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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투루판 출토 문서 가운데는 더러 책도 있다. 많이 나오는 책으로 불교경전을 제외하면 논어, 효경이다. 논어는 국씨고창국 시대(501~640)의 것부터 당대 것까지 다양한데 그 중 중종 경룡 4년(710) 필사한 논어정씨주論語鄭氏注[후한의 학자 정현鄭玄(127~200)이 주석을 단 것으로 한대 이래 위진남북조 시대까지 유행했으나 송대 이후 산일되었다.]에는 필사자의 이름 - “복천수(卜天壽)”가 나온다. 필사를 마치고 그는 시를 한 편 남겼는데, 寫書今日了, 글쓰기를 오늘로 마쳤으니 先生莫嫌遲, 선생은 더디다 꾸짖지 마소. 明朝是假日, 내일은 쉬는 날이니 早放學生歸. 어여 학생들 돌려보내길. 他道側書易, 남들은 따라 쓰기 쉽다는데 我道側書難, 나는 따라 쓰기 어려워, 側書還側讀, 따라 쓰기나 따라 읽기나 ..
침입자에게 화살을 날린다는 진시황의 무덤 이야기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아래 이야기는 그 연장선이다. 화살이 나오고, 이어서 로봇 같은 기계장치들이 나와 침입자를 칼로 내리 친다. 이 모든 장치를 뚫고 들어오면 결국 무덤이 무너져 침입자들과 함께 사라진다는 플롯, 어쩌면 중국은 인디아나 존스도 원조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유안(716~780)의 판관 이막은 고릉에 농장을 두었다. 그런데 농장의 소작인들이 소작료를 거른 지 5~6년이 되었다. 막은 파직도 당했겠다, 농장에 내려가 (이들의) 책임을 묻고자 했다. (그런데) 창고를 보니 차고 넘쳤으며 미처 다 나르지도 않은 상태였다. 막이 괴이하다 생각해 묻자 (소작인들이) 이렇게 이실직고하였다. “저희는 오랜 세월 도둑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주..
조린낭중석상부호접趙璘郎中席上賦蝴蝶 조린 낭중이 계신 자리에서 나비를 읊다 정곡鄭穀 尋豔複尋香 아름다움을 찾아 또 향기를 찾아 似閑還似忙 한가한 듯 바쁜 듯 暖煙沈蕙徑 아지랑이 피면 풀 속에 숨고 微雨宿花房 가랑비 내리면 꽃송이에 잠든다. 書幌輕隨夢 서재에서 가벼이 꿈을 쫒다 歌樓誤采妝 무대에선 예쁘게 단장하니 王孫深屬意 왕손이 남몰래 뜻을 두어 繡入舞衣裳 무희의 치맛자락에 수놓았구나. 전당시全唐詩 권674 시인 정곡鄭穀(849~911) 영주자사永州刺史 정사鄭史의 아들이다. 7세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887년(광계光啟3) 진사가 되었다. 이후 우습유, 도관낭중을 역임했으나 난세를 만나 험한 인생을 보냈다. 정곡은 허당許棠, 임도任濤 등 9인과 종종 시를 주고받아 당시 “방림십철芳林十哲”로 불렸다. 자고부..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자 허수아비 황제로 중종, 예종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전권을 행사했다. 이러다보니 당 종실 이씨들은 반감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들에게 잠재된 불안은 688년 명당 건립과 함께 폭발한다. 노왕魯王 영기靈夔(당 고조 이연의 19번째 아들)의 아들 범양왕范陽王 애藹가 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짐이 유폐되었으니 제왕들은 나를 도우라"라는 명령을 종실 일족의 여러 왕들에게 보냈다. 대부분은 잠수탔지만 태종의 손자 낭야왕琅邪王 충沖이 박주博州에서 거병했고 이어 충의 부친이자 태종의 다섯번째 아들인 월왕越王 정貞이 호응했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보낸 진압군에 한달도 못버티고 맥없이 무너지며 결국 둘 모두 동도 낙양의 궁전에 목이 걸렸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측천무후는..
사숙방(謝叔方)은 옹주(雍州) 만년인(萬年人)이다. 처음에 소랄왕(巢剌王) 이원길(李元吉)을 따라 토벌에 참전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원길이 굴질직부좌군기(屈咥直府左軍騎)에 임명했다. 태종(太宗)이 은태자(隱太子: 이건성)와 원길을 현무문(玄武門)에서 처단하자 숙방(叔方)이 부병(府兵)을 이끌고 풍립(馮立)과 함께 북궐(北闕) 아래서 맞서 싸워 경군홍(敬君弘)과 여세형(呂世衡)을 죽였다. 태종의 군대가 주춤하자 진부호군위(秦府護軍尉) 지경덕(遲敬德: 울지경덕)이 원길의 머리를 가져와 보여주자 숙방(叔方)이 말에서 내려 곡하고 달아났다. 이튿날 나와서 자수하자 태종은 ‘의사(義士)로다!’라며 풀어주라 명했다. 서·이 이주자사(西·伊二州刺史)로 일하며 변진(邊鎭)을 잘 다스려 호융(胡戎)이 사랑하고 공경하..
꼭두각시 인형을 읊다 傀儡吟 刻木牽絲作老翁, 鷄皮鶴髮與眞同. 須臾弄罷寂無事, 還似人生一夢中. 나무를 깎고 실을 당겨 늙은이를 만드니 닭살이며 백발이 진짜 같구나. 한 바탕 놀이가 끝나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요해지니 그야말로 꿈같은 인생이로다. 당나라 현종(玄宗)이 읊은 시다. 현종 ‘개원(開元)의 성세’는 당의 절정기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천보(天寶) 14재(755) 안록산의 난의 발발하고 낙양과 장안의 방어에 실패하면서 자신은 애첩 양귀비와 제위를 잃고 나라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음악과 가무, 예술과 예능을 두루 즐겼던 현종이기에 이 시를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안사의 난 이전에 지었다면 징험일 것이오, 그 이후에 지었다면 절창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