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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얼마 전 우연히 어떤 글을 보았다. 그 글은 고종과 그 일족에 대한 비난을 "식민사관"으로 치부하며, 손톱만한 독립운동, 또는 뇌피셜 속 저항의식을 미화, 분칠하고 있었다. 후손이 조상의 어두움을 가리고 또 작은 기여를 현창으로 포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함부로 그들의 과오를, 또 역사적 사실을 "식민사관"으로 덮어버리려는 모습을 보며, 진정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참모습을 모두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몇 년 전 왕실 후손 한 명이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황제 즉위식을 열었다. 황제에 옹립된 이는 고종의 손녀이자 이강 공(의친왕)의 딸 이해원이었다. 1919년 태어나 일제강점기 내내 운현궁에서 호의호식하고 또 경기여고, 게이오대학(경응의숙) 법문학부까지 졸업했으나 광복 이후 스스로 생계를 ..
"고종이 여자를 밝혔어, 그래서..." 모 국회의원 후보자가 고종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해 구설에 올랐다. 후보자는 “고종이 그렇게 여자를 밝혔어. 그래서 밤마다 파티를 했어. 그래서 나라를 망친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누구라도 ‘역사’라는 타이틀을 붙여 이야기할 때는 근거 없이 이야기해서는 곤란하다. 그럼 고종의 일상은 어땠을까? 경술국치 이후 고종이 어떻게 지냈는지 여기 신문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한자가 많고 옛 문투라 대충 고쳐보면 아래와 같다. 이태왕 전하의 근황(近狀) 이태왕 전하의 근황을 알아본(漏聞) 즉 매일 오전 10시경에 기침하시어 즉시 조찬을 받으시고 오후 2시경에 서양 요리를 받으시며 오후 7시 혹은 8시에 조선 요리를 받으시는 것이 상례라 하며 또 취침하시는 시각은 대개 오후 10..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은 삼일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려 했다 실패했다. 그래서 다른 대한제국 황실 가족 가운데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뇌피셜로 증거도 없는 독립운동 이야기를 덧붙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또 증좌도 없는 그런 이야기를 퍼 나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망명 사건 이후 처벌받지 않은 사람은 이강뿐이다. 망명 실패 이후 그를 망명시키려 했던 인사들의 구명운동은커녕 일제강점기 내내 숨죽이고 살았다. 호기롭게 “내 뜻이오”라는 이야기도 일절 하지 않았다.(최소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 “고종의 뜻”이었다며 고종을 찬양하지만 자신이 보낸 밀사들의 삶에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던 고종의 모습은 잘 모른다. 고종과 그의 가족들은 나라를 소유물..
1월 황족 친목회는 이우李鍝 공 전하의 주최로 26일 오후 3시부터 시부야 도키와마츠(常盤松)의 어전에서 지치부노미야(秩父宮) 친왕과 왕비 양전하,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 친왕과 왕비 양전하를 필두로 각 황족 분들이 모여 해군종군작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를 초청해 “전장의 흙먼지를 줍다”는 제목으로 소강부대遡江部隊의 활약 관전담을 약 1시간에 걸쳐 청취, 마치고 다과회를 열어 이야기를 나누고 5시에 산회했다. (사진은 요시카와 에이지 씨)[경성일보 1938.11.27.] 이날 행사의 강연자인 요시카와 에이지는 20세기 일본의 대표적 통속소설 작가로 삼국지, 미야모토 무사시 등을 썼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요시카와 에이지가 이야기했다는 소강부대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부대'를..
일제의 잔재를 지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설령 그 시대가 진정 치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잔재를 후손에게 물려주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 흔적을 지우고 없애려고 힘쓰는 이들이야말로 증거를 인멸해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자들이다. 몇 년 전 충청남도 부여의 사자루 현판 사건은 그 대표적 일례다. 부여는 백제의 고도로 부소산성은 수도가 위기에 처할 때 농성 하고자 만든 산성이다. 오늘날 부소산성 정상에는 사자루라고 하는 누정이 있다. 사자루泗泚樓는 부소산의 다른 이름이 사자산泗泚山이오, 부소산성의 다른 이름이 사자성泗泚城이었기에 붙은 이름이나 부여의 옛 이름이 사비泗沘인 데다 한자도 비슷하게 생겨 ‘사비루’로 잘못 읽히기도 했다. 앞면 3칸, 옆면 2..
