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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국권 피탈, 즉 경술국치 다음날(1910.8.30.), 황성皇城엔 더 이상 황제皇帝가 없기에 황성신문皇城新聞은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이름을 바꿨다. 제호 사이로 여전히 태극기는 펄럭이지만 귀퉁이 날짜는 융희隆熙4년 대신 명치明治39년으로 바뀌었다. 흥미로운 것은 제호 아래 첫 기사는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이다. 조선 귀족들의 현실적인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것이 급선무였던 모양이다. 다음 2면에는 순종純宗의 조칙과 칙유, ‘일한합병조약문日韓合倂條約文’ 그리고 메이지 천황의 조서와 한(대한제국)황실 대우 조서가 실려 있다. 순종의 조서나 칙유, 조약문은 일본이 간여해 작성한 것일 터, 메이지 천황의 조서를 옮겨본다. 짐이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여 제국의 안전을 장래에 보장할 필요를 생각하며 또한 평상시 한국..
화태청관영 해구신 신품 도착 정기를 보충하고 정력 강장에 신비로운 효과를 가진 전 세계에 유일한 고귀한 실탄 진품이외다. 구해서 복용하길 원하시는 분은 설명서를 요청하시면 무료 증정합니다. / 과연 백발백중 증명서 부산부 초량정 / 합자회사 대양무역사 大洋貿易社 / 전화 1-182번 / 계좌 부산7922번 [매일신보 1938.11.12.] 해구신이 무엇인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렇게 정의했다. 해구-신(海狗腎): 물개의 음경과 고환을 한방에서 이르는 말. 보신 강정제로 쓴다. 해구신은 오래 전부터 강정제로 유명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오로칠상五勞七傷, 신기가 쇠약해지거나 음위에 힘이 없거나 얼굴이 흙빛에 정기가 차거나, 남성의 정력이 쇠약해졌거나, 지나친 성생활로 성기가 피로해져 수척해진 것을..
이태원梨泰院, 조선시대 한성의 원院 가운데 하나다. 조선시대의 교통 시설로 역驛과 원이 있었는데, 역이 공무원용 터미널이었다면 원은 호텔이라, 역에서는 말을 빌려 또는 바꿔 타고, 원에서는 숙식을 제공받았다. 옛 한성부에는 역으로는 노원역과 청파역, 원으로는 보제원, 홍제원, 그리고 이태원이 있었다. 미군이 서울에 주둔한 이래, 우리의 대표 수출품이 다람쥐(진짜 살아있는 거)였던 때부터 이태원은 국제적 동네였다. 일제강점기 마을 전설에 따르면 이태원은 본디 이태원異胎院(다른 태아가 있는 원)이란 이야기가 있으니, 임진왜란 때 한양에 주둔했던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범했던 여성들이 이곳에 모여 살며 그때 가진 아이를 낳았다고 하여 그리 불렸다는 거다. 전쟁의 참혹상이긴 하나, 더 비참한 건 그들이 모여..
탈모는 예나 지금이나 현대 의학의 난제 가운데 하나다. 원형 탈모 상담하러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대머리였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고민이라고 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웃음으로 승화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대학 다닐 때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친구는 "레닌, 트로츠키, 세상을 바꾼 이들은 모두 탈모인"이었다고 주장했으며, 또 어떤 선배는 전대협이 실은 "전국 대머리 연합회"의 줄임말이라고도 했다. 이런 농담은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니, 세기말 괴작 "이나중 탁구부"에서는 무지개가 "7명의 대머리 노인들이 나라가 정해주는 시간, 정해진 장소에 모여 만든 것"이라는 놀라운 학설을 던졌으며, 뮤지컬 "스위니 토드"에서는 사기꾼..
명동지하도에서 올라와 줄지어 있는 먹거리 노점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왼편에 고풍스러운 건물 한 동이 있다. 국립극장 명동예술극장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메이지자(또는 명치좌明治座)’로 불렸던 영화관이다. 메이지자는 현재까지 도호(東寶), 도에이(東映)와 더불어 일본 삼대 영화사로 불리는 쇼치쿠(松竹)가 만든 영화관이다. 쇼치쿠는 1895년 공연장 영업을 시작해 1920년 쇼치쿠 키네마 합명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영화산업에 뛰어들었다. 같은 해에는 제국활동사진주식회사를 세우고 1923년 오사카쇼치쿠자大阪松竹座, 1930년 도쿄극장(東京劇場) 등을 열었다. 이와 더불어 1930년대부터는 조선에 진출, 영화를 보급하는 한편 조선인 배우도 물색했다. 메이지자의 건축은 초대 극장장인 이시하라 료스케(石橋良介)가 ..
