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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유학은 일제강점기에도 그 생명력을 이어나갔다. 조선 500년의 통치 이념이었으나 유학의 여러 덕목은 식민통치자들에게도 유효했다. 충성의 대상, 즉 임금만 바꾸면 이보다 좋은 이데올로기도 없었다. 유학은 사무라이의 교양이기도 했기에 그들에게도 익숙했다. 1915년 3월 17일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수하를 이끌고 석전대제 참석했다. 이하는 그 신문기사다. 석전 거행, 데라우치 총독 참배 2월 17일은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경학원經學院에서 춘기 문묘文廟의 석전대제釋奠大祭를 거행하였는데 이날은 즉 중춘仲春의 상정일上丁日이라. 융융한 화기는 반궁泮宮에 가득하고 생기가 그치지 않는 춘풍은 묘정에 불어와 명륜당明倫堂 앞의 화훼교목에는 호생지덕好生之德이 나타나니 혼연한 덕기德氣가 초목에 미치는 듯하더라..
[출전: 山本四郎 編, 『寺内正毅日記-1900~1908』(京都女子大學研究叢刊5)(京都女子大學, 1980), pp.1~6.]○ 1852년(嘉永5) 2월 5일 야마구치(山口) 번사藩士 우타다 마사스케(宇多田正輔)의 삼남으로 출생. 유명幼名은 주사부로(寿三郎)○ 1864년(元治1) 다지히타이(多治比隊)에 입대해 조쿠론도(俗論党)*로 전투에 참가[ *조쿠론도: 바쿠후 반대파]○ 1865년(慶応1) 미타테타이(御楯隊)*에 입대 [ *금문의 변(禁門の変)(1864)에서 패배한 오타 이치노신(太田市之進, 미호리 고스케(御堀耕助)), 야마다 아키요시(山田顕義), 시나가와 야지로(品川弥二郎) 등을 중심으로 결성. 총독은 오타 이치노신, 대사 23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미타지리(三田尻)에 주둔. 같은 해 12월 다카스기 신..
일제강점기 신문을 보면 당시 여러 범죄 사건도 확인할 수 있다. 요즘은 흉악범에 한해 신상을 공개하지만 70~80년대까지, 성명은 물론, 주소, 나이, 얼굴 사진까지 공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래 기사는 그 대표적인 예다. 아마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었을 터, 신문 기사를 소개한다. 범인 중 한 명은 서울 옥인동에 사는 28세 노동자 박태원, 다른 한 명은 고양 숭인명 정릉리에 사는 18세 무직의 이완응이다. 둘은 옥인동의 '칠성대七星臺'라는 절에서 날품팔이를 하다 만난 사이다. 그 사건인즉슨 둘이 어느 날 작당하여, 혹은 둘 가운데 한 명이 계획하여 시내 모 운동구점에서 장난감 권총과 마스크를 사서 은평면 홍제리에서 미곡상(쌀집)을 하는 박승창의 집에 들어가 현금 110원을 빼앗아 달아났다. 같은 ..
의친왕의 후손들은 "의친왕이 '공'위를 박탈당하고 일본으로 끌려갔다"고 주장한다.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의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의 자료집에서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의친왕의 의병군자금 지원, 독립운동 지원 등을 보면서도 체포하지 못했던 일제는 의친왕에게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이강 ‘공’이라는 공족의 작위를 박탈하였고 평민으로 강등했으며, 일본 왕공족 전통에 따라 ‘공’위는 장남 이건에게 습공되었고 의친왕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의친왕은 1930년 6월 12일 결국 일본 큐슈 지역으로 강제로 압송되어 가게 되고, 나중에 도쿄로 옮겨졌다. 이준은 이강이 공의 작위를 빼앗기고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일기를 읽다가 경술국치 전 며칠간을 살펴봤다. 온갖 야설에는 황제의 뜻이 아니었다는 둥의 이야기가 있지만, 나라의 멸망 앞에서 고종과 순종은 무사태평했다. 데라우치조차도 한 나라의 몰락에 "아아"라 했으나, 두 명의 암군은 평온 무사하게 자기 나라의 멸망을 지켜봤다. 또한 이완용 등 악질 친일파가 끝까지 협상에서 놓치 않았던 것은 국호와 "왕호"였다. 즉 이 병합의 주역들은 나라에는 역적이었지만 황실에겐 충신이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내내 이왕가가 친일파들과 함께 쿵짝쿵짝했던 까닭을 보여준다. 이들 덕분에 황실 가족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 황실에 편입되어 왕공족으로 호의호식할 수 있었다. 고종이 독립운동을 했다거나, 또 순종이 불쌍하다고 생각한다면 일독을 권한다. (1910년 8월) 1..
