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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현재 장충단 공원 앞의 비석, 즉 장충단비는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로 1900년 장충단을 건립할 때 세운 것이다. 앞은 황태자(훗날의 순종)이 쓰고 뒤의 본문은 1905년 을사늑약 후 순국한 민영환이 썼다. 아래는 그 번역문과 원문이다. [앞] 예필(황태자 글씨) 장충단 [뒤]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이 성인을 능가하고 운수는 중흥을 맞이해 커다란 반석을 다지고 위기를 경계하셨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 더러 어려움이 닥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으니 갑오년, 을미년의 사변이 있었다. 무신武臣으로 난에 몸을 던져 목숨을 바친 자 많았으니, 슬프도다! 그 굳건함은 눈과 서리에도 당당하며 그 명성(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영원토록 제향을 올리고 변치 않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터, 이에 성상께서 특별히 포충..
칠세七世 구당서舊唐書 본기本紀에 “고조高祖는 양凉(서량) 무소왕武昭王 고暠의 7대손이다. 고는 흠歆을 낳고 흠은 중이重耳를 낳았다. 중이는 희熙를 낳고 희는 천석天錫을 낳았다. 황조皇祖의 휘는 호虎고 황고皇考의 휘는 병昞이다.”라고 했다. 신당서新唐書 본기에서는 “칠세조는 고暠이며 고는 흠을 낳았다.”고 했다. 천석 이하 바로 호를 낳았다고 하고 호는 병을 낳고 병은 고조를 낳았다 했으나 황조, 황고라고는 하지 않았다. 유구劉昫는 당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신당서 본기에선 다시 천석을 '천사天賜'로 고쳤다. 칠대조이든 칠세손이든 모두 자신에서부터 세는 것으로 순서대로 추산하면 고부터 병까지, 역으로 추산하면 병부터 고까지가 칠세다. *참고 이호李暠 – 이흠李歆 – 이중이李重耳 – 이희李熙 – 이천석李天錫..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는 당 현종 시대의 일화를 모은 책이다. 모두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당의 전성기 풍경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다. 개원開元, 천보天寶 상, 천보 하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서는 개원 편에 초반에 있는 이야기 몇 개를 번역 소개한다. *개원開元(713~741) / 천보天寶(742~756) ‘태평太平’ 글자가 있는 옥(玉有太平字) 개원원년(713) 궁중 안에 비가 내려 물이 흘러 땅이 패였다. 밤에 그 사이로 빛이 나서 숙위가 그 장소를 기억했다가 날이 밝자마자 상주했다. 주상이 그곳을 파보라 하니 보옥 하나가 나왔는데, 모양이 박(拍板: 악기) 같았다. 위에 옛 전서체로 “天下太平(천하태평)”이란 글자가 있었다. 군신들이 경하했고 내고에 넣어 두었다. 開元元年,..
강소 구용현 발견 동오 주전 유물 江蘇句容縣發現東吳鑄錢遺物 1975년 10월 진강박물관鎭江博物館은 구용현句容縣 갈촌공사葛村公社에서 동오가 주조한 대천오백大泉五百, 대천당천大泉當千 및 거푸집을 발견했다. 거푸집은 길이가 약 15cm로 위가 넓고 아래는 좁은 형상이다. 대천당천은 직경이 3.4cm, 무게 6.5g, 대천오백은 두 종류로 하나는 직경 3.15cm, 다른 하나는 3cm으로 무게는 6~6.3g이다. 이 동전은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고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토제 용범에 쇳물이 주입하여 주조하는 방법으로 제작했다. 4매 1조의 거푸집이 총 20여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 번에 100여 매의 동전을 제작한다. 동전은 표면은 거칠고 몇 개씩 엉겨있으며 외곽에는 갈아내야 할 청동 조각이 붙어있다. 용범 안에..
“승상제갈령丞相諸葛令” 비석은 1980년 여름 소장 탁본 가운데 발견한 것이다. 상당히 드문 삼국시대 비석의 탁본이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丞相諸葛令. 按九里堤捍護都城, 用防水患. 今修築竣. 告爾居民, 勿許侵佔, 損壞. 有犯, 治以嚴法. 令即遵行. 章武三年九月十五日. (승상 제갈의 령. 구리제방은 도성을 보호하고 수해를 방지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너희 백성에게 고하니 침범하여 점유하거나 파손하는 행위를 것을 절대 허락치 아니한다. 만일 범하는 자가 있다면 엄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명령을 바로 따르라. 장무3년(223) 9월 15일. 비의 높이는 53cm, 너비는 38cm이다. 는 “구리제九里堤는 현의 서쪽에 있고 제방의 길이가 9리다. 노인들에게 전해오길 제갈량이 물살을 막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고 ..
