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실제 역사 속 포청천 본문
“판관 포청천”은 타이완의 명작 드라마로 유명하다. 하지만 실제 관직은 판관이 아니라 개봉부윤, 요즘 우리로 따지면 서울특별시장이다. 당시에는 재판, 치안유지가 지방관의 중요 직무였던 만큼 판관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럼 칠협오의가 빠진 실제 포청천의 모습은 어땠을까. 송사는 원대 편수되어 몽골족이 책임을 맡아 부실하다고 하나, 어쨌든 송사 포증 열전을 읽어보자.
포증包拯(999~1062)은 자가 희인希仁으로 노주廬州 합비인合肥人이다. 진사進士로 시작하여 대리평사大理評事를 제수받았다. 외임으로 나가 건창현建昌縣 지현知縣에 임명되었지만 부모가 모두 연로하다는 이유로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후에) 화주和州 감세監稅가 되었으나 부모가 또 원치 않자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부모를 봉양했다. 몇 년이 지나고 양친이 연이어 죽자 여막에서 상을 마쳤다. 이리저리 배회하며 관직으로 나가지 못하자 동네의 유지들(父老)이 수차 와서 권면했다. 한참 뒤, 이부에 관직을 천거해 줄 것을 의뢰하여 천장현天長縣 지현知縣이 되었다. (이때) 어떤 도둑이 다른 사람 소의 혀를 자른 일이 있었다. 주인이 와서 고발하자 포증은 “집으로 돌아가 소를 죽여 죽을 끓이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잠시 후 어떤 이가 와서 마음대로 소를 도살하는 자가 있다며 고발하였다. 포증이 “어찌 소의 혀를 자르고도 또 고발까지 하려 드는가?”라고 하자 도둑은 놀라 자복하고 말았다.
단주端州 지주知州, 전중승殿中丞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전임 수령은 연공年貢(일종의 공납)을 빌미로 단주端州의 특산품(名産)인 벼루를 (정해진 수보다) 수십 배나 갈취하여 권귀(權貴)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포증은 장인들에게 연공 액수만큼만 만들도록 했고 한 해가 다 갈 동안 (자신은) 1개의 벼루도 취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감찰어사리행監察御史裏行,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다. 이때 장요좌張堯佐가 절도선휘양사節度宣徽兩使에 임명되자 우사간右司諫 장택행張擇行, 당개唐介와 포증이 함께 진정을 올리니 그 말이 몹시 간절하였다. 또한 일찍이 “나라[國家]가 매년 거란에게 주는 물품은 융적을 막는 대책이 될 수 없으니 응당 군사를 조련하고 장수를 선발하여 변방의 방어를 튼튼히 하는데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문하門下의 봉박封駁 제도를 중히 여겨 부정한 관리는 파면하여 다시는 관로에 나서지 못하게 하고 지방관을 선발할 때 음보제자蔭補弟子에게는 시험을 치도록 하는 법을 시행할 것을 주청하였다. 당시 여러 도의 전운사轉運使는 안찰사按察使를 겸직하고 있었다. 그들이 관리의 탄핵을 청할 때는 대부분 보잘것없는 이유를 끄집어냈고, 각박하게 뒤지는 것을 고상하다 여겼기에 관리들은 불안에 떨었다. 포증은 이에 안찰사의 혁파를 청했다.
(한번은) 거란에 사신으로 갔는데, 거란의 영전객令典客이 포증에게 물었다. “웅주雄州에 새로 편문便門을 낸 것은 우리의 반역자들을 유혹하여 변경을 자극하겠다는 거요?” 포증이 말했다. “탁주涿州도 예전부터 개방하였거늘 편문만 갖고 변경을 자극한다 하시오?” 그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을 역임하고 경동전운사京東轉運使가 되었다가 다시 상서공부원외랑尙書工部員外郎, 직집현원直集賢院이 되고, 섬서陝西로 갔다가 다시 하북河北으로 갔다. 조정에 들어와 삼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가 되었다. 진농秦隴 사곡斜谷은 선박의 재목을 생산하는데, 이를 백성들에게 부과했다. 또 七州는 부賦로 하교河橋의 대나무를 징발하는데, 그 수가 항시 수만에 달했다. 포증은 이를 상주하여 모두 혁파토록 하였다. 거란이 군대를 모아 국경에 근접하자 변방의 군에 경계령을 내리고 포증에게 하북河北으로 군량을 조달調發하도록 하였다. 포증이 “장하漳河 지역은 토양이 비옥하나 백성이 경작할 수 없습니다. 형邢, 낙洺, 조趙 세 주의 민전民田이 15,000경이니 모든 말을 백성에게 주어 (경작토록) 하십시오.”라고 하자 (황제가) 승낙하였다. 해주解州의 염법鹽法은 백성을 병들게 했다. 이에 포증은 기존의 상황을 헤아려 모두 판매할 것을 청원하였다.
