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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여성 선각자 하란사 또는 김란사깊어 가는 어느 날 밤이었다. 훌륭하게 차린 귀부인이 하녀들의 등불을 따라 스크랜튼 부인의 방을 두드렸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 불을 껐다. “지금 내 속이 이렇게 캄캄합니다. 나에게 지식의 등불을 밝혀주십시오.” 귀부인은 이렇게 말하며 자기를 입학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경향신문 1962.7.2., 대학가의 리창(裏窓), 이화여대(2)]위의 귀부인이 바로 남편의 성을 써서 하란사河蘭史로 불렸던 여성, 김란사다. 그녀는 평양 출신으로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첫 미국 학위소지자다. 그녀는 귀국해서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여러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제자를 양성하는 한편 여권 신장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건 암군이자 혼군 고종의 역할이 컸다. 순종은 최근 동상 에피소드만큼도 존재감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친왕 이강에게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이방자도, 더 앞서 윤치호도 지적했듯, 돈씀씀이 헤프고 축첩질엔 당대 으뜸으로 방종하게 살았다. 그의 아이 낳은 여성이 몇 명, 또 간간히 기사에 나오는 애첩 몇 명. 하지만 정실부인에갠 아이가 없었다는. 그럼에도 상해 망명 기도 사건 탓에 그나마 다른 황실가 사람들 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1. 상해 망명 사건의 진실월경 직전에 붙잡히자 그는 억지로 끌려온 것이라며 꼬리 자르기를 구사했다. 그의 진술 조서가 남아있는데, 그는 모든 문제를 전협 이하 대동단원의 탓으로 돌렸다. 팔아먹은 거다. 일제의 조작이라고 하나 일제가 조작할 이유는..
유학은 일제강점기에도 그 생명력을 이어나갔다. 조선 500년의 통치 이념이었으나 유학의 여러 덕목은 식민통치자들에게도 유효했다. 충성의 대상, 즉 임금만 바꾸면 이보다 좋은 이데올로기도 없었다. 유학은 사무라이의 교양이기도 했기에 그들에게도 익숙했다. 1915년 3월 17일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수하를 이끌고 석전대제 참석했다. 이하는 그 신문기사다. 석전 거행, 데라우치 총독 참배 2월 17일은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경학원經學院에서 춘기 문묘文廟의 석전대제釋奠大祭를 거행하였는데 이날은 즉 중춘仲春의 상정일上丁日이라. 융융한 화기는 반궁泮宮에 가득하고 생기가 그치지 않는 춘풍은 묘정에 불어와 명륜당明倫堂 앞의 화훼교목에는 호생지덕好生之德이 나타나니 혼연한 덕기德氣가 초목에 미치는 듯하더라..
고종은 어떤 군주인가? 매스미디어에서는 얼치기 작가, PD들이 고종을 미화하고, 또 모 전직 대학 교수는 종교를 믿듯 고종을 바라보며 온갖 상상력과 자기 복제로 각주 달며 찬양고무하고 있다. 그 덕분인지 많은 사람은 고종을 근대군주, 혹은 시대의 한계로 주저앉은 애석한 군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종의 치세를 돌아보면 그는 아버지가 만들어 준 강력한 군권으로 제 멋대로 하다가 망국의 길을 연 군주이며, 근대의 물산을 좋아하면서도 전근대의 군주권을 휘두르고자 했던 자다. 고종의 진면목은 그가 신하를 대할 때 드러났으니, 이 방면에서만큼은 사악하리만큼 악독했다. 자신을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신하를 헌 신짝 버리듯 했다. 그 일례가 고종 독살 미수 사건이다. 고종은 이상한 냄새에 마시진 않았으나 별생각 없..
의친왕의 후손들은 "의친왕이 '공'위를 박탈당하고 일본으로 끌려갔다"고 주장한다.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의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의 자료집에서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의친왕의 의병군자금 지원, 독립운동 지원 등을 보면서도 체포하지 못했던 일제는 의친왕에게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이강 ‘공’이라는 공족의 작위를 박탈하였고 평민으로 강등했으며, 일본 왕공족 전통에 따라 ‘공’위는 장남 이건에게 습공되었고 의친왕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의친왕은 1930년 6월 12일 결국 일본 큐슈 지역으로 강제로 압송되어 가게 되고, 나중에 도쿄로 옮겨졌다. 이준은 이강이 공의 작위를 빼앗기고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
#제국익문사 #독리 #이호석 #완은군 #이주용 #역사왜곡 #세종특별자치시 #의친왕1. "제국익문사비보장정"과 제국익문사몇 년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제국익문사비보장정"이라는 책이 발견되었다. 고종 재위 시기 통신사(정보원)에 대한 규정으로 직제와 역할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후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은 고종의 지휘 하에 실제 활동했던 듯 제국익문사를 그렸다.(또 무슨 소설도 하나 나온 모양이다.) 그러나 이 책자를 제외하곤 제국익문사에 관한 어떤 자료도 없다. 그런 까닭에 누가 참여했으며, 또 어떤 일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던 어느날 의친왕기념사업회에서는 이호석李浩奭의 유품으로 전한다며 도장 2과(성총보좌인, 제국익문사독리인)를 공개했다. 그러자 그간 고종 미화에 공들였던 전 ..
