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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에요? 국립경주박물관의 석가탑, 다보탑

자불어 2022. 8. 13.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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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의 석가탑과 다보탑


국립경주박물관 후원에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다. 어떤 관광객은 "어, 석가탑, 다보탑이 여기도 있어? 여기로 옮겼나?", 또는 "저거 진짜야?"라고 하기도 하나 실은 흔히 “짜가”라고 부르는 복제품이다. 전문가나 일반이나 복제품이라면 탐탁치 않게 여기기 마련이나 그래도 이 탑은 나름 많은 관광객들에게 포토존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두 탑의 태동은 1973년 1월 15일 박정희 대통령 연두 순시에서 시작되었다. 박대통령은 정소영 청와대 제1경제 수석비서관으로부터 경주종합관광개발추진현황을 보고받은 자리에서 불국사, 석가탑 등 1,400년 동안 풍화작용을 겪은 국보는 원형과 똑같은 것을 만들어 근처에 세우든지, 원형은 박물관에 옮기고 새로 만들어 그 자리에 세워 대체하는 두 가지 방법을 연구해 보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문화재관리국은 다보석가모조탑건립위원회[황수영(동국대, 고미술), 진홍섭(이화여대, 고미술), 김세중(서울대, 조각), 김경승(예술위원회, 조각), 정인국(홍익대 건축), 김정기(문화재연구소장, 건축), 양재현(KIST부소장, 보존과학), 이대성(연세대, 석제분석)]를 설치했다. 이듬해인 1974년 문화재연구소는 박정희 대통령의 두 가지 방안에 대해 이전이 쉽지 않고, 풍화 및 도괴(倒壞)를 막을 적당한 방법은 없다고 결론 내리고 새로 신축하는 국립경주박물관에 모조품을 제작하기로 하고 공정에 착수했다.

양재현과 이대성은 전국 화강석 산지 석재 조사 후, 탑신에 사용할 석재로는 경북 월성군 외동면 북토리산 미홍색 장석정동(長石晶洞) 화강석을, 탑상륜부 및 석사자 재료로는 경남 울주군 두동면 옷밭계곡의 응회암질 석영안산암으로 선정했다. 이와 같은 준비를 거쳐 1974년 7월 1일 문화재제1분과 상임전문위원 유문룡씨를 총감독에 선임하고 8,320만원의 예산을 확보, 착공에 들어갔다. 본 공사에는 김부관이 도석수로 참여하였으며, 37년 동안 돌을 다듬어온 이복수 등 숙련된 석공이 참여했다. 두 탑은 조각공 9,202명, 석공 6,053명 등 연인원 15,255명이 동원되어 착공 6개월 20일 만인 1975년 1월 20일 완공되었다. 사용된 석탑 부재는 다보탑이 265개, 석가탑이 71개로 도합 336개이며 이를 무게 및 부피로 환산하면 총 279.68톤, 174.8㎥에 달한다.


탑이 완성되자 경주박물관 개관을 앞둔 1975년 4월 9일에는 불국사 주지 월산(月山) 스님의 주도로 조탑점안식이 거행되었다. 석가탑 안에는 사리장엄구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불상 등을 봉안하였다. 사리장엄구는 1966년 발견된 석가탑 출토품을 그대로 복제 제작하였으며, 순금 25돈으로 만든 사리병 안에는 영일 법광사지 3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8과 가운데 가장 큰 1과를 넣었다. 그리고 월산스님이 쓴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은 경통에 담아 순금 25돈으로 제작한 통일신라시대 좌불 복제품과 함께 봉안되었다. 사리장엄구 제작에는 총 168만원이 들었으며, 이 지역 조각가 김인태가 담당하였다. 다보탑에는 8각 옥계석 밑에 있는 주두 모양의 받침대 중앙에 금동제 탑지만을 만들어 넣었다.

석가탑에 새로 봉안한 사리장엄구 (동아일보 1975년 4월 12일자)


그리고 1975년 7월 2일 국립경주박물관의 개관과 함께 이 탑의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현대통령과 함께 온 박정희 대통령은 도석수 김부관씨와 악수하며 “현대의 아사달”이라며 상찬했다.

개발독재 시대의 문화재에 대해서 할말이야 많지만, 이 석탑의 내력을 뒤져보며 지금 우리 시대에 이 정도 수준의 복원 사업을 할 수 있을까 자문해 본다. 과연 100년 후, 그리고 몇 세기가 흐른 후 이 석탑은 어떻게 평가될까?

이 석탑에 들인 공력을 가늠케 하는 것이 신건기다. 오석으로 만든 신건기 받침돌에는 마치 석탑의 부재인 듯 안상을 새겨 놓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석가탑 다보탑 신건기


“토함산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신라 통일기의 예술작품으로 우리 국보 제二十(이십)호 다보탑과 제二十一(이십일)호 석가탑이 서있다.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착상과 정교하면서도 수려한 솜씨라. 그 시대 석탑예술품 중에서도 가장 우수하게 치는 작품이요. 거기 겨레의 얼이 배어들었기 봄가을천년 세월이 지났건만 신라사람 숨소리 귀에 들린다. 그러나 비바람에 씻기고 깎여 절묘한 옛 모습 사라져가므로 박정희 대통령이 그것을 보고 미리 먼 뒷날을 걱정한 나머지 두 탑을 새로 만들라 분부했다. 이 방면 학자들과 기술진들이 옛 탑의 석질과 같은 돌을 찾아 월성군 외동면 북토리 산에서 풍화에 강한 화강암을 캐어와 두 탑의 원형대로 새로 만들어 이곳 박물관 뜰에 세우는 뜻은 첫째 옛 탑 전통을 잇자 함이요. 둘째 이 시대의 지혜와 정성을 길이 후세에 전하자는 것이니 오래 거라. 두 탑의 수명이여. - 一九七五(일구칠오)년 四(사)월三十(삼십)일 노산 이은상 짓고 평보 서희환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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