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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국권을 피탈당할 때 제일의 부자는 왕실이었다. 왕실은 역둔토며 전국의 산림수택을 소유했다. 군함 하나 사는 데도 낑낑거렸던 대한국이었지만 이권이 있는 곳에는 황실이 있었다. 바다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족 또는 왕족 가운데 어장 소유자로 제일 유명한 사람은 조선의 의화군, 대한제국의 의친왕, 일제강점기의 이강공, 즉 이강李堈이다.고종, 바다가 자기 것이라며 왕자에게 주다통영군 연해에서 고기잡이하는 어민 3,268명은 연명하여 이영재, 옥치기, 이주목, 김종혁, 황치종 등을 대표자로 해서 이강공 전하 소유의 어장(漁區)개방 청원을 총독부와 이강공저(李堈公邸)에 제출하였는데, 그 일에 대해 혹 이강공저 사무관 구로자키(黒崎) 이강공저李堈公邸 사무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강공 저하 소유..
국권 피탈, 즉 경술국치 다음날(1910.8.30.), 황성皇城엔 더 이상 황제皇帝가 없기에 황성신문皇城新聞은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이름을 바꿨다. 제호 사이로 여전히 태극기는 펄럭이지만 귀퉁이 날짜는 융희隆熙4년 대신 명치明治39년으로 바뀌었다. 흥미로운 것은 제호 아래 첫 기사는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이다. 조선 귀족들의 현실적인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것이 급선무였던 모양이다. 다음 2면에는 순종純宗의 조칙과 칙유, ‘일한합병조약문日韓合倂條約文’ 그리고 메이지 천황의 조서와 한(대한제국)황실 대우 조서가 실려 있다. 순종의 조서나 칙유, 조약문은 일본이 간여해 작성한 것일 터, 메이지 천황의 조서를 옮겨본다. 짐이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여 제국의 안전을 장래에 보장할 필요를 생각하며 또한 평상시 한국..
'대한제국'은 성공한 역사 마케팅 중 하나다. 실체에 접근하기보다는 격동의 근대에 우리가 좀 잘했으면 하는 심리에 (일본만 아니었으면) "잘했어", 또는 (계속 존속했더라면) "잘했을 거야"라는 애정이 더해져 매스미디어에는 곧잘 고종과 명성황후(민비)가 우국의 아이콘으로 등장한다. '드라마나 소설을 역사로 보지 말아야' 하는 건 당연지사고 또 두 부부에게서 나라 살릴 마음이 없었다고 단언하기 어려우나 신하와 백성들은 나라를 살리겠다고 목숨을 내던지는 판에 일본 황실의 일원이 되어 호의호식하거나 정권욕에 불타 일가친척을 요지에 앉히고 미신에 휘둘려 국정을 농단했다는 점에 지나친 미화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각설하고, 조선이 독립을 선언하고 제국으로 국체를 바꾸고 국호도 바꾼 1897년 이후를 대한제국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