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오호십육국 (5)
일상 역사
무위 금사공사 출토 전진 건원12년 묘표 武威 金沙公社出土前秦建元十二年墓表 무위지구문화관武威地區文化館 종장발 鍾長發, 영독학寧篤學 1975년 3월 무위현 성 서북 7.5km 금사공사金沙公社 조가마趙家磨 대대大隊 사원이 정지작업을 하던 중 석제 묘표 1점이 발견되었다. 묘표는 평평하고 위는 원형 아래는 방형으로 높이 37cm, 너비 26.5cm, 두께 5cm이다. 묘표 아래의 장방형 복련좌는 연화문을 저부조로 새겼으며 연꽃잎은 끝이 뾰족하고 이중으로 되어 있다. 위진~십육국시대 연판문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연화좌대는 높이가 9cm, 길이가 40cm, 너비가 18.2cm다. 묘표 상부에는 전서로 “墓表(묘표)” 두 자를 새겼고 아래는 위체자魏體字로 9행 매행 8자의 명문이 있다. “전진건원십이년”은 376..
북연의 두 번째 황제 풍발馮跋의 재기載記다. 북연의 창업주는 모용운慕容雲, 즉 고운高雲이었다. 고운은 측근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때 자제도 함께 죽었다. 풍발은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황제에 즉위한 뒤, 모용운 정권을 고스란히, 국호까지 물려받았다. 풍발은 신도信都 사람으로 기록 상 한족漢族이었으나 이민족 국가를 인수했기 때문에 재기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고운은 후연後燕 모용씨 왕족들과 한 권에 입전된 반면, 풍발 이하 북연 군주는 서진西秦 걸복씨乞伏氏 뒤에 실렸다. 전, 후 두 편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진서) 고운의 북연을 인수한 풍발(전편) 북연의 두 번째 황제 풍발馮跋의 재기載記다. 북연의 창업주는 모용운慕容雲, 즉 고운高雲이었다. 고운은 측근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때 자제도 함께 죽었다. 풍발은 반란..
선비족 삼대 그룹 중 하나인 모용씨가 세운 여러 연나라 가운데 하나로 남연南燕이 있다. 이하는 남연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황제 모용초(385~410, 재위 405~410)의 이야기로 진서 재기에 수록된 이야기다. 남연은 우리 고대 문화와도 관련이 깊다는 삼연三燕 가운데 하나다. 모용초慕容超의 자는 조명祖明으로 모용덕慕容德의 형인 북해왕北海王 모용납慕容納의 아들이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업鄴(전연前燕)을 물리치고 납을 광무태수廣武太守로 삼았으나 몇 년 뒤 관직에서 물러나 집을 장액張掖으로 옮겼다. 모용덕이 남정에 종군할 때 금도金刀를 남겨두고 떠났다. 모용수慕容垂가 산동에서 거병하고 부창苻昌이 모용납과 모용덕의 아들들을 잡아다 모두 죽였다. 납의 모친 공손씨公孫氏는 나이가 많아 사면받았고 납의 처 단..
전조前趙의 대산臺産 (전조前趙의 황제, 흉노족) 유요劉曜 때 재난과 이변이 너무 심해 공경에게 명하여 각기 박식하고 직언하는 인사 1인을 천거하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대사공大司空 유균劉均이 대산을 천거했다. 유요가 친히 동당東堂에 나가 중황문中黃門을 보내 대책을 묻게 했다. 대산이 그 연유를 두루 설명하자 유요가 살펴보더니 찬탄하여 친히 불러 대면하고 정사에 참여시켰다. 대산이 흐느껴 울며 재변의 화를 진술하고 정치와 교화의 부족한 부분을 언급하니 그 언사가 심히 간절했다. 이에 유요가 표정을 바꾸고 예를 차리더니 그를 박사좨주博士祭酒・간의대부諫議大夫・영태사령領太史令에 임명하였다. 이듬해 그 말의 징험이 드러나자 요는 그를 더욱 중용하여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명되었다. 한해에 세 번 승진하여 상서尙書・광..
오호십육국 가운데 후조(後趙)라는 나라가 있다. 흉노의 일파라고 하는 갈족(羯族) 출신 석륵(石勒)이 세운 나라로, 서진(西晉)을 멸망시킨 유총(劉聰)-유요(劉曜)의 전조(前趙)를 멸하고 일시 화북을 석권하였던 나라다. 건국 군주 석륵은 비록 이민족 출신이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나름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군주였다. 비록 그의 집권기 내내 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는 한족 문인들이 중국의 고전을 읽어주는 것을 즐겼다. 그가 죽은 후, 아들 석홍(石弘)이 즉위하였지만 모든 실권은 종제(친동생일지도 모르지만) 석호(石虎)의 손에 있었다. 이 석호라는 인간은 너무도 전쟁터를 전전한 탓인지 인간도륙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이런 삼촌이 버젓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상, 아버지가 황제라는 이유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