다. 묘전은 두 구의 시신 중 한 구의 정확한 매장 시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무덤의 매장 상태는 동일 구역 내 다른 무덤과 유사하여 구역 내 무덤 대부분이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불에 그을린 점토판은 표면은 연한 청색이며 가로, 세로로 정간을 구획하고 연보라색으로 한자를 썼다. 마스페로(M. Maspero)가 친철하게 번역한 명문에 따르면 둔황 출신 장백옥(張伯玉: 본문에는 'Chang, 張'으로 기록)의 만사로 그는 고창국에서 무관직의 관리를 역임했고 고창국 연호 연수(延壽) 9년, 즉 632년에 73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이 연도와 Ast.i.4.에서 출토된 묘전의 연도로 아스타나 무덤 내 이 구역 내 무덤이 중화제국이 투루판을 병합한 해인 640년 전후 조성되었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역자주) 장백옥의 묘전에 따르면 그는 □□시랑(□□侍郞)으로 출사해 자의참군(諮議參軍)에 추증되었다. 중간의 관력은 없었는지, 또는 생략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스타인은 '무관직에 종사했다(served the Kao-ch'ang State in a military capacity)'고 했으나, 이는 참군을 글자 그대로 해석했기 때문에 발생한 오독으로 판단된다.
Ast.i.6.에서 발견된 시신
두 구의 시신은 모두 머리를 남쪽에 두고 있었다. 입구 가까이 있는 시신은 왼쪽 다리는 무릎을 구부리고 있는데 반해 오른쪽 다리는 땅바닥에 놓인 채 한쪽 발이 다른 발에 닿아있는 이상하리 만큼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신은 벽돌 두장으로 눌러놓은 매트 위에 있었다. 무덤 내부의 혼란상을 고려하면, 크기로 볼 때 남성으로 추정되는 이 시신이 관 없이 안치되었는지, 아니면 어떤 침입자가 시신을 관에 꺼낸 뒤 장난을 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죽음의 고통 속에서 그 자세를 유지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겉에 걸쳤던 담황색 비단 수의는 심하게 부식되어 손만 대도 부서졌다. 그러나 두꺼운 선 장식의 비단 조각(i.6.02)은 색상을 유지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비단으로 감아놓은 원통형 나무조각(i.6.05)을 쥐고 있었다. 문양 비단을 감싼 원통 조각[i.6.06.(Pl.100)] 두 시신 사이에서 하나 더 발견되었다. 여성으로 추정되는 다른 시신(b)의 머리에서 조각조각난 다색 문양 비단을 수습했다. 이 비단은 사산조 문양으로 중앙에 멧돼지가 있고 주위로 연주문을 돌렸다. Ast.5.03.(Pl.76)과 유사사지만 작다. 바닥에서는 은제 안대[i.6.07(Pl.89)]도 발견되었다. 입속에는 얇은 금화(Pl.120)을 물고 있었다. 이 주화는 한면에만 문양이 있는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3/4 가량만 보인다. Ast.i.3., 5.과 이 비잔틴 금화는 의심할 여지 없이 복제품이다. 시신 b의 머리맡에서 발견된 오수전 2매는 상태가 완벽했다. 무덤방 서남쪽 모퉁이는 높이가 42피트 가량으로 그곳는 나무못으로 천장에 고정한 헤진 천조각이 걸려 있었다. 이 천조각은 비단으로 추정된다. Ast.i.1.무덤 벽에 걸려 있던 천조각이 의도적으로 그곳에 장치했던 것임을 밝히는 증거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Ast.i.7.의 평면
마식(Mashik)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모두 파헤쳐 진 것으로 보이는 i 그룹의 무덤 가운데 동북쪽의 2개 무덤에 석고 인형이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열려있던 이 무덤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었고 시신도 처참하게 파괴했다. 어쨌든 전에 두 무덤 모두 그 평면(Pl.32)을 보면 전에 언급했던 무덤에 비해 상당히 공들인 것이라는 점에 흥미롭다. i.7. 바깥 입구는 좁은 통로로 연결되는데, 이 좁은 통로를 따라가면 약 8 평방피트의 작은 중앙 홀로 이어지는 두 번째 입구가 나온다. 중앙홀 양 옆으로 5 1/2 평방피트의 창고가 있는데, 그곳에 석고 인형과 다른 장례용품을 두었다. 무덤방은 입구에 면에 알맞은 위치에 있었다. 평면 폭은각기 13피트, 12피트이며 약 4피트 폭으로 삼면에 낮은 단을 두었다. 형상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는 것으로는 악마의 머리[Ast.i.7.07(Pl.103)], 혹이 튀어나온 황소의 몸통[i.7.014 (Pl.103)]으로 모두 잘 만들었다. 목제 집모형[i.7.08 (Pl.94)]은 문 앞에 두 장의 잎사귀 무늬를, 벽에 화초무늬를 그린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목제 난간 기둥과 슬라브[i.7.09~10, 012~13(Pl.94)]도 그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 조각은 거의 부서져 버린 두 구의 시신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그림을 그린 비단[i.7.01(Pl.82)]과 좋은 다마스크 조각[i.7.03,05-6 (Pl.79, 84)]으로 밝혀졌다. 디자인은 주로 한자로 둔황 천불동에서 나온 문양 비단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보여준다는 점이 관심을 끌었다.
Ast.i.8.의 부장품
Ast.i.8.(Pl.32)은 두개의 전실과 내부의 감실로 이루어졌으며 8 1/2 평방피트로 벽돌로 만든 낮은 단이 있었다. 여기에 남아있는 단 한 구의 시신과 남은 천조각으로 다색 장미문(rosette) 비단 조각[i.8.01-3(Pl.78, 87)]은 천불동에서 나온 직물을 연상케한다. 보존 상태가 양호한 가위(i.8.05)와 헤드넷(head net: 머리 차양망)으로 시신이 여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단을 본떠 템페라로 칠한 캔버스(i.8.04) 조각은 흥미롭다. 부장 도용 가운데는 석고로 잘 만든 '폼파두르(pompadour)' 스타일의 여성 머리[i.8.08 (PI.101)], 대충 차려입은 집풀 남성[i.8.010 (Pl.91)], 그리고 작고 투박한 틀로 찍어 만든 남성[i.8.09(Pl.89)]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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