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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당검唐儉은 자가 무약茂約 병주并州 진양인晉陽人이다. 북제北齊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옹邕의 손자다. 부친 감鑒은 수隋의 융주자사戎州刺史였다. 당검은 불우한 환경에 처해 규범에 얽매이지는 않았으나 부모를 섬김에 효자로 명성을 날렸다. 전에 당감(당검의 부친)이 고조高祖와 친분이 있어 함께 금위禁衞를 지휘했다. 고조가 태원유수로 있을 때 검과 태종은 매우 밀접하게 지냈다. 당검은 태종에게 수의 황실이 혼미하고 흐트러졌으니 가히 천하를 도모할 만하다고 종용하며 설득했다. 태종이 고조에게 아뢰자 불러들여 몰래 세사를 논했다. 당검이 말했다. “명공明公께서는 옥좌에 오르실 귀한 상입니다. 또한 이씨도 도첩에 있지 않습니까. 천하의 향배는 현재의 조정에 있지 않습니다. 관부의 창고를 열어 남쪽의 호걸들에게 손짓하고 북..
(구당서) 고구려의 적, 설인귀薛仁貴(전편) 이하는 구당서 설인귀 열전을 번역한 것이다. 설인귀는 평민 출신으로 뛰어난 무공으로 장수까지 올라갔다. 고구려 침공 시 선봉에서 섰으며, 신라와의 전쟁에서는 패배했다. 그는 요동 지역 뿐 alsdaskind.tistory.com (앞에서 계속) 얼마 후 다시 병사를 이끌고 천산天山에서 구성돌궐九姓突厥을 공격했다. 출발에 임하여 고종이 안에서 갑옷을 꺼내 인귀를 시험했다. 주상이 말했다. “옛날에 활을 잘쏘는 이들은 일곱 겹의 갑옷을 꿰뚫는다 했는데, 경은 다섯 번을 쏘시오.” 인귀가 쏘아 뚫자 고종이 깜짝 놀라 다시 견갑堅甲을 내어 주었다. 이때 구성은 무리가 10여 만이었는데, 싸납고 건장한 이들 수십명이 역으로 와서 도전했다. 인귀가 화살 세 발을 쏘아 세..
칠세七世 구당서舊唐書 본기本紀에 “고조高祖는 양凉(서량) 무소왕武昭王 고暠의 7대손이다. 고는 흠歆을 낳고 흠은 중이重耳를 낳았다. 중이는 희熙를 낳고 희는 천석天錫을 낳았다. 황조皇祖의 휘는 호虎고 황고皇考의 휘는 병昞이다.”라고 했다. 신당서新唐書 본기에서는 “칠세조는 고暠이며 고는 흠을 낳았다.”고 했다. 천석 이하 바로 호를 낳았다고 하고 호는 병을 낳고 병은 고조를 낳았다 했으나 황조, 황고라고는 하지 않았다. 유구劉昫는 당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신당서 본기에선 다시 천석을 '천사天賜'로 고쳤다. 칠대조이든 칠세손이든 모두 자신에서부터 세는 것으로 순서대로 추산하면 고부터 병까지, 역으로 추산하면 병부터 고까지가 칠세다. *참고 이호李暠 – 이흠李歆 – 이중이李重耳 – 이희李熙 – 이천석李天錫..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는 당 현종 시대의 일화를 모은 책이다. 모두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당의 전성기 풍경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다. 개원開元, 천보天寶 상, 천보 하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서는 개원 편에 초반에 있는 이야기 몇 개를 번역 소개한다. *개원開元(713~741) / 천보天寶(742~756) ‘태평太平’ 글자가 있는 옥(玉有太平字) 개원원년(713) 궁중 안에 비가 내려 물이 흘러 땅이 패였다. 밤에 그 사이로 빛이 나서 숙위가 그 장소를 기억했다가 날이 밝자마자 상주했다. 주상이 그곳을 파보라 하니 보옥 하나가 나왔는데, 모양이 박(拍板: 악기) 같았다. 위에 옛 전서체로 “天下太平(천하태평)”이란 글자가 있었다. 군신들이 경하했고 내고에 넣어 두었다. 開元元年,..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는 기독교의 지파인 네스토리우스교가 중국에서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비석으로 동시대 동서양 문화교류와 당대 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학력고사 사회탐구부터 각종 세계문화사 시험까지 종종 출제되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페르시아 출신 선교사 이사伊斯(Yazdhozid)가 당 덕종德宗 때인 건중建中2년 2월(太蔟月) 7일 대진사 경내에 세운 것이다. 비문은 조의랑朝議郎 전행태주사참군前行台州司參軍 여수암呂秀岩이 정관연간 대진사大秦寺 승려 경정景淨의 서술을 적었다. 비의 높이는 197cm, 아래 귀부가 있어 전체 높이는 279cm다. 비신의 너비는 위가 92.5dm, 아래가 102cm이다. 정면에 ‘大秦景教流行中國碑(대진경교유행중국비)’와 송문이 적혀 있다. 비신에는..
