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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원 100년을 맞다.

자불어 2025. 7. 27. 01:51
자금성 신무문의 고궁박물원 간판(신무문은 본디 현무문이나 강희제의 이름 현엽玄燁과 같은 한자를 쓸 수 없어 고친 이름이다. 경복궁 북문도 이에 따라 신무문이라고 했다.)

베이징과 타이페이에 나뉘어 있는 고궁박물원이 올해 100년을 맞이한다. 베이징 고궁은 옛 장소 자금성에 그대로 남고 중화민국의 천도와 더불어 타이완으로 이전한 고궁박물원은 타이페이 동북쪽 사림구士林區 외쌍계 外雙溪에 세워졌다. 양쪽 모두 개관을 기념해 의미있는 전시와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올해 베이징, 또는 타이페이를 가시는 분들은 절대 놓치지 마시기를, 

신해혁명으로 청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원세개와의 협상 과정에서 황실 우대 조치를 받아냄으로써 마지막 황제 부의와 그의 가족은 계속 자금성에서 시종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원세개 사후, 여러 군벌의 난립 속에 북경에서는 풍옥상 주도하에 정부조직이 설치되었다. 혼란 속에 청조의 복벽 시도가 이어지자 정부는 1924년 11월 5일 부의溥儀와 그 일가에게 자금성을 나가라는 명령을 내렸고, 바로 다음날 퇴거 조치되었다. 여기에 이어 북경 정부는 11월 7일 ‘청실선후처리위원회(淸室善後處理委員會)’ 조직 설립을 명하고 청 황실의 공적 재산 및 사적 재산의 처리를 담당하게 했다.

“청 황실 우대 조건은 이미 수정되어 공포·시행되었으며, 국무원에 명해 청실선후처리위원회를 조직하게 한다. 이 위원회는 청 황실의 가까운 일가들과 함께 공적 재산과 사적 재산을 함께 정리해 공정함을 널리 알린다. 모든 공공 재산은 먼저 본 위원회가 적절히 보관하고, 모든 정리가 마무리된 뒤에는 궁궐을 일반에 개방하여, 국립 도서관과 박물관 등의 용도로 활용해 문화를 널리 드러내고 길이 남기게 한다.”

이에 따라 11월 14일, 「정부공보」로 ‘청실선후처리위원회 조직 조례’가 공포되고 11월 20일 이욱영李煜瀛이 위원장에 취임해 활동을 개시했다. 위원회는 정부 측 위원 9명, 옛 청황실측 인사 5명으로 위원장을 포함해 15명으로 구성되었다. 정부측 위원은 국민당 인사와 민주 성향의 북양정부 관료들로, 왕요명汪兆銘(대리 역배기易培基), 대리 채원배蔡元培(장몽린蔣夢麟代), 녹종린鹿鍾麟, 장벽張璧, 범원렴範源濂, 유동규俞同奎, 진원陳垣, 심겸사沈兼士, 갈문준葛文浚이었으며, 청황실측에서 지명한 5인은 소영紹英, 재윤載潤, 기령耆齡, 보희寶熙, 나진옥羅振玉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인 11월 24일, 손문의 북상 선언에 대항하기 위해 단기서와 장작림이 연합, 장작림이 북경으로 들어오면서 풍옥상은 물러나고 단기서가 임시 집정이 되었다. 단기서-장작림 연합 정권이 등장하자 청 부흥 세력이 다시 활개 쳤다. 그들은 청 황실 우대 조치를 복원, 부의를 자금성으로 복귀시키고자 단기서 정권을 출입하며 위원회를 공격했다. 단기서 정권은 위원회에 궁중물품 조사 사업의 중지를 명했으나 위원회는 거부했다. 12월 20일 청 황실 측 위원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청궁 물품 점검 규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청황실측 위원은 “궁중 물품에 책임질 수 없다”며 참석을 거부하고 정부에 점검 중단을 요구했다. 위원회는 12월 22일 점검 준비 회의를 열었고, 결국 여론에 따라 단기서 정부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위원회는 점검 준비와 함께 「조직 조례」에 따라 도서관 및 박물관 준비 위원회를 설립하고 이배기를 준비위원회 주임에 임명했다.

작업은 약 1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자금성 전반에 걸쳐 초보적인 점검이 이루어졌고 『청실 선후처리위원회 점사보고點査報告』가 편집·출간되었다. 점검 작업은 황궁에서 박물관으로의 전환을 촉진했다. 전환하는데 추진력이 되었다. 점검 작업 진행 중 이배기를 주임으로 한 도서·박물관 준비위원회는 많은 작업을 수행했다. 박물관의 명칭을 일단 ‘고궁박물원故宫博物院’으로 확정하고, 부의가 살던 자금성 내정을 박물관 소재지로 결정했다. 또한 「고궁박물원 임시조직대강」, 「고궁박물원 임시이사회 장정」 및 「고궁박물원 임시이사 장정」 등의 초안을 작성하고 박물관 조직체계를 고물관(古物館)과 도서관의 두 계통으로 나눴다.