천장각대제天章閣待制, 지간원知諫院을 제수받았다. 총애를 받으며 전권을 휘두르는 대신들을 여러 번 논박하여 물리쳤으며, 은행恩倖으로 벼슬을 받은 이들을 일체 파직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또한 당대 위징魏徵[魏鄭公]의 세 가지 상소문을 열거하며 좌우에 두고 귀감으로 삼기를 원했다. 또한 천자에게 상언하여 명철한 생각을 갖고 의견을 받아들이고, 붕당을 판별하며, 인재를 아끼고, 선입견을 갖고 고집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 등 총 7가지를 들었다. 각박함을 없애고, 은행을 물리치며, 형을 바르게 하고 금제를 분명히 하며,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것을 주의하고, 요망한 것을 금할 것을 청했다. 조정은 그의 의견 대부분을 시행했다.
*천장각 대제 뜻? 송나라 때는 황실에 서고를 두고 그곳에 학관을 임명하여 황제의 비서, 자문역으로 삼았다. 황제의 지근 거리에 있어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천장각은 송대 황실 내 서고 가운데 하나로 인종(仁宗) 때 개수하여 진종(眞宗)의 저작을 봉안했다. 천장각의 학관으로 학사(學士), 직학사(直學士) 또는 시강(侍講), 대제(待制) 등이 이었다. 뒤의 용도각도 마찬가지로, 용도각은 천장각보다 지위가 높았다.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하북도전운사河北都轉運使를 제수받았다. 일찍이 일이 없을 때는 군대를 내지로 이동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황제는) 응답하지 않았다. 이에 “하북의 둔병을 혁파하여 하남의 연兗, 운鄆, 제齊, 복濮, 조曹, 제濟 등에 분산시키고 경계 병력[警]을 두면 후일의 근심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수병戍兵의 수를 줄일 수 없다면 의용義勇을 훈련시키고 양식을 제공하면 한 해의 비용은 둔병 한 달치면 될 것이며, 한 주의 부세면 충당하고도 남을 것입니다.”라고 청했으나 이 역시 회보를 받지 못했다. 영주瀛州 지주知州로 옮겼다. 여러 주州에서 공전公錢을 사고팔았는데, 몇 년간 쌓인 빚이 10여 만이나 되었다. 이에 상주하여 면제해 주도록 하였다. 아들이 죽어 편군便郡의 자리를 청하자 양주지주揚州知州가 되었고 (다시) 노주廬州로 옮겼다. 형부낭중刑部郎中이 되었으나, 잘못된 인선에 연루되어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郎으로 강등되고, 지주지주池州知州가 되었다.
(당시) 아이나 아낙도 그(포증)의 이름을 알았으며 ‘포대제包待制’라고 불렸다. 경사京師에는 ‘몰래한 악행에 염라포로閻羅包老가 있다.’는 말도 있었다. 포증이 정문을 열면 앞으로 나가 곡직曲直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니 관리들은 감히 거짓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중앙의 고관과 세력가가 원림園林을 조성하며 혜민하惠民河를 침범했다. (그 결과) 물길이 막혀 통하지 않게 되어 경사에 큰 홍수가 났다. 이에 포증은 (그들의 원림을) 모두 철거하고 (원상복귀토록) 하였다. 또 어떤 이는 땅문서[地券]로 자신의 토지 수를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포증은 그것을 면밀히 살펴 (거짓임을 확인하고) 그를 탄핵하였다.
