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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전망대, 이태원 부군당

자불어 2024. 2. 11.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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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梨泰院, 조선시대 한성의 원院 가운데 하나다. 조선시대의 교통 시설로 역驛과 원이 있었는데, 역이 공무원용 터미널이었다면 원은 호텔이라, 역에서는 말을 빌려 또는 바꿔 타고, 원에서는 숙식을 제공받았다. 옛 한성부에는 역으로는 노원역과 청파역, 원으로는 보제원, 홍제원, 그리고 이태원이 있었다.

미군이 서울에 주둔한 이래, 우리의 대표 수출품이 다람쥐(진짜 살아있는 거)였던 때부터 이태원은 국제적 동네였다. 일제강점기 마을 전설에 따르면 이태원은 본디 이태원異胎院(다른 태아가 있는 원)이란 이야기가 있으니, 임진왜란 때 한양에 주둔했던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범했던 여성들이 이곳에 모여 살며 그때 가진 아이를 낳았다고 하여 그리 불렸다는 거다. 전쟁의 참혹상이긴 하나, 더 비참한 건 그들이 모여 살아야 했다는 것과 이곳에 이런 지명을 붙였다는 거 아닐까 싶다. 여하튼 이태원의 역사도 참으로 기구하다 하겠다.

이태원 부군당 / 2024.2.11.Ⓒ자불어

오늘은 이태원 부군당에 갔다. 부군당은 서울 및 경기도에서 마을 신당을 부르는 말이다. 특히 한강 주변에 많았던 듯한데, 서빙고에도, 동빙고에도 남아 있다. 부군府君은 본디 중국 한나라 때 군郡 태수太守를 부르는 말에서 기원했다. 군태수는  요즘으로 따지면 도지사에 해당한다. 그래서 지역을 주관하는 신을 '부군'이라 불렀던 모양이다. 앞에 설치된 설명문에 따르면 이태원 부군당은 1619년 남산 자락에 건립되었으나 일제강점기 그곳에 훈련소를 설치하면서 1917년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최소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지금까지도 제향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편)에 따르면 과거에는 일 년 두 차례인 정월달과 4월 길일을 골라 당주무녀가 주재하는 큰 굿을 하고, 7월과 10월 상달에는 화주(貨主)들이 주재하는 간단한 당고사를 치렀으나 이제 봄, 가을로만 제을 올린다고 한다. 그러나 설 다음날(24.2.11.) 찾아갔는데  문 앞에 막걸리가 일렬종대로 있는 걸 보면 누군가가 정월 제사를 올린 모양이다.

(전략) 운종사의 녹슨 종소리는 영영 끊어졌다. 원인은 어디에 있으랴, 그도 운종사에 빈대가 수 많은 청정(가토 기요마사)의 부하를 뜯어먹다가 그들이 가버렸으니 주린 배를 승려들에게서 채우려 할 때 너무도 빈대의 출몰이 심했으므로 승려들은 운종사에다 불을 놓고 달아나버렸다. 운종사에서 일을 보던 미녀들은 청정과 성교가 있은 후 청정이도 가버렸고 운종사도 불타 없어졌으니 그들은 오고 갈 데가 없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융경산隆景山 현재 부군당 밑에다 토막을 짓고 청정과의 관계로 임신했던 태아를 낳게 되니 아비가 타국인임을 생각할 때 이는 반드시 이태異胎(다른 배)라 하여 이웃 마을 사람들은 벌써 알고 수군거리길 이태가 있는 집이라고 하여 이태원異胎院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지금도 그곳에 정씨와 량씨는 이태원의 주인이라고 한다. 이후 그곳은 본디 산지임으로 논과 밭을 일굴 수 없어서 배나무와 복숭아를 많이 재배했더니 배가 어찌도 크게 잘 되는지 지방에서 이름을 날리던 봉산배보다 몇 배 이상 훨씬 큼으로 학자들이 이름을 고쳐 이태원梨泰院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복숭아는 털이 나지만 맹숭맹숭하게 익어가니 또 말하기를 운종사에 승려가 있었기에 승도增桃(승도)라고 하여 7~8월이면 자동차 엔진소리 그칠 날 없이 가인佳人들을 싣고 송도 맛보러 죽은 사람이 다니는 이태원공동묘지 옆을 돌아 모여든 답니다. 독자여! 놀라지 마세요. 삼백 삼십여 년 전의 운종사 불탄 자리에 섬돌을 지금이라도 제치면 빈대의 껍질이 아직 있다고 합니다. [이태원의 성덕준 투고, 전설: 운종사와 가등청정, 동아일보1932.7.17.]

