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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는 기독교의 지파인 네스토리우스교가 중국에서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비석으로 동시대 동서양 문화교류와 당대 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학력고사 사회탐구부터 각종 세계문화사 시험까지 종종 출제되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페르시아 출신 선교사 이사伊斯(Yazdhozid)가 당 덕종德宗 때인 건중建中2년 2월(太蔟月) 7일 대진사 경내에 세운 것이다. 비문은 조의랑朝議郎 전행태주사참군前行台州司參軍 여수암呂秀岩이 정관연간 대진사大秦寺 승려 경정景淨의 서술을 적었다. 비의 높이는 197cm, 아래 귀부가 있어 전체 높이는 279cm다. 비신의 너비는 위가 92.5dm, 아래가 102cm이다. 정면에 ‘大秦景教流行中國碑(대진경교유행중국비)’와 송문이 적혀 있다. 비신에는..
양왕대차거안주조상비는 1903년 독일 조사단에 의해 독일로 반출되어 베를린박물관이 소장했다. 아래 글은 뤄전위가 청말 정치가이자 수집가로도 유명했던 단방端方(1861~1911)이 유럽에 시찰 갔을 때 구해온 탁본을 고증한 글이다. 서구열강 및 일본에 의해 투루판 지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기존 중국 역사 기록에는 몇 페이지에 불과했던 고창국 역사가 밝혀지기 시작했고, 뤄전위 또한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양왕대차거안주조상수사비발 涼王大且渠安周造象脩寺碑跋 이 비석은 근년 신강에서 출토되어 지금 독일수도박물원(베를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서 을사년 상서上書 단오교端午橋(端方)가 태서로 정치를 시찰하러 갔을 때 탁본 한 매를 떠서 가져왔다. 비는 양왕凉王 대차거안주大且車安周가 불상을 조성한 사실을 기..
뤄전위(羅振玉)의 여러 학술적 업적 가운데 손꼽는 것이 돈황문서를 필두로 한 서역 사료의 분석이다. 서수석각록은 신강지역 금석문을 모은 것으로 청의 신강 지배로 얻은 신사료다. 신해혁명으로 그동안 모아 뒀던 자료가 사라지자 그는 무전손繆荃孫(1844~1919)의 자료를 사용했다. 이 책은 1914년에 발간되었지만, 그는 멸망한 청조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는 이후 그의삶에 흑역사가 되는 만주국행의 단초를 보여준다 하겠다. 서수석각록서西陲石刻錄序 내 나이 17세에 처음으로 금석묵본을 수집했다. 강회에서의 성장기를 돌아보면 교유도 드물어 변경의 석묵본(탁본)을 접할 수 없었다. 수집품이라고는 배잠裴岑, 강행본姜行本 두 비석 탁본뿐 다른 것은 없었다. 광서 임진년(1892) 태수 오흥 사람 균보均甫 시보화施補華..
아침에 멀뚱멀뚱 일어나 연말 마감해야 할 것을 둘러보다 우연히 남송 요관姚寬의 서계총어西溪叢語를 읽게 되었다. 찾던 내용과 상관없이 개원통보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개원통보하면 다들 헷갈려하는 것이, 1. 개원통보는 당대의 동전으로 당 현종 개원연간의 물건이 아니라 당 고조 무덕4년(621)에 처음 주조한 것이다. 이 내용은 당서 식화지에 나오기 때문에 빼박캔트,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많이들 틀린다. 2. "개통원보"로 읽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당육전에서는 개통원보라고 했다며... 그러나 아래 요관이 명쾌하게 정리를 해놓았다. 당나라부터 오늘날까지 무려 10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궁금한 이 하나 없었으랴. 개원통보이니 개통원보로 잘못 읽고 우기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더 궁금..
정지절비발程知節碑跋 뤄전위(羅振玉)가 정지절程知節(589~665) 비문을 읽고 고증한 글로 병인고丙寅稿에 실려있다. 정지절은 당대 명장 중 한 명으로 본래 이밀李密의 휘하였으나 왕세충王世忠에게 붙잡혔다가 당에 항복했다. 진왕부秦王府 좌삼통군左三統軍이 되어 송금강宋金剛, 두건덕竇建德, 왕세충과의 전투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능연각凌煙閣 24공신 중 19위로 올라갔으며, 고종 때는 총산도행군대총관蔥山道行軍總管으로 서돌궐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의 반란을 진압했다. 현재 정지절 비는 소릉박물관昭陵博物館에 있다. 이 비는 일찍이 ≪금석록일록金石録日録≫에 수록한 바 있다. 20년 전쯤 허경종許敬宗이 지은 비문이 출토되었다. 글씨는 양정暢整이 썼는데, 그는 ≪청하장공주비清河長公主碑≫도 썼다. 비문의 글자는 또렷했으나 매..
