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의친왕의 미국 유학, 방탕의 서막 본문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의친왕, 그는 이 땅의 1세대 미국유학생이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믿을 수 없는 "~카더라"통신이 난무하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둥, 한국인 유학생을 도왔다는 둥 미담은 많지만 근거는 없다. 하지만 출발할 땐 의화궁, 중간에 의친왕이 된 이강은 술에 취해 미국인들과 주먹다짐을 하다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미국 유학시절,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지역 신문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한국의 아도니스, 의화군
은둔국의 황제로 즉위할 수도 있는 깨어있는 오리엔탈리스트 미국 대학 출신 젊은이의 활기찬 경력
꽃으로 뒤덮인 조끼를 갖춘
87벌의 양복,
그리고 미국 여성과
세 번의 연애를 한 영웅
그가 코니 아일랜드에서 즐긴 것
그의 예언적인 발언들 로베르투스 러브(Robertus Love) 작성
일본이 합병을 통해 한국을 집어삼키기로 결심하지 않는다면 2년 전까지 미국 대학의 학생이었던 청년이 역사 깊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황제로 즉위할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잘 알려진 이 흥미로운 인물은 의화군이다.
...(중략)....
높이 평가받는 나라는 아니지만 이제 의화군이 이 오래된 나라의 왕좌에 오른다면 놀라서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다음과 같이 소리칠 사람들이 미국에는 많이 있다: “그래, 나는 그를 알고 있었어!”
적어도 세 명의 예쁜 미국 소녀들이
거울 앞에서 고백할 것이다.
“내가 한국의 황후가 되었을지도 몰라!”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 있는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한 건장한 젊은 농부가 비웃으며 말할 자격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 난 그 녀석이 좋았어. 그리고 나는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서구 문명에 흠뻑 젖은 샘 아저씨[미국]의 땅에서 의화군의 경력은 7월 4일(미국 독립기념일) 밤에 높이 치솟았다가 내려오는 폭죽 같았다. 의화군은 순수하고, 주도적이지 않고, 세련되지 못한 동양인으로 이 나라에 왔다. 그는 좋은 학교에 입학을 허가받아 서양을 경험했다. 그가 고향인 반도로 돌아갔을 때,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구 문명에 젖어있었다. 그는 미국 영어와 영국 영어를 둘 다 말할 수 있었다.
그는 87벌의 미국 양복을
가지고 있었고
양복마다 꽃으로 수놓은
조끼도 갖췄다.
그는 몇 번의 연애와 한 번의
심각한 법정 소송을 경험했다.
의화군은 세 명의 미국 여성들에게
마음을 나눠 주었다.
코니 아일랜드에서 그는 루나 공원의 탑과 드림랜드의 첨탑 사이에 여전히 반짝이는 높은 비행의 불꽃을 남겼다. 의화군은 그가 17세의 청년이었던 1897년에 처음으로 미국에 왔다. 그는 선교사의 휘하에 있었다. 그는 그 후 몇 년간 일본에 가서 일본 학교에서 공부해야 했다. 그리고서 약 6년 전에 그는 미국에서 교육받기 위해 다시 선교사를 동행하여 돌아왔다. 처음에 그는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의 학생이 되었다. 그곳은 남녀공학 학교이다. 의화군은 이 점이 크게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는 남녀공학 학교가 없기 때문이다. 남학생들은 학교뿐만 아니라 밖에서 여학생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여자들은 대부분 밤에 방문하고 두루마기를 뒤집어쓴 채로 다닌다. 그들은 대부분 시간을 격리된 채로 지낸다.
그래서 이 황실의 아들은
델라웨어의 미국 여대생들의
생기있고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이내 사랑에 빠졌다.
그의 열일곱 살은
기쁨의 에덴동산이 되었다.
그에게 신대륙은 실로 신세계였다. 큐피드가 왕이었고 이내 왕자는 사랑에 빠졌다. 그렇지 않겠는가? 아름다움이 가려지지 않은 채 그의 눈에 보였다. 부드러운 눈은 사랑인 듯했다. 게다가 소녀들은 왕자를 신기한 존재로 환영했다. 그는 그들에게 새로운 존재였다. 언젠가 진짜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실로 활기찬 왕자를 누가 모른 척하겠는가. [출처:『The Oswego daily palladium』1907.8.3.(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의친왕이 미국에서 유학하며 "기쁨의 에덴 동산"을 누렸던 1897년~1905년은 대한제국의 운명을 가로지른 시기였다. 러시아와 일본은 대결을 본격화하고 대한제국이 믿었던 미국은 일본의 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 중요한 때 조선의 왕자는 꽃으로 수놓은 양복 87벌에 세 명의 여성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또한 이 시기 대한제국이 일본에 보냈던 유학생들은 지원이 끊겨 '학비를 지원받지 못해 사방이 빚이었고, 끼니를 때우느라 진 빚에 공관이 창피함은 물론 외국에 수치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각사등록 근대편 '학부래거문' 1899년 8월 3일 '외무대신 박제순이 학부대신 민병석에게 보내는 조회' - 박종인, 나라가 유학 보낸 그들을, 나라가 버렸다, 조선일보 2020.7.1.) 의화군, 의친왕, 이강이 무엇을 배웠고, 또 그것이 대한제국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모르겠다. 주색酒色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했던 것도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아름답게 포장하던데 미국의 눈도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방자는 의친왕이 "일생을 방탕하게" 지냈다고 했는데, 이미 미국 유학 시절부터 남달랐던 듯하다.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 DC에서 유학 중인 의친왕을 만난 뒤 “게으르고 학업에 열의가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 훗날 이승만이 이왕가 가족을 홀대했던 데는 이것이 이유가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유학비용이 아비규환 속에서 살던 백성의 고혈에서 나왔다는 거다. 끝으로 신문기사의 전문을 소개한다.
