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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일기를 읽다가 경술국치 전 며칠간을 살펴봤다. 온갖 야설에는 황제의 뜻이 아니었다는 둥의 이야기가 있지만, 나라의 멸망 앞에서 고종과 순종은 무사태평했다. 데라우치조차도 한 나라의 몰락에 "아아"라 했으나, 두 명의 암군은 평온 무사하게 자기 나라의 멸망을 지켜봤다. 또한 이완용 등 악질 친일파가 끝까지 협상에서 놓치 않았던 것은 국호와 "왕호"였다. 즉 이 병합의 주역들은 나라에는 역적이었지만 황실에겐 충신이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내내 이왕가가 친일파들과 함께 쿵짝쿵짝했던 까닭을 보여준다. 이들 덕분에 황실 가족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 황실에 편입되어 왕공족으로 호의호식할 수 있었다. 고종이 독립운동을 했다거나, 또 순종이 불쌍하다고 생각한다면 일독을 권한다. (1910년 8월) 1..

이왕직李王職에 새로 생긴 주전과장主殿課長 박주빈朴冑彬 씨 이왕직에 장시사掌侍司가 없어지며 그 대신 주전과라는 것이 생겼다. 주전과는 그동안 장시사에서 맡아서 하던 내전 제반 사무를 맡아 보게 되었으니 새로히 과장이 된 분은 이왕가에 20여 년간 봉사하던 박주빈씨다. 47세에 비로소 과장이라니 기쁘기보다는 부끄럽소 하는 박과장의 낯에는 그래도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실렸다. [사진은 20일 낮, 새 과장석에 앉은 박씨] (매일신보 1928.8.21.)대한제국 관원이력은 다음과 같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DB 참조) 본관 고령 생년월일 1882년 1월 7일 현주소 충청남도 홍주군 얼방면 효천리 학력 1888년 한문사숙漢文私塾 입학 1900년 한문漢文 휴학 1903년 3월 경성학당京城學堂 입..

#역사왜곡 #세종시 시리즈최근 세종시는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 학술행사회를 개최했다. 이 학술행사의 주요 요지 가운데 하나는 세종시에 거주했던 김재식의 독립운동 활동을 규명하는 것이며, 여기에 더해 세종시가 추진하고 있는 "독립운동 근거지, 세종"을 주제로 사적지를 조성해 보겠다는 목적도 겸하고 있다. 이 행사에서는 세종특별자치시 최민호 시장이 개회사를 하고, 더불어 국가보훈부 이희완 차관, 광복회 이종찬 회장이 축사를 했다. 이번 행사는 당연히 국민의 세금으로 진행되었고, 향후 사적지 조성 사업까지 함께 한다면 더 많은 세금이 투입될 터다. 일제의 강점에서 일신을 다 바쳐 노력한 독립운동에는 존경을 표해야 한다. 그런 만큼 독립운동 서훈 지정 여부는 엄격해야 한다. 독립운동..

#역사왜곡 #세종시 시리즈요즘 지방자치단체를 보면, 동네 역사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지난 정부의 가야사 지원 방침엔 경주를 제외한 삼남이 모두 가야라고 외쳤고, 또 어떤 곳에서는 불과 몇 년 유지되었던 후백제를 기념하겠다며 고답적인 학술행사를 연달아 개최했다. 하지만 그런 행사, 기껏 예산 투입해서 해봐야 오히려 근본 없는 동네 밑천 드러내는 꼴일 뿐이다. 여기에 더해 사적지 조성해봐야 그 누구 찾아오지 않는 장소가 될 것이다. 어느 지역 어디나 사람의 숨결이 있었던 곳이고, 또 이야기도 풍성할 텐데, 이야기를 찾아낼 능력이 없으니 국가체(정치집단의 중심지)나 독립운동과 같은 기존 흐름에 얹어내려 하다 이 꼴을 못 면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세종시다. "독립운동 이력"은 존경의 대상이다. 따라서 검..