간의대부諫議大夫,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상주하기를 “동궁이 빈 지 오래되었으니, 이는 천하의 근심입니다. 폐하께서 오랫동안 결정해주지 않으시는 것 무엇 때문입니까?”하고 하였다. 인종仁宗이 말했다. “경은 누구를 세우면 좋겠소.” 포증은 “신은 재주가 미천함에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신이) 태자를 세우는 것을 청한 것은 종묘宗廟가 만세萬歲로 이어지길 바라는 뜻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폐하께서 신에게 누구를 세웠으면 좋겠냐고 물으시는 것은 신을 의심하는 것이옵니다. 신의 나이 70에 자식이 없으니 복을 바랄 것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황제는 기뻐하며 “천천히 논의하도록 하겠소.”라고 말했다. (또한) 내시를 적절히 억누르고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며, 각 로路의 감사監司(의 직무 고과를)를 살피고 어사부御史府가 스스로 속관을 등용하는 것을 금하고 연간 휴가 일수를 줄일 것을 청하니 모든 일이 시행되었다.
장방평張方平이 삼사사三司使가 되어 호민豪民의 재산을 팔아치운 것에 연루되었다. 포증은 (그를) 파직시켜야 한다고 상주했다. 그러나 송기宋祁가 방평方平을 변호하자 포증이 다시 논박했다. 송기가 파직되고, 증拯은 추밀직학사권삼사사樞密直學士權三司使가 되었다. 구양수歐陽脩는 “소를 끌다 밭을 지나갔다고 소를 빼앗는 듯, 벌이 너무 심하다. 그리고 그 부를 탐하는 것 또한 너무하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에 포증은 집에서 칩거하며 명을 피했고 한참을 지나서야 나왔다. 삼사三司 재직할 때는 창고의 진공품을 모두 외군外郡에 할당을 주어 채우도록 한 까닭에 백성의 부담이 증가하였다. (이에) 포증은 특별히 場和市를 개설하여 (매입하도록 하여) 백성이 근심을 없애 주었다. (또한) 관리들은 전백錢帛의 책임을 졌다가 거기에 속박되어 틈을 봐 도망치곤 했는데, 모두 그 처자를 붙잡아 구류하였다. (포증은) 그런 이들을 모두 방면하였다. 급사중給事中에 천거되고 삼사사三司使가 되었다. 며칠 후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되었다. 그리고 예부시랑禮部侍郎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얼마 후 병으로 죽으니 향년 64세였다. 예부상서禮部尚書에 추증되고 효숙孝肅이란 시호를 받았다.
포증은 성격이 올곧고 악행을 일삼는 관리를 증오하였으며 돈후함에 힘썼다. 비록 악을 몹시 싫어하였지만 충서忠恕에 힘쓰지 않은 적 없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거짓으로 얼굴 표정을 꾸며대며 타인을 기쁘게 하지 않았으며, 집에 머물 때조차 사사로운 서신은 받지 않았으며 친구나 동료[親黨]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비록 귀한 신분이었지만 의복, 일용품[器用], 음식은 벼슬하기 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후일, 벼슬하는 자손 가운데 장죄贓罪를 범하는 자가 있다면 절대 집에 들이지 말 것이며, 문중의 묘소[大塋]에 장사 지내지 못하도록 하라. 내 뜻을 따르지 않는 자는 내 자식도 손자도 아니다.” 애초에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억繶이다. 최씨崔氏와 혼인하여 담주통판潭州通判을 지냈으나 사망했다. 부인 최씨는 수절하여 개가하지 않았다. 증拯이 일찍이 잉媵(처와 첩 사이의 부인)을 내보낸 일이 있는데, (그녀는) 부모의 집에서 아이를 낳았다. 최씨가 몰래 그 어미를 위로하고 근실한 마음으로 이들을 돌봐주었다. 억繶이 죽자 잉의 아이를 데려왔는데, 그 이름은 연綖이다. 저서로 주의奏議 십오권十五卷이 있다.
- 송사宋史 권卷316 포증전包拯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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