고조와 고종의 자만 쓰다. 高祖高宗獨書字 구당서舊唐書 본기는 황제의 자字를 모두 기록하지 않았고, 신당서新唐書는 고조高祖와 고종高宗 두 황제의 자만 기록했다. 단, 스무 명의 황제 가운데 이 두 명의 황제만이 자가 있었을까, 돌아보면 그런 건 아니다.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사마씨(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씨(반고班固의 한서漢書)는 한의 본기에서 고제高帝의 자를 쓰고 휘를 기록하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휘와 자 모두 쓰지 않았다. 사마씨와 반씨는 한의 신하였기 때문이다. 나머지 역사서는 모두 휘와 자를 썼다. 구당서에서 자를 쓰지 않은 것은 고구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당서에서 두 황제의 자만 쓴 것은 그 기준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舊紀各帝皆無字, 而新書於高祖・高宗二帝獨書其字, 但二十帝之中只此..
안휘 남릉현 발견 오왕 광 검 安徽南陵縣發現吳王光劍 1978년 남릉현문화관南陵縣文化館은 삼리공사三里公社에서 청동 단검을 구매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검은 삼리공사와 하만공사何灣公社 경계의 작은 산 위 지표로부터 약 1m 아래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출토되었을 때 검은 이미 기계에 의해 조각난 상태였다. 검의 길이는 약 50cm으로 손잡이는 원통형이다. 칼 몸통에 음각 전서 명문이 있다. “攻敔王光自乍(作)用劍以戰戍人(공오왕광자자(작)용검이전수인)” 좌전 소공27년에 “광은 오왕 제번의 아들이다. 광은 거짓으로 병에 걸렸다며 굴실로 들어갔다. 물고기를 올리는 데, 물고기 뱃속에 칼을 숨겨 두었다가 칼을 뽑아 왕을 찔렀고 가슴을 꿰뚫어 결국 왕을 시해했다. 합려闔廬가 그 아들을 경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유비 휘하의 대표적 문신, 손건의 열전이다. 손건孫乾은 자가 공우公祐로 북해인北海人이다. 선주先主가 서주徐州를 다스릴 때 종사從事로 벽소했고 [정현전鄭玄傳: 정현이 건을 주州에 추천했다. 건이 (유비로부터) 벽소된 것도 현이 천거했던 것이다.] 훗날 (선주)를 호종했다. 선주는 조공曹公에게 등을 돌리고 건乾을 보내 원소袁紹와 결탁했고 형주荊州에 머무르려 할 때 건은 다시 미축麋竺과 함께 사신이 되어 유표劉表에게 갔는데 모두 뜻대로 되었다. 훗날 표表(유표)는 원상袁尙에게 편지를 보내 형제 분쟁의 변란을 이야기하며 “매번 유좌장군劉左將軍[유비]・손공우孫公祐[손건]와 이 일을 함께 논했는데, 그 고통이 뼈속까지 스며 서로 붙잡고 슬퍼하였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중히 여겼다. 선주先主가 익주益州를 평정하고 건..
하북 정정현 출토 전연 원새4년 각자묘전 河北正定縣出土前燕元璽四年刻字墓塼 정기중程紀中 1977년 5월 하북성河北省 정정현正定县 대풍둔촌大豐屯村 사원 범운증范雲增이 정정문관소正定文管所로 각자묘전과 두건의 홍도 항아리를 보냈다. 그에 따르면 이 마을의 고묘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한다. 묘실은 이미 파괴되고 남은 것은 이 세 건 밖에 없었다고 한다. 각자전은 청회색으로 길이 32, 너비 16.5, 두께 7.5~8cm다. 양 끝이 부서졌지만 명문이 잘 남아 있다. 명문은 총 54자로, “元璽四年庚戌朔十四日乙未, 奉車都關内侯馬遠越造陶作塼五萬枚, 用功三萬二千, 土室遺監作中將慕容乾清酒七百斛, 牛犊二百頭.”다. 원새는 전연 모용준의 연호로 원새4년은 355년이다. 전연은 337년 모용황慕容皝이 연왕을 칭한 이후 370년..
무위 금사공사 출토 전진 건원12년 묘표 武威 金沙公社出土前秦建元十二年墓表 무위지구문화관武威地區文化館 종장발 鍾長發, 영독학寧篤學 1975년 3월 무위현 성 서북 7.5km 금사공사金沙公社 조가마趙家磨 대대大隊 사원이 정지작업을 하던 중 석제 묘표 1점이 발견되었다. 묘표는 평평하고 위는 원형 아래는 방형으로 높이 37cm, 너비 26.5cm, 두께 5cm이다. 묘표 아래의 장방형 복련좌는 연화문을 저부조로 새겼으며 연꽃잎은 끝이 뾰족하고 이중으로 되어 있다. 위진~십육국시대 연판문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연화좌대는 높이가 9cm, 길이가 40cm, 너비가 18.2cm다. 묘표 상부에는 전서로 “墓表(묘표)” 두 자를 새겼고 아래는 위체자魏體字로 9행 매행 8자의 명문이 있다. “전진건원십이년”은 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