뤄전위(羅振玉)가 자신이 소장한 베트남 동전을 고구한 글로 면성정사잡문갑편 面城精舍雜文甲編에 수록되어 있다. 동전 명문으로 베트남 왕조의 연호를 고구한 글로, 빨대꽂아 알아냈다(濡管識之)는 표현이 두고두고 남을 듯하다. 전문고錢文考 내가 가진 옛 동전 가운데 16개는 모양이 얇고 작은데 표면은 편평하고 윤곽이 없다. 크기는 대개 일정하고 재질은 붉은 동銅이다. 아주 옛날의 물건은 아닌데, 가장 오래된 것이 약 4백년 전, 근자의 것은 1~200년 전 것이다. 동전에는 ‘원풍통보元豐通寶’, ‘소풍평보紹豐平寶’, ‘대정통보大定通寶’, ‘천부원보天符元寶’, ‘정륭원보正隆元寶’, ‘치평성보治平聖寶’, ‘한원통보漢元通寶’, ‘태화통보太和通寶’, ‘성원통보聖元通寶’, ‘천성원보天聖元寶’, ‘상통원보祥通元寶’, ‘안..
아래 글은 진방직陳邦直의 나진옥羅振玉傳(新京: 滿日文化協會: 康德10(1943))을 번역한 것이다. 동년시대童年時代상우 나씨의 가계 上虞羅氏家世 나진옥羅振玉 선생의 원적은 절강성浙江省 상우현上虞縣이다. 증조 돈현공敦賢公(자 희재希齋)은 가경년간(1796~1820) 염하鹽河의 막부에서 관직 생활을 하며 강회江淮를 오가다가 결국에 강소성 회안부淮安府에 터를 잡았다. 돈현공은 아들이 9명 있었는데, 셋째는 이름이 학상鶴翔(자 익운翼雲)으로 그가 선생의 조부다. 강소성 고우주高郵州 지주知州를 역임했다. 학상공은 아들을 둘 두었는데, 장자가 수훈樹勳(자 요흠堯欽)으로 그가 선생의 부친이다. 강녕江寗 청하현승淸河縣丞을 역임했다. 100여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강남의 문인 집안(書香世族)이다. 고향 회안 故鄕淮安 회..
아래 기록은 1905년 도쿄제국대학 남만주조사 인류학 분야를 담당했던 도리이 류조(鳥居竜蔵, 1870~1953)가 남긴 광개토대왕릉비 조사 기록이다. 호태왕의 비문(제52도 A,B)은 오래 전에 일본에 전해져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그 존재가 알려졌지만 어떤 상태인지 대략이나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까지 이 비석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료로 메이지12년(1879) 발행된 회여록會餘錄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호태왕비는 어느 때인가 한 번 계곡물에 잠기기도 했지만 언젠가 흙을 파내 오늘과 같이 지상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비가 있는 장소는 평원인데다 이런 큰 비석이 쉽게 매몰될 수 없으니 가령 그 하부는 깊이 묻혀있다고 해도 상부는 여전히 건립 당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미축麋竺은 자가 자중子仲으로 동해東海 구인朐人이다. 조상 대대로 돈을 벌어[貨殖] 동객僮客 만 인을 거느리고 재산 거억을 모았다. [수신기搜神記: 미축이 일찍이 낙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집까지 수십 리를 남겨 두고 길가에서 부인 한 명을 보았다. 축에게 (말 또는 가마를) 태워달라 하여 수 리를 지나자 부인이 감사의 인사를 하고 떠나며 미축에게 말했다. “나는 천사다. 동해 미축의 집에 불을 지르러 가던 차에 그대가 태워준 것이 고마워 이야기해 준다.” 미축이 사사로이 부탁하자 부인이 말했다. “태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그대는 빨리 가라. 난 천천히 갈터이니 한낮에 불이 날 것이다.” 미축이 집에 도착해 재물을 모두 밖으로 꺼내놓자 한낮에 화재가 크게 일어났다.] 후에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이 별가종사..
추코문고中公文庫로 나온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901~1995)의 “중국에서 배운다(中國に學ぶ)”다. 초판은 1986년 9월 10일이나 본 책은 1998년 2월 20일 7판(가격 699엔, 세별)이다. 겉표지 뒷면의 책소개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중국에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중국사학 분야일 것이다.”라는 깊은 인식에 기초해 중국의 사상, 역사, 민속, 인물 서적을 이야기하고 정치, 시사를 논한다. 나아가 우리가 중국에서 배울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오늘날 중국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단서를 제시하는 명작 에세이 저자인 마야자키 이치사다는 일본의 중국 사학, 그 가운데서도 교토학파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학자다. 우리나라에서도 나가노 현 북부 이야마 시(飯山市)에서 태어났다. 1925년 교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