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기후 변화로 중국사를 읽다, 고금기후변천고古今氣候變遷考 본문
예년에 비해 덥지 않는 여름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다. 이러다 올해 쌀값이 대폭 오르진 않을까 걱정도 된다. 홍수와 산사태로 몸살을 앓고 있는 독일이나 일본, 중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여하튼 전 세계가 이상 기후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만은 틀림 없다. 전쟁, 질병만큼 바로 체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후의 변화는 인간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마치 악성 종양과 같이 퍼지기 전까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느끼는 순간 그 충격은 엄청나다. 그런 까닭에 역사를 공부하며 기후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중국사 분야에서 근자의 대작으로는 마크 엘빈의 “코끼리의 후퇴”가 있다. 그 선구적인 연구로서 추초칭의 고금기후변천고를 소개한다. 민국시대, 학문을 음미할 수 있는 좋은 글이다.
추초칭의 고금기후변천고(古今氣候變遷考)
동방학지(東方雜志), 1925, 22-3. 가운데 진(秦)~당(唐) 부분
진(秦)과 전한(前漢)대 기후는 계속 온화했다. 진의 여불위(呂不韋)가 편찬한 여씨춘추(呂氏春秋) 가운데, 임지편에는 적지 않은 기후 관련 자료가 있다. 청초(1660) 장표가 저술한 농단에는 여씨춘추에서 “동지 후 5순 7일 창포가 발육한다. 창포는 여러 풀 가운데서도 먼저 나오는 것(先生)이다. 지금 북방이 추워 동지 후 6․7순에도 창포가 발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장표의 이야기로 볼 때, 진대 봄은 청대에 비하여 3주가 빨랐다.
한무제 유철 시기(기원전140~기원전87), 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에서 당시 경제 작물의 지리분포를 이야기하며, “촉한 강릉의 천수귤, 진하의 천무칠, 제노의 천무상마, 위천의 천무죽”이라고 하였다. 귤, 칠, 대나무는 모두 아열대 식물인데, 당시 서식지로 귤은 강릉, 뽕나무는 제노, 대나무는 위천, 칠은 진하라고 한 것은 이 식물들이 현재의 북한계선이거나 혹은 그 이북에서 자랐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나라 식물분포도를 보면 사마천 때 아열대식물의 북한계선인 현재에 비해 북방임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10년 황하의 만곡부가 범람하자 하남 기원의 대나무를 잘라 망을 만들고 그 안에 돌을 넣어 황하의 터진 곳을 막았다. 이때 하남 기원 일대에 대나무가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동한 기원 초 중국의 기후는 급격히 추워졌다. 몇 차례 혹한의 겨울이 찾아왔고 국도 낙양은 늦은 봄까지도 서리와 눈이 내렸다.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으며 동사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동한 냉기의 시간은 매우 짧았다. 당시 천문학자이자 문인인 장형(78~139)이 쓴 남도부에는 “남양군(南陽郡) 양현(穰縣)의 귤[橙]과 등현(鄧縣)의 귤[穰橙鄧橘]”이란 구절이 있다. 하남성 남부에 감귤이 매우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조조(155~220)는 동작대에 귤을 심었으나 꽃만 피었을 뿐 열매를 맺지 못했다. 기후가 한무제 시대보다 추웠음을 알 수 있다. 조조의 아들인 조비는 225년 회하 광릉(현 회양)에서 10여 만 군사의 연습을 시찰했다. 너무 추워 회하의 물이 갑자기 얼어붙어 연습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회하가 얼었다는 최초의 기록으로 예전에 비해 추워졌음을 의미한다. 한랭한 기후는 계속되어 매년 음력 4월(양력 5월) 서리가 내렸고 4세기 전반 정점에 도달했다. 366년 발해만 창려에서 영구까지 3년 연속 얼음이 얼었고 그 위로 3~4천명의 군대가 건널 수 있었다. 서중서는 일찍이 한과 진의 기후가 서로 달랐다고 하였는데, 이때 연평균 기온은 대략 지금보다도 2~4도가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조시대(420~589)는 중국이 진령과 회화를 경계로 나뉘어 있던 시기이다. 남북간의, 그리고 북부 각 민족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아 다른 시대에 비하여 역사기록도 부족하다. 남조가 남경 복주산에 빙고[氷房]를 건설했다는 기사는 기후를 확인하는데 흥미로운 자료를 제공해 준다. 빙고는 주대 이래 각 왕조에서 건설되었다. 식품을 부패하지 않고 신선하게 보관하는데 사용하였다. 남조 이전 국도는 모두 화북 황하 유역이었다. 겨울철 빙고를 지어 얼음을 저장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남조의 도성은 건업(현 남경)이다. 남경 복주산의 빙고도 매년 얼음을 저장했을 터 정황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얼음을 가져온 곳이 어디냐 라는 것이다. 당시 황하와 회수 일대는 모두 적의 영토로 얼음을 가져올 수 없었다. 만일 남경의 연간 기온이 오늘날과 같다면 남경부근의 하천이나 호수의 결빙기간이 매우 짧기 때문에 얼음이 충분히 두껍지 않아 저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06~1961년 남경의 정월 평균기온은 2.3℃로 1930년, 1933년, 1955년 3년간만 영하였다. 따라서 남북조시대 복주산에 빙고를 지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남경의 이때 겨울은 오늘날에 비해 2도 이상 추웠을 것이다. 연평균 기온도 현재보다 1도 낮았을 것이다.