조선왕실, 대한제국황실 가족들은 나라를 잃고도 호의호식했다. 이들은 일본황실의 왕공족으로 대우받았다. 달라진 것은 다스릴 나라, 부려 먹을 백성이 사라졌을 뿐이다. 예전 교과서에는 대한제국의 멸망을 ‘한일합방’이라고 표현했으나, 이제는 ‘국권피탈’이라고 쓴다. 일제강점기라는 표현도 일제강점기라는 표현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합방’이라는 단어도 가려서 쓴 것이니 당시에는 ‘일한병합’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른 바 '일한병합'을 기념하여 일본은 여러 가지 기념물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인쇄물이었다. 사진첩, 팜플렛, 엽서 등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왕공족은 여기에 단골메뉴였다. 허울뿐이었던 제국 놀이는 채 20년도 유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던 황제 가족들은 기념물의 주인공이 되었다...
의친왕 이강의 적장자는 모모야마 겐이치(1909~1990)다. 옛 이름은 이건李鍵으로, 누가 시켜 개명한 게 아니라 스스로 한 것이다. “이은 가족은 모두 조선명, 이건공은 성마저 왜놈식으로” 패망한 군국주의 일본과 같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의 황족들이 이제는 일반인민들과 같이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거니와 이 황족들과 같이 왕족에서 물러난 이조 왕족의 자손들의 동향 한토막. 이태왕의 삼자인 이은(52세) 해방 후 시부야에서 과자 가게를 경영하며 조선이 그리워 조선으로 돌아오겠다는 말까지 하였다는데 지난번에는 조선식으로 자기 처 이본궁방자(48) 아들 구와 같이 개명까지 하였다 한다. 즉 이은李垠은 은흥垠興 처는 유희兪嬉 아들은 구학玖學으로 개명을 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은의 사촌인 이건공은 성명까..
20세기 전후 아시아의 군주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사진 찍기를 싫어했던 사람과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사람. 일본의 메이지 천황은 자신의 왜소한 체격이 드러날까 두려워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많지 않다. 반면 대한제국 고종의 경우, 사진에 호의적이었던 것 같다. 무당을 신뢰해 왕실 재정으로 궁궐 곁에 관우 사당도 차려주고, 눈 밖에 난 신하는 외국까지 자객을 보내 암살하고 또 그것으로 모자라 또 시신을 갖고 오게 해서 팔도에 뿌렸던 임금이었으나 커피를 좋아했다는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 기호만큼은 참으로 '모던'했다. 그래서 그런지 사진도 꽤 많다. 역사 기록물로서 사진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떤 계기로 찍었는지가 중요하다. 오늘 옛 신문을 보다가 고종의 가족사진 가운..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병참 지원을 위해 조선의 자원을 탈탈 털어내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의 개명한(?) 여성들을 중심으로 총후銃後(후방)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며 결성한 단체가 있었으니 바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다. 금차는 금비녀를 말하는데, 마치 예전 금 모으기 운동처럼 금비녀를 모아 전쟁 비용에 보태자는 취지에서 만든 단체다. 중일전쟁 발발한 지 채 한 달도 안 되어 1937년 7월 말 경기여고보에서 결성했다. 이날 바로 김복수金福綏 회장은 금비녀 십 수 개를 들고 용산 조선군사령부로 찾아가 경성요지방위사령관 후카자와 도모히코(深沢友彦)중장에게 헌납식을 거행했고, 이를 영원토록(?) 기념하기 위해 당시 명성 있던 화가 김은호金殷鎬를 불러 그림으로 남겼다. 이것이 훗날 김은호의 대표작이자 ..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피탈한 뒤로 여러 기념 행위를 이어갔다.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도 그 가운데 하나다. 한국병합기념장은 1912년 3월 28일 일본 천황의 칙령으로 제정되었다. 한국병합기념장은 단순한 기념 메달이 아니라 "한국병합"에 공이 있는 자들에게 주는 일종의 훈장이었다. 칙령이 반포되자 담당부서인 일본 내각 상훈국償勳局에서는 기념장의 디자인을 발표하고 제작에 착수했다. 지난달(3월) 28일 칙령으로써 한국병합기념장 제정의 건을 발표하였는데, 이 기장은 위 그림에 보이는 바와 같이 황동원형에 직경 1촌으로 상부에는 국수문(국화무늬)이오, 양측에는 오동 및 오얏의 꽃가지를 넣고 (또) 중앙 홍색 좌우 황색, 백색의 테두리가 있는 띠(綬)를 달았다. 이 기장은 한국 병합의 사업에 관여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