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환채구비(煥彩溝碑)_한, 당의 공적비가 하나의 바위에 본문

중국 이야기

환채구비(煥彩溝碑)_한, 당의 공적비가 하나의 바위에

자불어 2021. 5. 30. 15:53
728x90

모난 돌이 정 맞듯이 사람들에게 스케치북처럼 보이는 돌도 있다. 울산 천전리 암각화는 누가 봐도 스케치북이나 광고판처럼 보인다. 저 멀리 서역에도 그런 바위가 있었나 보다. 사람들이 오래 산 터전은 다 이유가 있듯, 새기는 데도 다 이유가 있다. 환채구비가 있는 길은 사막 오아시스와 초원지대를 연결하는 통로로, 사막 오아시스는 여기를 통해 목재를 수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640년 고창국 원정 직전 당의 장수 강행본(姜行本)도 이 길로 나무를 가져와 투석기를 만들었다. 이하 설명은 마옹(馬雍)의 글을 옮긴다. 사진은 바이두에서 다운 받은 것인데, 글자는 못읽더라도 한번 가보고 싶다.

 

동한 영화5년(140) 환채구비(煥彩溝碑), 옛 사남후비(沙南侯碑)

 

환채구(또는 환차이거우)는 하미(哈密)에서 바리쿤(巴里坤)으로 가는 협곡에 있다. 협곡의 본래 명칭은 관재구(官材溝)였으나 후일 사람들이 명칭이 불길하다며 발음이 비슷한 환채구로 바꾸었다. 하미 오아시스 북쪽 60km 지점에서 평탄한 사막을 관통, 협곡으로 들어가면 얼마 안가 길 동편 경사로 상에 이 비가 있다. 비는 커다란 자연석으로 인공이 가미되지 않았다. 만두 같은 모양새로 옆으로 누워 있다. 높이는 2m가 못되고, 남북 길이 3m 남짓, 동서 길이 1m 남짓으로 길과 서쪽면이 접한다. 청대 사람이 큰 글씨로 “환채구”라고 써놓아 마치 표지처럼 보인다. 남면(하미 방면)에 예서(隸書) 비문이 있다. 비석 표면이 심하게 풍화되어 얼룩덜룩하며 고르지 않다. 글자 대부분은 흔적만 남아 글자 뿐 아니라 행 자수도 파악이 어렵다. 단, 우단 제11행 11자는 판독이 가능한데, “唯永和五年六月十二日(영화오년육월십이일)”이다. 그리고 제2행에 “沙海(사해)” 두 글자가 보이는데, 특히 ‘海(해)’자는 확연하다. 나머지는 알 수 없다. 과거 왕수남(王樹枏)은 ‘海’를 ‘南(남)’으로 잘못 보아 ‘사남후비’라고 명명하였다. ‘侯’ 자는 애매하여 단언할 수 없다. 왕씨의 잘못은 이미 동료 이정(李征)이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사남후는 잘못 이해한 것으로 사해는 ‘沙漠瀚海(사막한해)’를 가리키는 말로 작위의 명칭과는 관계없다. 이 비는 후한 순제(順帝) 영화4년 6월 배잠비(裵岑碑)에 비해 3년이 늦다. 관련 기록을 찾아보면 이해 5월 남흉노 좌부 구룡왕(句龍王)등이 반란을 일으켜 선우 휴리(休利)가 흉노중랑장(匈奴中郎將) 진구(陳龜)에게 핍박받고 자살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서하(西河) 미직(美稷) 일대에서 발생한 일로 서역과 요원하여 무관할 듯싶다. 이 비의 상세한 일월은 문헌자료로는 안타깝게도 고증하기 어렵다. 비 북면(산 정상 쪽)에도 글자가 있다. 그러나 마모되어 알 수 없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이 비 서면(환채구 3자가 있는 면) 좌단에 해서 각문이 확인된다. 끝의 1행 꼭대기 부분에는 2자가 있는데, 그 윤곽의 흔적을 보면 흡사 ‘貞觀(정관)’으로 보인다. 그 아래 ‘十四年六月’ 5자는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앞의 행, 몇 글자 아래쪽 부분에 “唐姜行本(당강행본)”이 보인다. ‘唐’자는 매우 확실하며 ‘姜’자도 어렵지 않게 판독할 수 있으나 ‘行本’은 모호하다. 현재 환채구 글자 주위로도 자획이 확인 되나 이미 청대부터도 판독이 안되었기에 환채구란 글씨를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馬雍, 新疆巴里坤哈密漢唐石刻叢考, 出土文獻硏究(文化部文物局古文獻硏究室編), 文物出版社, 1985.6. pp.200~202에서 발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