#의친왕은 독립지사가 아니다. #한량을 지사로 역사 왜곡 #세종시의 역사왜곡사카모토 다쓰노스케 (坂本辰之助)가 쓴 책 "황실 및 황족" 의 의친왕 부분이다. 1909년 초판 발간 이후 10년에 2판을 찍었다. 일본의 강점 후 새로 판을 내 조선왕공족을 추가했다. 여기에는 이왕(순종), 이태왕(고종) 등 왕공, 비빈의 작을 받은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坂本辰之助 編, 皇室及皇族(2版)(東京: 昭文堂, 1910.10.), (朝鮮王公二族) pp.24~25이강 공 전하는 이태왕 전하의 제2왕자, 궁녀 장씨의 소생이다. 이태왕에게 좋지 않은 일을 당해 생모와 민간에 숨어 있다가 그 후 메이지26년(1893) 궁에 들어와 의화궁이라고 불렸다. 27년(1894) 청일전쟁 때 대사로 우리나라(일본)에 와서 평화 후에는..
우리는 으레 희망을 담아 역사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이랬으면 좋았을 걸... 그런데 그 희망을 오래 품다 보면 마치 사실인 양 생각하며 되려 진실은 보지 않으려 한다. 역사 왜곡은 이렇게 시작된다. 대한제국 황실가문이 그 대표적 예 중 하나다. 인현왕후가 출궁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 흘리지만 정작 당신의 조상은 보릿고개를 걱정했을 거다. 집 한 채 없는 사람이 망한 재벌을 걱정하는 게 우리네 인정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스미디어가 근거 하나 없이 고종이나 민비, 의친왕, 덕혜옹주의 독립운동을 그럴싸하게 꾸며대면 또 이를 본 이들은 그것이 마치 진실인 양, 그리고 몰랐던 역사를 발견한 듯 달려든다. 가끔은 이런 경우가 국제적 개망신으로 치닫게 되기도 하니, 전 서울대학교 교수의 인조이재팬 쪽팔림 사..
전 의친왕 이강 공은 1919년 망명 기도가 실패한 뒤 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의친왕기념사업회의 주장처럼 국내여행이 일절 금지되었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황실 유일 독립운동가" 이강 공은 예전과 같이 이곳 저곳 다니며 풍류를 즐겼다. 송암신정기를 썼던 1928년 음력 8월(양력 9월)에도 개성을 당일치기로 놀러갔다 오셨다. 이태진은 1927년 "12월부터 의친왕 자신도 경기도 경찰부의 경비(警備, 감시) 대상으로 올라 사회 활동이 사실상 금지되었다"(세종시 자료집, p.93)고 했는데, 사회생활을 금지당한 이강공이 했던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강 공은 1928년 3월 14일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조선총독과 이케가미 시로(池上四郎) 정무총감을 조선호텔로 초대해 오찬..
조선의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일본 육상(육군상)을 겸하고 있어 자주 조선과 일본을 오갔다. 1911년 5월 데라우치 귀임 소식에 융희제(순종, 이왕)는 직접 찾아가 치하했다. (예전 일본 황태자가 왔을 때도 황제로서 제물포까지 나갔던 바라...) 이와 더불어 일본을 향해 일본어에 진심이었던 순종비 윤씨(순정효황후), 그리고 강점 이후 산으로 들로 놀러다니며 주색에 탐닉했던 이희 공, 이강 공 역시 그 대열에 빠지지 않았다. 대한제국 황실문화의 일면이 아닐까. 다니엘 튜더가 얼마 전에 이왕실과 관련해 책을 썼다던데, 이런 자료까지 다 봤는지 모르겠다. 후손들로부터 나온 일방의 구전만 듣지는 않았길 바란다. 여하튼 이런 황실의 모습을 미주 한인단체에서 발간한 신한민보는 "추태"로 일갈했다. 이에 이 글을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