아침에 멀뚱멀뚱 일어나 연말 마감해야 할 것을 둘러보다 우연히 남송 요관姚寬의 서계총어西溪叢語를 읽게 되었다. 찾던 내용과 상관없이 개원통보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개원통보하면 다들 헷갈려하는 것이, 1. 개원통보는 당대의 동전으로 당 현종 개원연간의 물건이 아니라 당 고조 무덕4년(621)에 처음 주조한 것이다. 이 내용은 당서 식화지에 나오기 때문에 빼박캔트,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많이들 틀린다. 2. "개통원보"로 읽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당육전에서는 개통원보라고 했다며... 그러나 아래 요관이 명쾌하게 정리를 해놓았다. 당나라부터 오늘날까지 무려 10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궁금한 이 하나 없었으랴. 개원통보이니 개통원보로 잘못 읽고 우기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더 궁금..
이하는 구당서 설인귀 열전을 번역한 것이다. 설인귀는 평민 출신으로 뛰어난 무공으로 장수까지 올라갔다. 고구려 침공 시 선봉에서 섰으며, 신라와의 전쟁에서는 패배했다. 그는 요동 지역 뿐 아니라 서역, 대 토번전에서도 활약했다. 당 전기 장수 돌려막기의 대표적 카드로 활용되었던 장수다. 이는 그만큼 능력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럼 지금부터 전, 후편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설인귀薛仁貴는 강주絳州 용문인龍門人이다. 정관貞觀 말년 태종太宗이 요동遼東을 친정親征하자 인귀仁貴가 장군將軍 장사귀張士貴에게 응모應募하여 종군하겠다고 청했다. 안지安地에 도착해 낭장郎將 유군앙劉君昂이 적에게 포위되어 다급해지자 인귀가 구하러 갔다. 말을 잽싸게 달려 도착해 손수 적장의 머리를 베고 그 머리를 말안장에 매달자 적들 ..
아사나사이는 동돌궐 출신으로 이민족 때려잡는 이민족 장수로 열혈 활약했다. 당에 항복한 이후, 중앙아시아의 고창, 구자, 언기, 그리고 동아시아의 고구려까지, 그리고 그 결과 태종의 무덤에 배장되기도 하였다. 그는 태종이 죽었을 때 따라죽겠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흔히 중앙아시아의 코미타투스(Comitatus: 게르만 종사, 주군과 함께 살며, 전리품을 나누고, 죽을 때도 따라죽는 충성 끝판왕 집단 /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나옴.)의 일례로 곧잘 언급된다. 또한 고구려 원정에서 싸우던 중 화살을 맞았으나 화살을 뽑고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는 기사는 전래 설화에 안시성 공격하다 당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생기게 된 된 여러 실마리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신당서에는 여러 이민족 장수들의 일..
나사원 羅思遠 출전: 개천전신기開天傳信記(태평광기太平廣記 77-03) 태평광기太平廣記 권77에 수록되어 있다. 태평광기는 북송北宋 태종太宗의 칙명에 따라 태평흥국太平興國3년(978) 이방李昉 등이 편찬한 필기류筆記類 총서叢書로 50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漢나라에서 송초宋初까지의 야사, 전기, 소설에서 기사를 수집하고 내용에 따라 분류하였다. 신선에서 잡록까지 92종류로 구분하고, 다시 150여 세목으로 나누었다. 아울러 각각의 문미에는 출전을 기록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오늘날 전하지 않는 문헌도 많이 있다. 대부분 사실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는 사회의 풍속과 관습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시대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본 내용의 원출전인 개천전신기開天傳信記의 원본은 현..
당나라의 인비저블맨 도사 나사원과 그의 안습 제자 당 현종, 당唐의 나사원羅思遠은 신비하고 기이한 도술을 많이 부렸으며 특히 은형술隱形術(투명인간)에 뛰어났다. 명황明皇[현종玄宗]은 은형술을 좋아해서 나사원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고 배웠다. 나사원이 전수해 주긴 했지만 그 요체를 다 가르쳐 주지 않았다. 황제가 나사원과 함께 도술을 부릴 때면 아무도 알아보는 이가 없었으나 혼자 시험할 때는 꼭 허리띠(요대) 끝이 보이거나 두건 모서리가 드러나 궁중 사람들은 매번 황제가 있는 곳을 알아차렸다. 황제는 선물을 안겨주기도 하고 더러 죽이겠다며 협박도 해가며 다방면으로 가르침을 구했지만 끝내 모두 전수받을 수 없었다. 결국 황제가 분노하여 (환관) 고력사高力士에세 를 시켜 나사원을 기름 자루에 담아 착유기에 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