대략 533~544년, 북조의 가사협(賈思勰)은 6세기대의 농업백과전서라고 할 수 있는 제민요술(齊民要術)을 저술했다. 여기에는 당시 이 지역의 기후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곡식은 익는 시기, 심는 깊이, 수확량이 각기 다르다. ...일기가 순조롭고 땅의 이로움을 헤아리면 힘을 적게 들이고도 크게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때에 맞게 바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노력을 하고도 수확이 없다.” 이 책은 육조이전 중국농업의 죄신 지식을 대표한다. 근래 중국 농업가,와 일본 학자는 모두 이 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책에 따르면 음력3월(양력 4월 중순) 살구꽃이 만발한다. 음력4월 초순(약 양력 5월 초순) 대추나무에 새잎이 돋아나고 뽕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린다. 현재 황하유역과 비교해 보면 6세기 살구꽃의 개화와 대추나무의 새순은 2~4주 정도 늦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북경의 기후와 대략 같다. 석류나무 재배 기사에는 “10월 중 줄기를 안으로 덮어주지 않으면 동사한다. 2월 초 걷어준다.” 현재 하남 또는 산동에서 석류나무는 실외에서 성장하며 겨울에도 덮어줄 필요가 없다. 이는 6세기 상반기 하남, 산동 일대의 기후가 오늘날에 비하여 추웠음을 보여준다.
6세기 말부터 10세기 초는 수당 통일시대이다. 중국 기후는 7세기 중기이후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650년, 669년, 678년 겨울 국도 장안에 눈이 내리지 않고 얼음도 얼지 않았다. 8세기 초 매화가 황궁에 자랐다. 당 현종 이융기 때(712~756) 비 강채평은 거처에 매화를 가득 심었다. 9세기 초기 서안 남교의 곡강지에도 매화를 심었다. 시인 원진(779~831)은 화락천추제곡강 시에서 곡강의 매화를 언급하였다. 당대 대시인 두보(712~770)는 병귤시에 이융기가 봉래전에 귤을 심었다고 하였다. 단성식(?~863)은 유양잡조 권18에서 천보10년(751) 가을 궁 안에 8그루의 귤나무에서 150과가 열렸는데, 그 맛이 강남 촉도에서 진공하는 감귤과 같았다고 하였다. 개원 말년 강릉에서 감귤을 진상하자 이융기(현종)가 봉래궁에 심어 천보10년 9월 열매가 열려 재신들에게 150여과를 선사했다고 한다. 무종 이전 재위 시(841~847) 궁중에 다시 감귤을 심었다. 첫 번째 심었을 때, 무종은 태감을 불러 대신마다 3개씩 나눠주도록 하였다. 8세기 초기부터 9세기 중기까지 장안에서도 감귤이 열렸다. 주목할 것은 감귤은 생육 최저온도는 영하 8℃이며 매실은 영하14℃라는 것이다. 1931년부터 1950년까지 서안의 연 최저온도는 매년 영하 8℃ 이하였으며, 20년간 3년(1936, 1947, 1948)은 -14℃까지 떨어졌다. 매화가 장안에서 생장이 좋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니 감귤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당이 멸망한 후, 중국은 오대십국시대(907-9610)로 들어섰다. (하략)
이 글의 저자 추초칭(竺可楨, 1890~1974)은 저장성 샤오싱(紹興) 사람으로 과학자이다. 1905년 푸단공학(復旦公學) 중학부, 당산로광학당(唐山路礦學堂) 예과 토목공정계를 거쳐 1913년 미국 일리노이 대학 농학부를 졸업했다. 1918년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국립무창고등사범학교(오늘날의 무한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국립동남대학 교수, 상무인서관 편집인, 남개대학 교수, 중앙연구원 기상연구소 소장, 국립절강대학 교장 등을 역임했다. 1945년 장카이섹(蔣介石)으로부터 98명의 최우수교수당원 중 한명으로 선발되었고, 1948년에는 중앙연구원 원사로 초빙받았다. 1949년 장카이섹은 타이완으로 달아나며 아들 장징궈(蔣經國)를 상하이로 보내 그를 불러들였지만 거절당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국과학원 부원장이 되어 중국과학원 지리연구소를 설립했다. 1955년 중국과학원 원사가 되었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예전 경력 때문에 노심초사했지만 다행히도 잘 빗겨갔다. 1974년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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