윤자형은 “대한제국기 때, 선전관 등을 역임하다가 을사조약 이후 의병투쟁을 전개하였고, 원각교를 창시해 민족의식을 고취한 무신 · 의병장 · 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의 사적은 내내 알려져 있지 않다가 1988년 성신여자대학교 이현희 교수에 의해 발굴되었다. 자료는 칙서와 칙명 2건인데, 칙서는 잘 보이지 않아 패스하고 칙명을 읽어보았다. 윤자형 칙명의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勅命 칙명 正二品嘉義大夫尹滋亨 정이품 가의대부 윤자형 爲義兵大將兼湖南三道 위 의병대장 겸 호남삼도 陸軍大都督者 육군대도독자 開國五百十七年七月十日 개국오백십칠년 칠월 십일 (勅命之寶) (칙명지보 날인) 이 자료를 보고 몇 가지 의문이 들어 부기한다. 1. 가의대부는 문산계 정2품이 아니라 ..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하던 서화가들의 작품공모전이었다.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1922년 시작되어 1944년까지 이어졌다. 일본의 관전과 달리 서예부가 있었다.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등용문 같은 역할을 했다. 이 대회는 심사위원 다수가 일본의 관전 출신으로 일본 미술이 조선 미술에 영향을 끼치는 장치가 되었다. 그러나 수상자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재조선 일본인이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따라서 결과론적으로는 조선인 작가들이 일본 미술의 영향에 물들게 했지만, 실은 제전의 더 큰 목적은 민족(조선인과 일본인)이 아니라 지역(식민지와 본국)의 균질성에 있다고 생각한다.매일신보 1924년 5월 25일자에는 제3회 선전을 준비하며 작품을 옮기는 사진이 있..

얼마 전 의친왕의 한 후손이 의친왕의 독립활동을 열거하며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의친왕이 도산 안창호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해 스티븐슨 암살 사건을 지시" 그리고 대한제국 고종의 후손 단체 홈페이지에는 의친왕이 1902년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해 도산 안창호를 만나 “미국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써달라”며 금일봉을 전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야기가 인터넷을 타고 여과 없이 전파되면서 진짜 사실인냥 돌아다니고 있다. 그래서 이를 검증해 보고자 한다. 공립협회를 의친왕이 설립했다고? 공립협회는 190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이 결성한 민족운동 단체다. 하와이에 정착했던 교민 다수가 이 무렵 미국 본토로 생활 터전을 옮기고 있었다. 이에 1904년 로스..

상해망명 기도 사건 한 건으로 의화군義和君,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공 이강은 일약 황실의 독립운동가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실제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다. 그는 국권이 피탈된 뒤 일본 정부로부터 가장 많은 은사금(83만원)을 받았다. 또한 증빙할 수 있는 유일한 독립운동, 상해망명 기도 역시 첩을 데리고 가겠다는 둥, 돈은 준비되었냐는 둥 하며 시간을 끌어 결국 붙잡히는데 기여했다. (잡히고 나서 꼬리자르기 했던 일은 아버지 고종과 꼭 닮았다.) 어떤 이들은 "독립운동 특성 상 증거가 남지 않아" 그렇다고 주장하지만 직간접적 친일행적이나 주색에 매몰된 방탕한 생활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 불리한 자료는 조작이나 못믿을 이야기라며 눈을 돌리고 증거를 제시하면 식민사관 운운하며 프레임에 ..

충신 조정구, 순종 황제의 유언을 전하다 1926년 4월 25일 대한제국 황제를 하다가 일본에게 나라를 내준 순종 황제가 사망했다. 몇 달 뒤인 1926년 7월 8일 미국의 한국어 신문 신한민보에는 순종의 유조가 올라왔다. 이 유조는 전 궁내부 대신인 조정구趙鼎九(1860~1926)가 받아 전한 것이라 한다. 조정구는 대한제국 시대 고관을 역임하여 국권 피탈 후 일제는 그에게 남작 작위를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넙죽 받은 덕수궁 이태왕 이하 그 가족과는 달랐다.) 그는 승려로 입적하는 등 평생 피해 살았으며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에도 참여했다.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다 순종이 죽기 1달 전, 신문이 발생되기 3개월 여 전인 1926년 3월 30일에 사망했다. 따라서 유조의 진위는 검증을 요한다. 여하튼..

대구 달성공원 앞, 이른바 "순종황제어가길"에는 순종 황제 동상이 있다. 순종 황제를 존경해서가 아니라 일제에게 국권을 내주기 직전인 1909년 나라 남쪽을 한 바퀴 돌며(남순南巡이라고 부른다.)이곳에 방문한 것을 기념해 대구광역시 중구청이 2017년 7억원을 투입해 세운 것이다. 보통 동상하면 세종대왕, 이순신 등 존경받을 인물을 세우는데, 순종이라니... 게다가 십분 양보해 순종의 남순을 기념해 세웠다고 하지만 순종이 대구에 머문건 채 하루(24시간)도 안된다. 그런 까닭에 동상 만들 때부터 논란이 많았다. 대구광역시 중구청은 2024년 4월 19일 다시 4억원을 들여 이 동상을 철거하고 도로로 변경(원상복구)하기로 했다. 어쨌든 썼다 지웠다 쓴 편지도 아니고, 이 괴랄할 사업에 11억원을 투입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