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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얼마 전 대구시 중구청의 순종 동상 철거로 시끄러웠던 일이 있었다.(설치: 2013년 대구 중구청장 윤순영 / 철거: 2024년 류구하) 순종 동상 철거 사건은 지방자치단체의 저렴한 문화행정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나라를 들어 일본에 바치기 직전 전국 백성들을 무마하고자 전국을 한 바퀴 돌았던 일인 순행을 기념하겠다고 도로 한 가운데 동상을 세웠다가 또 통행에 불편을 준다며 부숴버린, 예산 낭비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본질을 도외시 한 채 일부 언론은 의친왕 후손인 어느 "황손"의 말을 옮기며 "예우"를 말했다. 동상이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황제"에게 예우라니... 아직 전근대 사회에 살고 있나 싶었다. 결국 순종 동상은 철거되었다. 철거 와중에서도 발목을 잘랐다며 어찌나 ..
융허궁(옹화궁, 雍和宮)은 베이징에서 가장 큰, 그리고 전국을 대표하는 라마교 사원이다. 청 강희33년(1694년)에 건립되었으며, 원래는 청나라 황제인 옹정제의 즉위전 거처였다. 옹정3년(1725년) 행궁의 명칭을 ‘융허궁’으로 바꿨다. 건륭9년(1744년) 라마교 사원으로 개조했다. 옹화궁은 세 개의 정교한 패방(牌坊)과 천왕전, 융허궁 대전, 영우전(永佑殿), 법륜전(法輪殿), 만복각(萬福閣) 등 다섯 동의 웅장한 대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외에도 동서의 부속 전각, 사학전(四學殿), 즉, 강경전(講經殿), 밀종전(密宗殿), 수학전(數學殿), 약사전(藥師殿)이 있다. 전체 건축 배치는 완전하고 정연하며, 장엄하고도 아름다우며, 한족, 티베트족, 몽골족의 민족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각 전각 내에는 ..

국방부(당시 장관 김태영, 현재 작고)는 국민의 세금 850억원을 들여 "사립"학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가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국방국립도, 공립도 아닌. 그리고 국방부 퇴직자, 또는 제대군인을 인사라로 앉혔다. 재단에겐 나랏돈을 안겨준 것이고 또, 그 재단엔 국방부 떨거지들을 앉혀 호의호식하게 만들어주었다. 사실, 국방부의 이름을 걸고 몇몇 장성들이 사학재단 만들어 꿀꺽 한 것이다. 국방부가 하는 짓이 이렇다. 첨단무기를 자랑하지만 그저 예산 편성 시즌만 되면 어찌 그리 국방에 누수가 많은지... 똥별이 넘쳐나 사병士兵을 사병私兵처럼 부리며 승진의 도구로 여기기 일쑤다. 지난 2월 25일 대민지원을 자기 홍보처럼 여겨 결국 사병 사망사고를 일으킨 전 해병대 1사단장 임성근이 전역했다. 12.3. 이..

의친왕 이강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를 하나씩 소개한다. 아래는 메이지시대 일본 언론인 요코야마 겐노스케(横山源之助, 1871-1915)의 비망록 의 기록이다. 엄비가 싫어했던 두 사람, 의친왕과 이토 히로부미다. 알고 보면 둘 사이의 관계는 매우 깊다.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영친왕뿐 아니라 의친왕도 부탁했다. 의친왕은 이토 히로부미 사후 통감부로 조문을 갔다. 여하튼 의화군(궁), 의친왕, 이강공의 기록을 차근히 모아보려 한다. 참고로 의화궁이라고 하지만 의화궁주, 또는 사동궁주라는 말은 없다. "궁주宮主"는 본디 여성의 봉호다. 역사에 무지한 자들이 그런 단어도 만들어 쓰곤 한다.조선의 소요도 여하튼 일단락되었다. 신문지상의 보도로 멀찌감치 바라만 봐서인지 명료하지 않아 두셋 조선통의 이야기..

1905년 2월, 대한제국 대황제 폐하 고종이 자식 문제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権助)를 불렀다. 곧 의화군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시점이었다. 이날의 대화내용은 하야시가 일본 외무성에 보낸 비밀 전보에 남아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서비스 중이다. #고종이 #의친왕을 신뢰했고 #제국익문사를 맡겼다는 이들이 있지만 의친왕이 고종을 만난 것 몇 번 안되고 주연집 같은 고종의 문집에는 흔적조차 없다. 오죽하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없을까. (이것도 "나조차 속았다"할 것인가?) 그럼 자식 이강을 보는 고종의 심정을 들여다보자. 이에 앞서 미리 말해두지만, 의친왕 숭모꾼들은 이 역시 일제에 의해 오염된 사료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본국에 보내는 전문"이며 ..

