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스타인의 투루판 아스타나 무덤 발굴 기록 1. 본문
이하는 헝가리계 영국인 탐험가 아우렐 스타인(Sir Marc Aurel Stein, 1862~1943)의 투루판 아스타나 고대무덤 발굴 기록으로 그의 저서 Innermost Asia(Oxford, 1928)에 수록되어 있다.
14장 아스타나 고대 무덤
1. 7세기 무덤(그룹i)
무덤의 위치
1월 18일, 프레스코 벽화를 떼어내는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는 나익 삼수딘(Naik Shamsuddin)을 남겨두고나는 캠프(camp)를 무르툭(Murtuk)에서 카라호자의 베이스(base)로 옮겼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고대 고창의 무덤 탐사를 시작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이 작품을 투르판 지구에 머무는 후반부를 위해 남겨두었는데, 이런 종류의 고고학적 탐사가 다수 중국인이 거주하는 인구 밀집 오아시스 인근에서 수행될 때 우루무치(신장 정부)가 내 작업 전반에 대한 방해 구실로 재론하기 쉽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앞선 탐사에서 코시-굼바즈(Kosh-gumbaz) 일대에 무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무덤 대부분은 모레인 지대(빙하 자갈 지대)에 소규모 그룹으로 발견되며, 최근에 개방되어 조사한 성읍 마을인 베다울랏 마을(Bédaulat's town)로부터 북동쪽 1마일 거리에 있다.(도판 321) 이와 별도로 고대 무덤으로 뒤덮인 넓은 지역이 이디쿠트-샤흐리(Idikut-shahri)의 서북쪽에서 2.5마일 떨어진 아스타나 마을(the village of Astàna) 북쪽 사이(Sai)에 있다. 여기는 또한 지난 5년, 또는 그 이상 다치바나씨(橘瑞超, 오타니탐험대)와 가장 열심히였다는 아흐마드 물라 폭동의 희생자 무하마드 '지사(Jisa)'를 비롯한 지역 골동품 업자에 의해 많은 무덤이 파헤쳐지고 고물들이 수습되었다. 그럼에도 지속적인 작업과 광활한 무덤 면적은 체계적인 작업 하에서 의미있는 결실을 거둘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남아있다는 희망을 주기 충분했다.
아스타나 무덤의 분포
도면(Pl.31)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지역은 최대 폭 약 4분의 3마일로 동서로 거의 1.5마일 뻗어 있다. 카라호자 천에서 물을 대는 수로 북쪽까지 연결되어 있다. 카라호자천은 아스타나 농업의 서단에 물을 공급하며 눈에 띄는 타이잔(Taizan) 폐허 주변에 모여있는 약 300~400야드의 주거지구를 관통한다. 이 지역의 동쪽 끝은 카라호자 북쪽 끝에서 4분의 3마일 이내에 있다. 셍김-아기즈(Sengim-aghiz)에서 시작해 가는 관목으로 뒤덮인 모래밭 벨트로 경계가 나뉘는 얕은 범람원이 서쪽 경계로 그 너머로는 몇 기의 무덤만 흩어져 있다. 넓은 지역의 매장 장소는 도면이 보여주듯 매우 불규칙하다. 각기 열을 이룬 여리 기의 무덤을 포함한 사각의 경계는 동남쪽 지역에 함께 붙어있다. 더 북쪽에는 개별 무덤의 위치를 나타내는 작은 봉분이 제각기 또는 작은 그룹으로 무질서하게 널리 흩어져 있다.
무덤의 구획
이 지역에 대한 첫 조사는 내가 1907년 돈황 오아시스 서남쪽 교외, 그리고 난후에 도착하기 전에 내가 가로질러 갔던 자갈밭 사이(Sai)에서 봤던 무덤과 매우 흡사한 형태였던 까닭에 무덤이라는 것 바로 알 수 있었다. 또한 그곳에는 마치 사각형 코트 같이 지표면에서 고작 몇 피트 높이로 자갈을 쌓아올려 구획한 낮은 담장이 있었다. 이 구획은 한결 같이 한쪽에 입구를 두었다. 이 입구는 어쨌든 둔황과 난후에서 처럼 문을 상징하는 짧은 담으로 표현하진 않았다. 자갈 더미로 많든 라인은 거의 그 면 중간 부분을 끊어 (입구를 내고 입구의) 양쪽 끝 부분은 구획 면적에 따라 다소간 바깥 쪽으로 짧게 꺽어 놓았다. 면적도 다양해서 큰 것은 150평방야드 부터 작은 것은 10평방야드다. 구획(의 평면)은 모두 사각형으로 대개는 직사각형이다. 각 구획의 넓이와 그 안 무덤의 수 사이에는 어떤 비율도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구획의) 방향은 있었지만 입구는 고정된 좌향이 없었던 듯하다.
