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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 1859~1916)는 1912년 1월 26일 각 성에 두 통의 전보를 보냈다. 청조의 공식 멸망일자는 2월 12일. 이날 진압군 사령관 돤치루이(단기서段祺瑞, 1865~1936)는 원세개가 시킨대로 황실에 공화정을 승인할 것을 요청했다. 중국 역사에서 전쟁으로 멸망하지 않은 왕조의 마지막 풍경은 대개 이런 식인듯. 그리고 권력이 넘어가는 순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치안"이다. 아래는 전보 내용이다. 종전의 정치체제가 수명을 다하고 혁명당이 정치를 개량하지 못하매 다수가 과격하게 행동하였다. 이에 지방은 안정을 찾지 못하여 각성 관리는 혁명당 사람을 잡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공화를 선포하니 이로 정당을 조직하고 건설하는 일체의 일이 시작될 터, 사후 각성 내 병무를 담당하..

침입자에게 화살을 날린다는 진시황의 무덤 이야기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아래 이야기는 그 연장선이다. 화살이 나오고, 이어서 로봇 같은 기계장치들이 나와 침입자를 칼로 내리 친다. 이 모든 장치를 뚫고 들어오면 결국 무덤이 무너져 침입자들과 함께 사라진다는 플롯, 어쩌면 중국은 인디아나 존스도 원조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유안(716~780)의 판관 이막은 고릉에 농장을 두었다. 그런데 농장의 소작인들이 소작료를 거른 지 5~6년이 되었다. 막은 파직도 당했겠다, 농장에 내려가 (이들의) 책임을 묻고자 했다. (그런데) 창고를 보니 차고 넘쳤으며 미처 다 나르지도 않은 상태였다. 막이 괴이하다 생각해 묻자 (소작인들이) 이렇게 이실직고하였다. “저희는 오랜 세월 도둑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주..

조린낭중석상부호접趙璘郎中席上賦蝴蝶 조린 낭중이 계신 자리에서 나비를 읊다 정곡鄭穀 尋豔複尋香 아름다움을 찾아 또 향기를 찾아 似閑還似忙 한가한 듯 바쁜 듯 暖煙沈蕙徑 아지랑이 피면 풀 속에 숨고 微雨宿花房 가랑비 내리면 꽃송이에 잠든다. 書幌輕隨夢 서재에서 가벼이 꿈을 쫒다 歌樓誤采妝 무대에선 예쁘게 단장하니 王孫深屬意 왕손이 남몰래 뜻을 두어 繡入舞衣裳 무희의 치맛자락에 수놓았구나. 전당시全唐詩 권674 시인 정곡鄭穀(849~911) 영주자사永州刺史 정사鄭史의 아들이다. 7세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887년(광계光啟3) 진사가 되었다. 이후 우습유, 도관낭중을 역임했으나 난세를 만나 험한 인생을 보냈다. 정곡은 허당許棠, 임도任濤 등 9인과 종종 시를 주고받아 당시 “방림십철芳林十哲”로 불렸다. 자고부..

“판관 포청천”은 타이완의 명작 드라마로 유명하다. 하지만 실제 관직은 판관이 아니라 개봉부윤, 요즘 우리로 따지면 서울특별시장이다. 당시에는 재판, 치안유지가 지방관의 중요 직무였던 만큼 판관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럼 칠협오의가 빠진 실제 포청천의 모습은 어땠을까. 송사는 원나라 때 몽골족이 책임을 맡아 편찬해 부실하다고 하나, 여하튼 송사 포증 열전을 읽어보자. 포증包拯(999~1062)은 자가 희인希仁으로 노주廬州 합비인合肥人이다. 진사進士로 시작하여 대리평사大理評事를 제수받았다. 외임으로 나가 건창현建昌縣 지현知縣에 임명되었지만 부모가 모두 연로하다는 이유로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후에) 화주和州 감세監稅가 되었으나 부모가 또 원치 않자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부모를 봉양했다. 몇 ..