윗글에 이태원공동묘지가 나온다. 이태원공동묘지에는 유관순 열사도 묻혀 있었으니 오늘날 부군당 옆에 유관순 열사 추모비가 있는 까닭이다.

유관순 열사 추모비(뒤로 이태원제일교회가 보인다.) / 2024.2.11. Ⓒ자불어

이태원부군당은 마을 주민들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웠으니, 그건 다름 아니라 학교 신축의 담보가 되었다는 거다. 이태원주민들은 자제 교육을 위해 이태원 부군당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조양학원朝陽學院을 확장했다.

조양학원은 1925년 이태원청년회가 결성되어 이듬해 마을의 자제, 특히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세운 학교다. 남녀공학으로 주학부(주간)와 야학부(야간)를 운영했는데, 1927년 남학생이 160명, 여학생이 32명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학생을 늘고 교사는 좁았다. 이에 일본군 용산 보병 제78연대 김석원金錫源 소좌를 총재로 초빙해 군용지 400여 평을 무료로 영구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부지는 구했으나 그곳에 건물을 올리기 위해서는 7천여 원이 필요했다. 모금 운동을 펼쳐 어찌어찌 3천여 원은 모았으나 나머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난관에 봉착하자 마을 주민들은 회의를 열어 부군당 일대 토지를 저당 잡혀 4천 원을 대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1934년 새로운 교사로 옮길 수 있었다. 조양학원은 1936년 이태원보통학교가 되고, 1937년에는 고등보통학교도 문을 열었다. 훗날 이태원보통학교는 공립으로 전환되어 이태원심상소학교가 되었다가 오늘날 이태원초등학교가 되고, 고등보통학교는 대방동으로 옮겨 성남중고등학교가 되었다.

*김석원(1893~1978)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 소좌로 1937년 중일전쟁에 참전하여 북경 인근 전투에서 대대병력을 이끌고 부상을 입어가며 중국군 1개 사단을 물리치고, 이듬해에는 산시 성 일대에서 전투를 펼쳤다. 1938년 중좌로 진급하고 이듬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는 학병 참전 권유 강연회를 돌았으며 광복 직전 대좌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을 하던 김경천과 지청천의 가족을 보살펴주고, 또 위와 같이 인재 양성 사업에 노력했다. 광복 이후 육사를 거쳐 대령으로 임관, 제1보병사단 사단장으로 재직했다. 이때 북한에서 넘어온 명태를 모두 압수해 이를 처분한 뒤 그 돈으로 예하 장병들에게 부식을 나눠주었다가 강제 예편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수도사단 사단장이 되어 진천에서 북한군의 남침을 7일간 저지하였으며 포항철수 작전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1956년 예편한 뒤 1958년 민의원 선거(영등포을)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가 4.19. 이후 1960년 7월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재도전해 당선되었다. 그러나 5.16. 쿠데타로 의원직을 상실했고 이후 원석학원 이사장, 초빙교수, 민주당 특보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이 닫혀 담안의 건물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 반대쪽, 부군당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경치가 으뜸이었다. 곧 공원이 될 용산 미군부대 사령부, 즉 일제강점기 조선주차군 사령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런 까닭에 용산구에서도 서울 야경 스폿으로 선정했다. 이리 경치가 좋으니 신기도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바로 뒤에 이태원제일교회도 들어섰으니, 

이태원 부군당 앞 전망(멀리 용산 사령부, 옛 일본군사령부(회색 지붕 노란 건물)가 보인다) / 2024.2.11. Ⓒ자불어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1번 출구) 또는 녹사평역(3번 출구)에서 골목길 사이로 도보 10~12분. 상점, 고급 주택, 빌라 사잇길로 올라가면 나온다. 전망이 무척 좋으니 이태원 나들이 오신 분들은 한 번 들러보시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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