이왕직李王職에 새로 생긴 주전과장主殿課長 박주빈朴冑彬 씨 이왕직에 장시사掌侍司가 없어지며 그 대신 주전과라는 것이 생겼다. 주전과는 그동안 장시사에서 맡아서 하던 내전 제반 사무를 맡아 보게 되었으니 새로히 과장이 된 분은 이왕가에 20여 년간 봉사하던 박주빈씨다. 47세에 비로소 과장이라니 기쁘기보다는 부끄럽소 하는 박과장의 낯에는 그래도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실렸다. [사진은 20일 낮, 새 과장석에 앉은 박씨] (매일신보 1928.8.21.)대한제국 관원이력은 다음과 같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DB 참조) 본관 고령 생년월일 1882년 1월 7일 현주소 충청남도 홍주군 얼방면 효천리 학력 1888년 한문사숙漢文私塾 입학 1900년 한문漢文 휴학 1903년 3월 경성학당京城學堂 입..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하던 서화가들의 작품공모전이었다.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1922년 시작되어 1944년까지 이어졌다. 일본의 관전과 달리 서예부가 있었다.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등용문 같은 역할을 했다. 이 대회는 심사위원 다수가 일본의 관전 출신으로 일본 미술이 조선 미술에 영향을 끼치는 장치가 되었다. 그러나 수상자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재조선 일본인이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따라서 결과론적으로는 조선인 작가들이 일본 미술의 영향에 물들게 했지만, 실은 제전의 더 큰 목적은 민족(조선인과 일본인)이 아니라 지역(식민지와 본국)의 균질성에 있다고 생각한다.매일신보 1924년 5월 25일자에는 제3회 선전을 준비하며 작품을 옮기는 사진이 있..
동아일보 1921년 3월 8일자에 실린 기사다. 이강 공 전 애첩을 협박하고 오십원을 강탈 시내 권농동 88번지 사는 양대현梁大鉉(38세)는 정영원鄭永源(41세)이란 사람과 공모하고 항상 상해上海 가정부(임시정부)와 연락하여 금전을 모집하고자 시내 당주동 이강李堈 공의 전 애첩愛妾 이연연이를 협박하되 금전을 제공해야지 만일 내지 아니하면 총살하겠다고 협박하였으므로 연연이는 어찌 몹시 놀랐던지 오십원을 제공하였으며 그 외에도 각처에서 금전을 강탈한 죄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각 1년 6개월의 선고를 내렸는데 그대로 복죄하였다더라. 황실 유일 독립운동가 의친왕에게는 여러 여성이 있었다.(개벽 기사를 보면 그가 이 방면에 얼마나 유명했던 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이름을 남긴 이들은 정실이거나 자녀가 있..
개벽은 천도교에서 낸 잡지로 1920년 6월에 창간했다. 천도교의 대종사장 정광조는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교주 손병희와 의논하여 교리의 연구 선전과 조선 신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고, 개벽은 그 결실이었다. 손병희와 의친왕은 친분도 깊었다니, 개벽에 소개된 기사는 의친왕을 잘 알고 쓴 글이리라. 아래는 1924년 7월 1일 발간된 제49호의 기사다. 개벽의 기사 제목은 색색형형의 경성 첩마굴 가경가증할 유산급의 행태 色色形形의 京城 妾魔窟 可驚可憎할 有産級의 行態번역하면 각양각색 경성의 첩 소굴, 놀랍고 가증스러운 유산계급의 행태글쓴이는 관상자觀相者우리 조선 사람치고는 웬만한 사람은 대개 다 첩이 있다. 늙은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이도 있다. 학교의..
위키백과 의친왕 항목에는,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은 조선의 왕족이고 대한제국의 황족 종실이며 고종의 두 번째 아들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라고 했다. 또 나무위키는 “고종의 5남이자, 고종의 아들들 그리고 나아가 대한제국 황족들 중 유일한 독립유공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제 경찰의 조사 내용은 이를 의심케 한다. 후손을 비롯한 이강의 지지자들은 이 조사 기록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대외적으로 공개될 경우 큰 파장이 있어 일제가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친왕이 상해로 가려 했던 사실은 당시 우리말 신문인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실린 정도로 감춰진 일도 아니었다. 또한 심문조서를 굳이 조작할 이유도 없다. 실제로 망명을 주도했던 김가진金嘉鎭 은 의친왕이 “부족하지만” 순종은 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