Prince Eui Wha(義和君, 義親王, 李堈, Yi Kang, Prince Imperial Ui), The Korean Adonis WIDE AWAKE ORIENTALIST WHO MAY BE CROWNED EMPEROR OF THE HERMIT KINGDOM. Lively Career of a Youth Who Was an American College Student With Eighty-seven Suits of Yankee Clothes and a Beflowered Vest For Each-Hero of Three Romances With American Maidens-How Coney Island Took Him For a Good Thing. His Prophetic Words. By ROBERTUS LOVE. UNLESS Japan shall determine to gobble up Korea and gulp her down by annexation it is probable that a young man who until two years age was an American college student will be crowned emperor of the ancient Land of the Morning Calm. This interesting personage, well known in the United States, is Prince Eui Wha. He is the son of the Emperor Yi Hiung, who has just abdicated, and Lady Om, the old emperor’s chief concubine. The son of Yi Hiung and the murdered Empress Min, who as crown prince has ascended the throne from which his father stepped down, is said to be a weakling, incapable of ruling intelligently. On the other hand, young Eui Wha, despite certain escapades while in the United States, has shown that he possesses a mind capable of looking at matters almost from the western viewpoint. Conditions in Korea are so chaotic that one has no warrant for predicting what may happen, but it is generally understood that if the Japanese should desire Prince Eui Wha to reign it will be just as easy to get the new emperor off the throne as to brush a fly from a man’s nose. Bandied About Like a Football. Korea has been called “the cockpit of the nations.” Russia, China and Japan have bandied her about like a football. Japan has kicked a goal, and Korea is hers. Since the Victory of Japan over Russia two years ago the grip which the island empire fastened upon Korea at the conclusion of the war with China has been tightened from day to day. Korea is now little more than a Japanese dependency. Yi Hiung, who became king in 1864 and emperor in 1897, when he declared Korea an empire, has given up the throne because Japan really rules the land. The emperor had the audacity to send delegates to the peace conference at The Hague, with instructions to inquire into the why and wherefore of Japan’s activities in the peninsular empire. This brought a bout the final rupture. In fear and trembling the emperor-in name only-stepped down. Now, in the event of Eui Wha’s elevation to the throne of this very ancient if not highly honorable nation, there are many in the United States who will open their eyes to the ultimate width and ejaculate: “Well, I knew that fellow!” There are at least three pretty American girls who may confess before their mirrors, each and severally: “And I might have been the empress of Korea!” There is a husky young farmer, a graduate of the Ohio Wesleyan university at Delaware, O., who is entitled to sneer and remark: “Huh! I liked that chap, and I can do it again!” Soaked in Western Civilization. For verily the career of Prince Eui Wha in the land of Uncle Sam was as the going up of a skyrocket on a Fourth of July night and even as the coming down thereof. Eui Wha came over to this country an innocent, uninitiated, unsophisticated oriental. He matriculated in the mighty school of occidental experience. When he returned to his native peninsula, he was soaked in western civilization from tip to toe. He could talk both English and United States. He had eighty-seven suits of American clothes, with a beflowered vest for every suit, and he bad experienced love suits and one considerable lawsuit. His imperial highness left his divided heart in three American maidens’ keeping. At Coney Island he left a blaze of high flying glory that still scintillates between the towers of Luna park and the minarets of Dreamland. Prince Eui Wha first came to the United States in 1897, when he was a youth of seventeen. He was under the wing of a missionary. He is supposed to have gone to Japan for a few years after that, studying in the schools of that country. Then about six years ago he returned, again in missionary tow, to acquire an American education. First he became a student at the Ohio Wesleyan university. That is a coeducational school. This fact mightily pleased his highness. In Korea the co-ed is not. Boys do not associate with girls in school or elsewhere. Women do most of their visiting at night, and they go closely veiled. They are kept in seclusion most of the time. So it happened that when this son of royalty looked upon the fresh and fair faces of the American college girls at Delaware he was enamored;he was transported into the seventeenth Aidenn of delight. Truly was the new world a new world for him. Cupid was king. Straightway the prince fell in love. What else could be expected? Beauty was not veiled from his vision. Soft eyes looked love. Besides, the girls welcomed the prince as a novelty. He was something new to them. A truly live prince who might some day become a real emperor was not to be ignored. 『The Oswego daily palladium』 1907.8.3. |
의친왕에 대해 궁금한 분은 다음 기사로,
'이왕가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 의친왕 이강의 자술서 (0) | 2024.04.09 |
---|---|
사동궁, 의친왕의 저택은 왜 사라졌나? (0) | 2024.04.08 |
이왕가 사람들 연재의 이유 (0) | 2024.04.06 |
팩트체크 “고종이 여자를 밝혔어“ (1) | 2024.04.04 |
의친왕 이강, 고종의 돈을 “착복하다” (0) | 2024.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