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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요동태수 제융祭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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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요동태수 제융祭肜

자불어 2022. 8. 21.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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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융(祭肜)은 후한 전기 요동태수를 역임하며 흉노, 선비, 오환 등 이민족 관리에 공적을 세웠다. 초기 고구려 역사에도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하는 후한서(後漢書) 열전 제융(祭肜)에 실린 글이다.

제준(祭遵)에게는 종제 제융(祭肜)이 있다. / 융의 자는 차손(次孫)으로 일찍 홀로 되었는데, 효도를 다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천하에 난이 일어나 들에 밥짓는 연기가 사라졌는데도(사람들이 모두 떠났는데도) 홀로 무덤 곁을 지켰다. 매번 적들이 지나가면 한창 어린 것이 뜻이 곧다며 모두 기특하게 여기며 슬퍼하였다.
광무제(光武帝) 즉위 초에 제준의 추천으로 융을 황문시랑(黃門侍郎)에 배수하여 항상 곁에 두었다. 제준이 후사가 없이 죽자 황제가 애도를 표하며 융을 언사장(偃師長)으로 삼아 준의 무덤 곁에서 사시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융은 지략이 있어 일을 돌본지 5년이 되자 현에 도적이 사라지자 고과 1등이어 양분령(襄賁令)으로 승진했다. 이때 천하군국이 아직 평안하지 못하여 양분에는 도적이 낮에도 공공연히 다녔다. 융이 가서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을 죽이고 무찌르며 그 잔당까지 박멸하니 양분의 정치가 깨끗해졌다. (황제가) 새서를 내려 격려하고 질 1등으로 올려주고 비단(縑) 100필을 내려주었다.
당시 흉노(匈奴), 선비(鮮卑) 및 적산오환(赤山烏桓)이 서로 연합하여 힘이 세지자 여러 차례 변경을 침입해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잡아갔다. 조정의 근심거리가 되니 변방의 병사를 늘려 군에 수 천명을 두고 다시 여러 장수를 보내 각기 변경 요새에 주둔하게 했다. 황제가 제융의 능력을 인정해 건무17년(41) 요동태수(遼東太守)로 임명했다. 가서 병마를 독려하고 척후를 확장했다. 제융은 용감하고 힘이 세서 능히 삼백근의 활을 당길 수 있었다. 이족이 변경을 침입할 때마다 항상 사졸보다 앞장서서 수 차례 격파해 물리쳤다. 21년(45) 가을 선비(鮮卑) 10,000여 기가 요동을 약탈하자 제융이 수천 명을 거느리고 맞서 싸웠다. 직접 갑옷을 입고 진을 함락하자 이족이 대거 달아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반을 넘고 결국 모두 변경 밖으로 몰아냈다. 이족은 다급해지자 모두 무기를 버리고 맨몸으로 흩어져 달아났고, (융의 군대는) 적의 머리 3천여 급을 베고 수천 필의 말을 빼앗았다. 이후로 선비는 두려움에 떨었고 융을 무서워해 다시는 함부로 변경을 엿보지 않았다. 세 이족의 연합이 끝내 변경의 우환이 된다고 생각한 융은 25년(49) 선비를 불러 재물을 보여주었다. (선비의) 대도호(大都護) 편하(偏何)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귀화를 원했다. 융이 위무하여 받아들이고 상을 주니 차츰 다시 복종하였다. 선비와 다른 종족[異種]인 만리(滿離)와 고구려(高句驪)의 무리도 끈임없이 변경으로 찾아와 담비가죽 갖옷과 좋은 말을 바쳤다. 황제가 그때마다 상사를 곱절로 주자 이후 편하 읍락의 여러 우두머리가 모두 귀의하며 자신도 공을 세우길 원했다. 제융이 “공을 세우고 싶은 자라면 돌아가 흉노를 공격해야 할 터, 죽여서 머리를 보내면 믿어주겠다”고 하였다. 편하 등이 모두 하늘을 우러러 보고 심장을 가리키며 “내 반드시 공을 세울 것이오”라고 말하고 바로 흉노의 좌윤(左尹) 질자부(秩訾部)를 공격하여 2천여 급을 목베고 머리를 갖고 군으로 찾아왔다 이후 매년 사로 공격하여 그때마다 수급을 보내 상사를 받았다. 이후 흉노가 쇠약해져 변경에 도적 경보가 사라지고 오환과 선비가 모두 들어와 조공했다.