오나라의 대신 주연의 무덤이 1984년 중국 안휘성 마안산시에서 발견되었다. 무덤에서는 그의 이름이 적힌 목찰이 발견되었다. [사진 참조] 목제로 총 3건으로 장방형이다. 모두 크기가 동일하며 명문 내용도 거의 비슷하다. 정면 꼭대기 끝 중앙에 묵서로 “謁(알)”이라고 쓰고 오른쪽 아래 한 줄로 “[ ]節右軍師左大司馬當陽侯丹陽朱然再拜([ ] 절우군사좌대사 마당양후단양주연재배)”라고 썼다. 자체는 예서와 해서 중간 정도다. 여기에 나오는 주연의 관작은 삼국지 열전 내용과도 일치한다. 이하 그의 열전을 번역, 소개한다. 출전: 三國志 吳書 卷56 朱然傳 子績, pp.1305~1309. 주연朱然은 자가 의봉義封, 주치朱治 누이의 아들로 본래 성은 시씨施氏다. 처음에 처에게 아이가 없어 연이 13세에 손책孫策에..
2004년 8월 13일 하북성河北省 승덕시承德市 중급인민법원은 피고 이해도李海濤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이해도는 1992년부터 2002년까지 승덕시 문물국 외팔묘外八廟 관리처 문보부 부주임, 피서산장박물관避暑山莊博物館 부관장 등 역임하며 건륭분채묘금무량수좌상 乾隆粉彩描金無量壽坐像, 紫金嵌松石無量壽佛 등 소장품 259건을 빼돌리고 그중 152건을 팔아치워 72,000 달러의 부당이득을 챙겼다. 그는 진품 대신 짝퉁을 바꿔치기하는 수법으로 오랫동안 범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2심 재판부 역시 형을 확정, 2010년 11월 19일 형이 집행되었다. 문화재 절도가 사람의 인명을 빼앗아야 할 정도로 중범죄일까? 다른 나라라면 모르겠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그렇다. 인민의 공분을 쌓는 반국가적 행위, 중국은 이런 행동을..
선주先主(유비) 목황후穆皇后는 진류인陳留人이다. 오빠 오일吳壹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일의 부친은 본디 유언劉焉과 친구였던 까닭에 언을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 언이 다른 뜻을 두고 있던 차에 [한진춘추漢晉春秋: 선주가 익주益州로 들어가자 오吳가 손부인孫夫人을 불러들였다. (이때) 부인은 오로 태자太子를 데려가려 했다. 제갈량諸葛亮이 조운趙雲을 시켜 병력을 배치해 강을 막아 태자가 가지 못하게(남아 있게) 하여 제지할 수 있었다.] 관상 잘 보는 이가 태후의 상을 보더니 고귀해 질 것이라 했다. 언이 이때 아들 모瑁에게 들어오라 하여 모의 부인으로 들였다. 모가 죽자 황후는 홀로 지냈다. 선주가 익주益州를 평정하자 손부인孫夫人이 오吳로 돌아갔고 여러 군신들이 선주에게 황후를 맞을 것을 권했다. 선주가 유..
서울 인왕산은 궁궐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산으로 불렸다. 방어 시설로 산자락을 따라 성곽이 있다. 오늘은 인왕산에 있는 문화유산 국사당과 선바위를 보러 올라갔다. 인왕산에 오르는 사람은 대개 사직단社稷壇이나 황학정黃鶴亭, 또는 수성동 계곡으로 능선을 타고 이동하기에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 내리지만 국사당과 선바위를 보려면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1번 출구)에서 내려서 가는 것이 편리하다. / 지도는 맨 뒤에 첨부 아파트 단지를 끼로 올라가다 보면 인왕사仁王寺 일주문이 나온다. 인왕사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된 사찰이나 연산군 때 궁궐이 내려다보인다고 하여 폐사되었다. 이후로 언젠가 다시 생겼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명맥이 끊겼다고 한다. 김상헌金尙憲(1570~1652)은 유서산기遊西山記에서, “석굴의..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서울 구 미국문화원이다. 구 서울 미국문화원이라고 해야 하나 '구 서울'이 마음에 걸려 이리 지은 듯하다. 지하철로는 시청역(1,2호선) 또는 을지로입구역(2호선)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된다. 롯데호텔 차량 출입구 바로 맞은편에 있다. 이 건물은 본디 미쓰이물산(삼정물산三井物産) 경성지점 사옥이었다. 미쓰이물산은 메이지 시대 외국 상회가 독점했던 무역의 주도권을 일본이 되찾고자 1876년 설립했다. 면사방적기계와 면화를 수입하고 생사, 면사, 면포의 수출을 담당했다. 곧 일본 면사 수출의 절반을 다룰 정도로 성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에도 발 빠르게 진출했다. (관삼출구官蔘出口) 객년 12월 27일 연태煙台에 향할 차를 인(천)항에서 출범한 창룡호蒼龍號가 인항해관창고(인천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