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당, 이주(하미)를 상실하다. 본문
이주는 오늘날의 하미이다. 태종 때 이오의 호인이 귀부하자 서이주를 설치했다.(630) 처음에는 기미주로 운영하다가 이주로 이름을 바꾸고 직할 주로 편재했다. 돈황 발견 천계원년 사주이주지지(沙州伊州地志)에 “보응연간(762~763) 토번에 함락되었다. 대중4년(860) 장의조가 수복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보응 원년 하서 제주는 여전히 건재했다. 아래 기록은 이주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
원광정은 하서 수장이다. 천보말년 이주자사가 되었다. 안록산의 난으로 서북변경의 수비병이 반란 진압에 투입되면서 하서, 농우의 군읍이 모두 토번에 함락되었다. 오직 광정 만이 수년간 이주를 지켰다. 외부로부터 구원이 당도하지 않자 오랑캐는 여러 가지를 내밀며 꾀어냈지만 그는 끝내 굽히지 않았고 부하들도 뜻을 같이 하였다. 화살과 돌이 다하고 양식마저 떨어져 결국 성은 함락되었다. 광정은 손수 그 처자를 죽이고 자신은 분사하였다. 조정이 이를 듣고 공부상서에 추증했다.
袁光庭者, 河西戍將, 天寶末爲伊州刺史. 祿山之亂, 西北邊戍兵入赴難, 河・隴郡邑, 皆爲吐蕃所拔, 唯光庭守伊州累年, 外救不至, 虜百端誘說, 終不之屈, 部下如一. 及矢石既盡, 糧儲並竭, 城將陷沒, 光庭手殺其妻子, 自焚而死. 朝廷聞之, 贈工部尙書. (舊唐書 卷187下 忠義下 袁光庭, p.4904.)
자치통감 건중2년(781) 7월 “병자 고이주자사 원광정을 공부상서로 추증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건중2년은 한동안 단절되었던 북정, 안서와 당 조정이 연락을 재개한 해로, 위 기사는 원광정의 사망 시점이 아니라 조정이 소식을 접한 시점으로 보아야 한다. 진국찬은 영태3년(766) 경으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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