융은 사람됨이 질박하고 순후하며 진중하고 강직하며 체격이 남들과 달랐다. 은혜와 신뢰로써 이적을 어루만지니 모두 두려워하되 좋아하여 그를 위해 죽을 힘을 다했다.
처음에 적산오환이 수차례 상곡을 침범하여 변방에 피해를 주자 조서를 내려 상을 걸고 주군에 독촉했으나 금할 수 없었다. 융이 편하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영평원년(58) 편하가 적산을 격파하고 괴수의 목을 베어 목을 들고 융을 찾아오니 변경이 진동하였다. 융의 위명이 북방에 퍼지자 서쪽의 무위부터 동쪽의 현토과 낙랑까지 호족과 이족이 모두 찾아와 내부했다. 변경에 흙먼지 사라지자 드디어 변경에 주둔했던 병력을 모두 해산했다.
12년(69) 불러다 태복(太僕)으로 삼았다. 융이 요동에서 거의 30년간 있으며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현종(顯宗)이 그의 공을 기리는 한편 융의 검약을 아름답게 여겨 관직을 내리는 날 백만 전, 말 3필, 의복과 도검부터 가구 집기까지 크고 작은 것을 갖춰주지 않은 게 없었다. 황제가 융을 볼 때마다 항상 중임을 맡겼어야하며 탄식했다. 후에 동쪽 지방의 순수를 따라가 노(魯)를 지나며 공자의 강당에 앉아 자로의 방을 보라며 좌우에 “저게 태복의 방이다. 태복이 나의 지킴이[禦侮]다.”라고 이야기했다.
16년(73) 융을 태복(太僕)으로 삼아 만여 기를 거느리고 남선우(南單于) 좌현왕(左賢王) 신(信)과 함께 북흉노(北匈奴)를 정벌하게 하여 탁사산(涿邪山)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신은 애당초 융을 꺼려하여 고궐새(高闕塞)로 900여 리를 가서 소산(小山)에 도착해서는 거짓으로 이를 탁사산(涿邪山)이라고 했다. 융이 이족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두류외유(逗留畏懦: 공격하지 않고 진격을 멈추거나 두려운 나머지 전쟁을 회피한 죄)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 풀려났다. 융의 성격은 매우 강직하고 진중하여 스스로 속임수에 빠져 공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한이 되어 출옥한지 수일만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죽음에 임해 아들에게 이르길, “나는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군대를 이끌고 나가 명예를 높이지 못하고 미미한 공적도 세우지 못한채 죽음에 임해 진실로 부끄럽고 한이 된다. 공적 없이 상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옳으니 사후 너희 모두는 상을 받은 것을 기록해 두었다가 몸소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죽음을 바쳐 앞장서 내 뜻을 따르도록 해라.” 죽고나서 아들이 유언을 그대로 옮겨 상소를 올렸다. 황제가 융을 아껴 임용하려 했으나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서 불러다 어떤 병인지 묻고는 오랫동안 탄식했다. 오환(烏桓)・선비(鮮卑)는 끝없이 융을 추모하여 조하(朝賀)에 참석하러 경사(京師)에 올때면 늘 무덤을 들러 참배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돌아갔다. 요동의 관리와 백성은 사당을 세우고 사시 제사를 올렸다.
융의 장례를 치르고 아들 참(參)이 봉거도위(奉車都尉) 두고(竇固)에게 찾아가 군대를 따라 거사를 공격해 공을 세워 차츰 승진하여 요동태수가 되었다. 영원연간 선비가 군의 경계로 들어오자 참이 패배에 연루되어 하옥되어 죽었다. 융의 자손은 다수가 변경의 하급관리[吏]가 되어 모두 유명해졌다.


[원문] 後漢書 卷20 祭肜, pp.744~746.
從弟肜. / 肜字次孫, 早孤, 以至孝見稱. 遇天下亂, 野無煙火, 而獨在冢側. 每賊過, 見其尚幼而有志節, 皆奇而哀之.
