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고전

(삼국지) 촉한 후주 유선을 평하다

자불어 2025. 8. 10. 00:56

삼국지연의에서는 어릴 적 머리를 다쳐 백치 황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삼국지의 하얀 비단 같다는 평가는 맹자에 등장하는, 인간본성은 성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던 고자의 말을 연상케 한다. 혼란스럽긴 했지만 오나라의 황제들처럼 악행을 일삼진 않았으니, 나라 자체가 한계 상황이었던 까닭에 비판도 동정도 함께 받은 듯하다. 아래는 후주 유선에 대한 진수의 평과 배송지의 주다. 


평하기를, 후주는 현명한 재상을 임명했을 때는 이치에 따르는 임금이었으나 환관에 미혹되었을 때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군주가 되었다. 전하는 말에 ‘흰색 비단은 한결같지 않으니 어떤 색으로 물들이느냐에 달린 것이다.’ 했으니 믿을 만하다. 예에 (다음) 왕위를 물려받았으면 이듬 해 개원한다고 했는데, 장무3년(223)에 건흥으로 바꾸었으니 그 옛 의리를 생각하면 법도에 어긋난 것이다. 또한 나라에 사관을 두지 않아 주기하는 관원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사적이 많이 누락되고 재이(자연재해, 천문 이상 등) 기록도 없다. 제갈량이 비록 정치에 능수능란했지만 이런 부분에는 두루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12년이 흘러도 연호를 바꾸지 않은 것이나 전쟁을 거듭 일으켰음에도 사면을 함부로 행하지 않았던 것은 탁월하다. 제갈량이 죽은 뒤 그런 제도도 점차 허물어져 잘하고 못하는 게 두드러지게 되었다. [화양국지에 이르기를, 제갈량이 승상일 때 어떤 사림이 “공께서 사면을 아끼신다”고 하자 제갈량이 답했다. “세상은 큰 덕으로 다스리는 것이지 작은 은혜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나라의) 광형과 오한이 용서를 원치 않은 것이다. 선제 또한 내가 진원방(진기)과 정강성(정현) 사이를 오가며 그들이 매번 들려준 이야기는 다스리는 도리를 다하라는 것이었을 뿐 사면을 말하지 않았다. 만일 유경승(유표), 유계옥(유장) 부자가 매년 사면을 베풀었던들 통치에 무슨 이익이 있었겠는가!”라고 했다. 신 배송지는 “사면을 멋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진실로 칭송할만합니다. 그러나 “연호를 바꾸지 않았다”는 대목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건무, 건안 연호는 모두 오랫동안 쓰고 바꾸지 않았지만 과거 역사에서 미담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12년을 썼다”는 걸로 족하겠습니까?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 도무지 찾을 수 없습니다. 제갈량이 죽은 뒤 연희 연호는 20년을 채웠는데도 “그런 제도도 점차 허물어졌다”고 했으니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評曰: 後主任賢相則爲循理之君, 惑閹豎則爲昬闇之后, 傳曰 素絲無常, 唯所染之’, 信矣哉! , 國君繼體, 踰年改元, 而章武之三年, 則革稱建興, 考之古義, 體理爲違. 又國不置史, 注記無官, 是以行事多遺, 災異靡書. 諸葛亮雖達於爲政, 凡此之類, 猶有未周焉. 然經載十二而年名不易, 軍旅屢興而赦不妄下, 不亦卓乎! 自亮沒後, 茲制漸虧, 優劣著矣. [華陽國志曰: 丞相亮時, 有言公惜赦者, 亮答曰: ‘治世以大德, 不以小惠, 故匡衡·吳漢不願爲赦. 先帝亦言吾周旋陳元方·鄭康成閒, 每見啟告, 治亂之道悉矣, 曾不語赦也. 若劉景升·季玉父子, 歲歲赦宥, 何益於治!’ 臣松之以爲‘赦不妄下’, 誠爲可稱, 至於‘年名不易’, 猶所未達. 案建武·建安之號, 皆久而不改, 未聞前史以爲美談. ‘經載十二’, 蓋何足云?豈別有他意, 求之未至乎! 亮歿後, 延熙之號, 數盈二十, ‘茲制漸虧’, 事又不然也.]

三國志 蜀書 卷33 後主傳, pp.902-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