그러나 소영을 중심으로 한 청 황실 측은 옛 신하들을 동원해 방해 공작을 계속했다. 1925년 1월 북경에 온 손문에게 편지를 보내 부당한 조치로 중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단기서 정부의 공문과 그들에게 수여한 임명장도 반환했다.

그럼에도 물품 점검팀은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3월과 7월 육경궁毓慶宮, 양심전養心殿 등에서 『여러 대인이 빌려간 서적, 서화, 골동품 등의 대출 장부(諸位大人借去書籍字畫古玩等糙帳)』 1책, 『부걸(부의의 동생)에게 상으로 하사한 물품 목록(賞溥傑單)』 1묶음과 부의와 내무부 대신 금량金樑, 복벽파 강유위 사이에 오고 간 서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중 금량이 작성한 여러 건의서와 인재 명단, 영국인 교사 존스턴(莊士敦)을 통해 황제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강유위의 편지는 황제의 복위를 꾀하고 공화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요소로 판단해, 이를 근거로 북경지방검찰청에 고발, 기소를 요청했다. 단기서의 비호로 이들을 처벌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국민정부 및 일반에 복벽 세력의 음모를 널리 알리고 부의 축출 및 황궁 물품 조사의 정당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25년 9월 위원회는 회의를 소집하고 고궁박물원의 설립을 결정했다.
회의에서는 또한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임시조직대강臨時組織大綱」, 「고궁박물원 임시 이사회 장정臨時董事會章程」 및 「고궁박물원 임시 이사장정臨時理事會章程」을 심의해 통과시키고 초대 이사 및 초대 이사회 위원도 선임했다. 그리고 10월 10일 신해혁명 기념일에 맞춰 고궁박물원 설립 기념식을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1925년 10월 10일 오후, 자금성 건청문乾清門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이에 앞서 정부, 문화계, 군軍·경警, 학계, 상업계 등 각계각층 인사에게 초청장 3,000여 통이 발송되었다. 기념식은 청실 선후처리위원회 감찰관이자 고궁박물원 임시이사회 이사인 장윤관이 사회를 맡았다. 먼저 청실 선후처리위원회 위원장 이욱영이 위원회 업무 경과 및 고궁박물원의 준비 상황을 보고하고 이후 기념식에 참석한 각계 주요 인사 및 고궁박물원 임시 이사회 이사 황곽黃郭, 왕정정王正廷, 채정간蔡廷幹, 녹종린鹿鍾麟, 우우임于右任, 원량袁良 등이 연설을 이어갔다. 기념식이 끝난 후, 청실 선후처리위원회는 단기서 집정정부와 소속 각 부部·원院 기관, 각 성省의 독판, 성장, 각 총사령관, 도통, 각 단체, 각 신문사에 설립을 정식 통보했다. 관람권 가격은 1원으로 결정되었으나 개원을 기념해 이틀간 5각(0.5원) 할인 행사를 진행했다.

관람 구역은 어화원御花園, 후삼궁後三宮, 서육궁西六宮 외 양심전養心殿, 수안궁壽安宮, 문연각文淵閣, 낙수당樂壽堂 등을 개방했다. 전시 공간은 전시품이 본래 보관되었던 전각을 정비해 꾸몄다. 곤녕궁坤寧宮 북측 건물은 청동기, 서화, 자기 등을, 문연각文淵閣, 소인전昭仁殿, 양성전養性殿, 낙수당樂壽堂에는 전적을 전시했다. 주요 전시품으로는 강희제, 건륭제가 입던 갑옷, 남순도南巡圖, 대혼도大婚圖를 비롯하여, 역대 황제의 주비유지硃批諭旨(붉은 글씨로 쓴 칙명), 금량金樑, 강유위康有爲 등이 복벽을 꾀했던 증거 문서, 그리고 부의와 그의 아내, 후궁들의 사진 등이 있었다. 박물관은 개관 초부터 인기를 끌어 이틀간 수 만 명이 관람했다. 1966년 출간된 나지량那志良의 『고궁 40년(故宮四十年)』에 따르면 “모두가 수백 년 동안 금지되었던 궁중의 내부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 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궁 안팎이 인파로 가득 찼다”고 한다. 또한 당시 북평北平의 『신보晨報』는 청동기, 서화, 자기 전시실은 건물이 비좁고, 한 전시실에 출입구가 하나인데 관람객이 몰려 입구가 막혀 진출입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그중에서도 낙수당樂壽堂은 부의 및 그의 아내와 후궁들의 사진이 많이 전시되어 큰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오늘날 자금성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에는 그때 새겨 넣은 고궁박물원 간판이 있다. 요즘은 고궁은 관람하려면 최소 하루 전 예약해야 한다.(안 하면 입장 불가) 또한 하루 입장 인원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성수기에는 일찍 매진된다.  또한 북경 주요 관광지답게 여권스캔하고 들어가야 하니, 반드시 꼭 챙겨가야 한다. 올해(2025) 오랜만에 가보니 문연각이 공개로 전환되었다. 문연각은 자금성 내 다른 건물과 달리 녹색 기와를 얹었다. 사고전서 7부 가운데 1부를 보관했던 중요한 장소이니 꼭 들러보시길 추천한다. (별도 입장권 필요, 근데 기왕 갔으면...)
 

문연각, 현재 내부는 들어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