21년 사탐 동아시아사 3번 문제로 죽간 조정서(趙正書)가 나왔습니다. 죽간(竹簡)은 ‘대나무에 쓴 글’이라는 뜻으로, 종이가 없던 시절 비단과 더불어 문자를 기록하는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얇은 대나무 가지를 다듬어 글을 쓰고 실로 엮어문서나 책을 만듭니다. 후한대 종이가 발명되고 널리 퍼지기 전까지 대부분의 책은 이 죽간이었습니다. 한자 ‘책(冊)’도 실은 죽간을 엮은 모양에서 기원했죠. 그러나 죽간은 오래 보관할 수 없었고 나중에 모두 종이책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최근 죽간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가 고고학 발굴로 땅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일단 문제에 죽간이 나오면, 전국시대, 진나라, 한나라, 삼국(오)나라, 네 시대 가운데 하나라고 유추하면 됩니다. 위의 문제는 이미 “중국 최초로 황제 칭호를 사용..

수능에 2년 연속, 그것도 1번 문제에 등장한 문화재! 하지만 두 번 모두 답이 아니었다는 건 안 비밀. 그럼 2022년 문제부터 볼까요? 정답은 상대 청동기 정(鼎: 솥 정) ②였지만 ⑤에 나오죠. 그럼 2021년 문제를 볼까요? 2021년에도 정답은 홍산문화 통모양 토기(중국국가박물관 소장) ③이었지만 ④에 보이죠. 이것은 화염형(일본어로 가엔가타) 또는 불꽃모양 토기라고 합니다. 일본 조몬시대 중기를 대표하는 토기이며,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2020년 도쿄 올림픽 성화대 디자인에도 사용했답니다. 조몬은 한자 '繩文'으로 새끼줄 문양이란 뜻입니다. 토기 표면에 새끼줄을 꼬아놓은 듯한 무늬가 있다고 해서 이것을 조몬토기라고 하고 이 토기가 사용되었던 시대를 조몬시대라고 합니..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실에는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 무덤에 부장했던 도용(인형)이 전시되어 있다. 여러 도용 가운데 요즘 미의 기준에 가장 충실한 얼굴형을 가진 것이 북위(北魏)의 것이다. 북위 도용은 모두 세 개로 하나는 갑옷을 입은 무사고, 다른 두 개는 문관이다. 문관은 각기 붉은색 도포와 백색 도포를 입었는데 유심히 살펴보면 서로 옷깃의 방향이 다르다. ‘서경(書經)’에 ‘좌임(左衽)한 사방의 오랑캐’라는 표현이 나온 이후 옷섶의 방향은 중국과 이민족을 나누는 지표가 되었다. 공자도 춘추시대의 관중(管仲)이 제나라의 환공(桓公)을 도와 이민족의 침입을 물리친 일을 두고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좌임을 했을 것’이라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옛 중국인에게 옷을 여미는 방식은 자신과 이민족을 구분하는 잣..

먼저 판교박물관 방문을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 개관일: 화요일~일요일 09:00~18:00 (17:30 입장 마감) -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국경일, 설/추선 연휴기간 *서울에서 오시는 분들은 남대문시장, 고속버스터미널에서 9007번 버스를 타시면 바로 앞(성내미육교/판교박물관 정류장)에 내릴 수 있습니다. http://www.pangyomuseum.go.kr/pg/main/index.do / 문의전화: 031-729-4535~7 판교박물관에는 과거 판교에 있던 백제와 고구려의 무덤이 있습니다. 두 나라의 무덤 형식인 돌방무덤의 특징을 잘 살펴 볼 수 있죠. 백제 때는 수도 한성 주변의 요충이었을 테고, 고구려가 한성을 점령한 이후로는 백제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 합니다. 고려..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미디어 파사드가 오늘(2.25.) 첫 선을 보였다. 광화문을 찾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될 것 같다. 그럼 맛보기 영상은 아래에,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자 허수아비 황제로 중종, 예종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전권을 행사했다. 이러다보니 당 종실 이씨들은 반감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들에게 잠재된 불안은 688년 명당 건립과 함께 폭발한다. 노왕魯王 영기靈夔(당 고조 이연의 19번째 아들)의 아들 범양왕范陽王 애藹가 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짐이 유폐되었으니 제왕들은 나를 도우라"라는 명령을 종실 일족의 여러 왕들에게 보냈다. 대부분은 잠수탔지만 태종의 손자 낭야왕琅邪王 충沖이 박주博州에서 거병했고 이어 충의 부친이자 태종의 다섯번째 아들인 월왕越王 정貞이 호응했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보낸 진압군에 한달도 못버티고 맥없이 무너지며 결국 둘 모두 동도 낙양의 궁전에 목이 걸렸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측천무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