모씨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승만 정권은 칠궁 내 전각을 헐고 경복궁의 '경'자와 신무문의 '무'자를 결합하여 '경무대'를 설치해 자신의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였습니다." 경무대景武臺는 경복궁의 후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미 조선시대부터 썼던 말이다. 다음은 그 증거다. 1. 은대조례銀臺條例: 이 책은 승정원의 업무편람 같은 서적으로 흥선대원군의 명에 의해 작성한 것이다."황단皇壇" 조에 "명나라 세 황제의 기신일에 북원北苑에서 망배례를 거행할 때에는 허위虛位를 설치하고, 예를 행한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북원'의 각주에 "경무대景武臺다."라고 했다. 2. 각사등록各司謄錄: 대한제국기까지 중앙-지방을 오간 공문 모음집이다. 강원감영관첩江原監營關牒 고종6년(1869) 11월 15일에, "의정부議政府에..

지난주 원주에서 민긍호 의병대장 기념사업회 발대식이 있었다. 이때 의친왕기념사업회는 고종황제가 민긍호 의병장에게 내린 칙명을 공개했다. 기사 전문은 아래 링크한다. ‘민긍호 의병장 임명’ 대한 황실 밀서 최초 공개대한제국 황실이 일제의 군대해산에 항거하던 원주진위대 특무장교 민긍호 의병장(1865-1908)을 간부급 의병장으로 임명한 밀서가 공개됐다.민긍호의병대장 기념사업회(회장 조경빈)는 지난 22일 www.kado.net칙명의 사진은 다음과 같다. 勅命 / 閔肯鎬特陞正 / 三品通政大夫 / 命鎭衛隊倡義 / 司令部大將者 / 光武十一年九月五日위 칙명을 그대로 해석하면, “칙명 민긍호를 정삼품 통정대부로 특승하고 진위대창의사령부대장을 명한다”라는 뜻이다. 위 칙명에는 문산관(정3품 통정대부)과 실직(진위..

의친왕을 숭모하는 이들은 광복 이후, 독립지사들이 의친왕에게 찾아와 인사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김구 등 임정 인사들이 귀국하자마자 바로 의친왕을 예방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세종시는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 학술포럼 자료집(2024.6.)에서 이를 활자화했다. 그러나 임정인사들은 그날 숙소에서 기다리던 이승만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신문에 기록된 바, 귀국 당일 예방 설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전이라면 그 무리에 거짓말쟁이가 있는 거다.)여기에 더해 해방 정국 김규식의 비서로 일했던 송남헌의 관련 기록이 있어 추가한다. 한 단어도 빼지 않고 그대로 옮긴다."언젠가는 이강 공이 삼청장으로 김 박사를 방문했다. 이때 보료 위에 앉아 있..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일본 이상 당혹스러워했던 건 대한제국 조정이었다. 어떤 자들은 일말의 근거도 없이 안중근이 고종의 밀명을 받았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펴고 있으나 이는 대한제국에 대한 환상과 조상 현창에 눈먼 이들의 소설에 불과하다. 순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황태자(영친왕)의 스승이 되어 달라며 태자태사의 벼슬을 내렸다. 즉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대신이기도 했다. (그 전에 고종은 부디 한국에 남아달라며 간청하기도 했다.) 순종은 태자태사의 죽음에 조서를 내렸다. “태자 태사(太子太師)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영령(英靈)의 기질을 타고나 광제(匡濟)의 계략을 갖추고서 시운(時運)을 만회하고 문명(文明)을 발전시키려 현로(賢勞)를 꺼리지 않았고 자신의 훌륭함은 돌보지 않은 채 우뚝이 동양(東..

Prince Uichin, Yi Kang (李堈, 1877–1955), was well known for his numerous romantic affairs. Even in the United States, he was involved in scandals with women, which led to him being assaulted by an American young man. He had multiple wives in addition to his official spouse. Although the criteria for distinguishing concubines from mistresses are unclear, it is said that he had one wife, seven co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