光武初以遵故, 拜肜爲黃門侍郎, 常在左右. 及遵卒無子, 帝追傷之, 以肜爲偃師長, 令近遵墳墓, 四時奉祠之. 肜有權略, 視事五歲, 縣無盜賊, 課爲第一, 遷襄賁令. 時天下郡國尚未悉平, 襄賁盜賊白日公行. 肜至, 誅破姦猾, 殄其支黨, 數年, 襄賁政清. 璽書勉勵, 增秩一等, 賜縑百匹.
當是時, 匈奴・鮮卑及赤山烏桓連和彊盛, 數入塞殺略吏人. 朝廷以爲憂, 益增緣邊兵, 郡有數千人, 又遣諸將分屯障塞. 帝以肜爲能, 建武十七年, 拜遼東太守. 至則勵兵馬, 廣斥候. 肜有勇力, 能貫三百斤弓. 虜每犯塞, 常爲士卒〔前〕鋒, 數破走之. 二十一年秋, 鮮卑萬餘騎寇遼東, 肜率數千人迎擊之, 自被甲陷陳, 虜大奔, 投水死者過半, 遂窮追出塞, 虜急, 皆棄兵祼身散走, 斬首三千餘級, 獲馬數千匹. 自是後鮮卑震怖, 畏肜不敢復闚塞. 肜以三虜連和, 卒爲邊害, 二十五年, 乃使招呼鮮卑, 示以財利. 其大都護偏何遣使奉獻, 願得歸化, 肜慰納賞賜, 稍復親附. 其異種滿離・高句驪之屬, 遂駱驛款塞, 上貂裘好馬, 帝輒倍其賞賜. 其後偏何邑落諸豪並歸義, 願自効. 肜曰:「審欲立功, 當歸擊匈奴, 斬送頭首乃信耳. 」偏何等皆仰天指心曰:「必自効!」即擊匈奴左伊(袟)[秩]訾部, 斬首二千餘級, 持頭詣郡. 其後歲歲相攻, 輒送首級受賞賜. 自是匈奴衰弱, 邊無寇警, 鮮卑・烏桓並入朝貢.
肜爲人質厚重毅, 體貌絕眾. 撫夷狄以恩信, 皆畏而愛之, 故得其死力. 初, 赤山烏桓數犯上谷, 爲邊害, 詔書設購賞, (功)[切]責州郡, 不能禁. 肜乃率勵偏何, 遣往討之. 永平元年, 偏何擊破赤山, 斬其魁帥, 持首詣肜, 塞外震讋. 肜之威聲, 暢於北方, 西自武威, 東盡玄菟及樂浪, 胡夷皆來內附, 野無風塵. 乃悉罷緣邊屯兵.
十二年, 徵爲太僕. 肜在遼東幾三十年, 衣無兼副. 顯宗既嘉其功, 又美肜清約, 拜日, 賜錢百萬, 馬三匹, 衣被刀劒下至居室什物, 大小無不悉備. 帝每見肜, 常歎息以爲可屬以重任. 後從東巡狩, 過魯, 坐孔子講堂, 顧指子路室謂左右曰:「此太僕之室. 太僕, 吾之禦侮也. 」
十六年, 使肜以太僕將萬餘騎與南單于左賢王信伐北匈奴, 期至涿邪山. 信初有嫌於肜, 行出高闕塞九百餘里, 得小山, 乃妄言以爲涿邪山. 肜到不見虜而還, 坐逗留畏懦下獄免. 肜性沈毅內重, 自恨見詐無功, 出獄數日, 歐血死. 臨終謂其子曰:「吾蒙國厚恩, 奉使不稱, 微績不立, 身死誠慚恨. 義不可以無功受賞, 死後, 若悉簿上所得賜物, 身自詣兵屯, 效死前行, 以副吾心. 」既卒, 其子逢上疏具陳遺言. 帝雅重肜, 方更任用, 聞之大驚, 召問逢疾狀, 嗟歎者良久焉. 烏桓・鮮卑追思肜無已, 每朝賀京師, 常過冢拜謁, 仰天號泣乃去. 遼東吏人爲立祠, 四時奉祭焉.
肜既葬, 子參遂詣奉車都尉竇固, 從軍擊車師有功, 稍遷遼東太守. 永元中, 鮮卑入郡界, 參坐沮敗, 下獄死. 肜子孫多爲邊吏者, 皆有名稱.

후한 청동인장 「천제사자지인(天帝使者之印)」 / 타이완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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