앞서 약탈된 무덤
두 주 동안 우리를 바쁘게 했던 이 거대한 아스타나 묘지의 작업 결과를 서술하기에 앞서 지역 정보와 육안 관찰로 내가 작업에 착수하기 전, 이 무덤이 황폐해지기까지 비교적 최근까지의 이력을 간단히 기술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무덤으로 접근하는 통로가 모두는 아니어도 대부분은 한 번, 또는 그 이상 귀중품이나 골동품이 있는지 여러 찾아보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원래는 무덤 안에 매장한 뒤 그 위를 덮었다가 그 뒤로 이 좁은 트렌치를 덮고 열을 지어 있는 자갈과 돌 담 라인을 대신하여 외관은 밭고랑 같이 패어 있어 때로 눈에 잘 띄고 더러는 확연한 표식이 되었다. 거기에는 봄과 가을로 투루판 지역을 휩쓰는 강한 북서풍이 실어 나른 미세한 모래는 발굴현장, 또는 대피소 같은 곳에 빠르게 쌓였다. 통로 벽에 단단한 지반이 노출된 곳은 최근에 발굴이 진행된 곳이 분명했다. 아스타나와 카라호자의 지역 이야기는 비공식적으로 모든 무덤 또는 적어도 대부분은 마지막 무슬림 봉기(Muhammadan rising)와 야쿱 벡(Yâqûb Beg) 통치시기에 망자와 함께 둔 귀중품을 찾느랴 약탈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곧 우리의 조사에서 볼 수 있듯 단단한 오래된 관은 매우 유용한 부산물로 각광받았다. 이는 도굴 시 비록 귀금속으로 충분한 이윤을 남기지 못했다고 해도 그들의 노동 댓가를 충분히 보상해 주었던 듯하다. 오아시스에서 나무는 매우 귀해서 소똥 처럼 연료는 매우 비싸게 팔렸기 때문이다.
최근 지역 주민들에 의한 파괴
마을 주민들은 무덤 도굴 행위를 폭력적인 둥간의 탓으로 돌린다. 이는 최근 체제 전복을 가져온 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 투루판 오아시스에 정착한 수 많은 중국인 상인과 농민의 감정을 고려할 때, 이 지역 중국인이 망자의 안식을 방해하는 공공연한 소한 행위를 효과적으로 제어했을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무하마단 반란(Muhammadan rebellion)이란 골치아픈 시기에 공공연하게 혹은 나중에 그들의 위대한 신념에 평화와 질서가 중국인 치하에서 재정립되었을 때 몰래 이웃 마을의 순박한 원주민 '산토스(Chantos)'가 무덤 훼손에서 자신들의 몫을 챙기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아스타나의 친절한 다로그하(Darôgha: 지역 보안 책임자)가 내게 가이드로 첫 번째 발굴인부와 함께 보낸 이 지역 무덤 전문가 마시크(Mashik)가 여기에 결정적인 진술을 해줬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명민한 사람을 책임자로 고용하게 되어 기뻤다. 그는 이 섬뜩한 사업 분야에서 오랫동안 훈련하여 망자의 거처나 그들의 복장과 간련된 모든 것에 이상하리만큼 친숙했고 또 최근 어느 무덤이 도굴되었고 또 어느 무덤이 퉁간의 무식한 파괴행위로부터 오전한 상태로 남아있는지 놀랄만큼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무덤의 수가 매우 많아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중요했던 우리에게 그의 지식은 진실성만 보장된다면 가치가 충분했고 보상받을만 했다.
무덤 찾기 전문가 마시크
마시크는 20여 년 전 한창 때 죽은 그의 아버지에 이끌려 이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노인들이 퉁간 시대와 그 이후 몰래 밤에 도굴해야 했던 이야기를 기억했다. 마시크 자신은 지난 4, 5년간 100기가 넘는 무덤을 도굴했는 데 그때 중국정부도 이런 작업을 심각하게 제지하지 않았다. 이 시기 근대지향과 골동취미를 가진 중국인 지역관리(Mandarin)는 자신의 콜렉션을 위해 필사본이나 골동품을 확보하고자 그들을 격려했다. 마시크는 그가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무덤도 입구가 원래 쌓았던 벽돌 앞선 침입자에 의해 벽돌 일부가 손상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고 역설했던 점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실망스런 경험은 일체의 미신적 금기를 떨쳐버리고 죽은 카피르(Kâfirs: 이교도)의 유해가 남아있는 탐욕스런 퉁간마저도 찾지못했던 장소에서 정직한 마시크가 귀금속을 발견하는 자신의 호기심 어린 발견이 없었다면 탐험욕구가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아스타나 무덤 Ast. i
아스타나 무덤군에서 우리 작업은 1월 19일 자갈로 쌓은 담으로 구획되어 있지 않았으나 나란히 열을 지어 배치되어 북동쪽 경계 끝부분을 표시하는 분리된 일군으로 인식된 무덤들부터 시작했다. 그룹 Ast. i [도판32(Pl. 32) 참조] 무덤 상당수가 최근에 파헤쳐졌다고 한다. 그러나 가운데 열 다수는 피해갈 수 있었다. 우리는 6개의 무덤 모두를 차례로 열었다. 도판 32에서 볼 수 있듯 바닥으로부터 평균 3~4피트 폭의 트렌치를 파서 지표면에서 실제 아스타나의 다른 무덤들처럼 12에서 16피트까지 여러 깊이까지 도달했다. 그 끝에서 트렌치는 대략 3피트 너비에 고작 3~4피트 높이의 석재로 마감한 입구와 만났다. 여기서 1~2피트 아래로 내려가면 무덤방의 바닥에 도달한다. 이 입구는 본래 투박한 벽돌로 막아 놨으나 최초 침입자들은 기어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을 냈다. Ast. i 의 6개 무덤의 평면은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으로 가장 큰 것은 정사각형으로 가장 큰 것은 각면이 11피트였으며 가장 작은 것은 긴 면이 9와 1/2피트, 짧은 면이 6피트였다. 높이는 5~6피트까지 제각각이었다. 다른 곳의 무덤과 마찬가지로 벽은 다듬지 않은 채였으며 자갈층으로 이어진 진흙이 그대로 보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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