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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자 허수아비 황제로 중종, 예종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전권을 행사했다. 이러다보니 당 종실 이씨들은 반감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들에게 잠재된 불안은 688년 명당 건립과 함께 폭발한다. 노왕魯王 영기靈夔(당 고조 이연의 19번째 아들)의 아들 범양왕范陽王 애藹가 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짐이 유폐되었으니 제왕들은 나를 도우라"라는 명령을 종실 일족의 여러 왕들에게 보냈다. 대부분은 잠수탔지만 태종의 손자 낭야왕琅邪王 충沖이 박주博州에서 거병했고 이어 충의 부친이자 태종의 다섯번째 아들인 월왕越王 정貞이 호응했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보낸 진압군에 한달도 못버티고 맥없이 무너지며 결국 둘 모두 동도 낙양의 궁전에 목이 걸렸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측천무후는..
다이안지는 쇼토쿠 태자가 아스카에 지은 구마고리쇼샤(熊凝精舎)에서 시작하여 헤이조쿄로 이전하며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나라칠대사 가운데 하나로 당시 사찰의 규모는 도다이지(東大寺), 고후쿠지(興福寺)에 버금갈 정도고 커서 “남대사(南大寺)”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1017년에는 두 개의 목탑이 모두 불타버렸고, 에도시대 중건 시도가 있었지만 옛 모습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오늘날 사찰의 바깥에는 칠층탑 기단터가 남아있어 지금보다는 훨씬 컸던 예전 사역을 짐작케 해준다. 사찰 내에는 나라시대의 유품으로 8세기 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 9개의 목조불과 기와 등을 갖고 있다. 사찰이 쇠퇴했는데도 여전시 창건 시대의 신앙물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그런데 목조불..
경남 해안가 몇 곳에는 왜란 때 일본 장수들이 쌓은 왜성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성과 없이 그 큰 전쟁을 끝낼 수 없었을 테고, 경상도 일부라도 점령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몇 년 전 왜성이 궁금해서 울산왜성을 찾았다. 그런데, 울산왜성 주차장으로 검색하니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아 인터넷에서 이리 저리 찾아보니 울산하면 떠오르는 지명, 학성공원이 울산왜성이었다. 성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전망이 좋고 태화강이 바다와 만나는 길목에 있어 이곳에 성을 지은 까닭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산등성이 중간 중간에 위치한 평지에는 각기 삼지환(三之丸), 이지환(二之丸), 본환(本丸) 팻말이 있다. 산노마루, 니노마루, 혼마루를 우리식 한자로 표현한 것이 약간 어색했지만, 그것은 선택의 문제..
사숙방(謝叔方)은 옹주(雍州) 만년인(萬年人)이다. 처음에 소랄왕(巢剌王) 이원길(李元吉)을 따라 토벌에 참전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원길이 굴질직부좌군기(屈咥直府左軍騎)에 임명했다. 태종(太宗)이 은태자(隱太子: 이건성)와 원길을 현무문(玄武門)에서 처단하자 숙방(叔方)이 부병(府兵)을 이끌고 풍립(馮立)과 함께 북궐(北闕) 아래서 맞서 싸워 경군홍(敬君弘)과 여세형(呂世衡)을 죽였다. 태종의 군대가 주춤하자 진부호군위(秦府護軍尉) 지경덕(遲敬德: 울지경덕)이 원길의 머리를 가져와 보여주자 숙방(叔方)이 말에서 내려 곡하고 달아났다. 이튿날 나와서 자수하자 태종은 ‘의사(義士)로다!’라며 풀어주라 명했다. 서·이 이주자사(西·伊二州刺史)로 일하며 변진(邊鎭)을 잘 다스려 호융(胡戎)이 사랑하고 공경하..
순창군이 군내 용궐산에 명필거리를 만들겠다며 여기 저기서 집자해서 바위에 드릴로 새기고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고사성어길이라는 것도 어불성설이며, "요즘 세대가 선현들을 잊고 있어 안타까워"라는 발상도 우습기 짝이 없다. 어디 요즘 세대를 함부로 진단하며, 그 자신들은 얼마나 선현들을 기억하고 있는지, 여기 참여한 공무원, 군의회 의원, 수주한 회사 직원들까지 모아다 시험이라도 쳐보고 싶은 심정이다. 모자이크 속 담당 공무원은 말한다. "한석봉 선생에 글씨 한 점을 구경해본 사람이 없어요. 여기에 그 글씨가 있구나라고 해서 우리나라 선인들도 알리고" 아무렴 산에 간 사람들이 그 글씨보러 산에 갈까? 그리고 진본성도 없는 그 글씨보고 감화를 느낄 수 있을까? 뉴스에 언듯 언듯 새겨 놓은 글자가 보이는데,..
3. 끝내 열리지 못한 행사 즉위 40주년 기념식 10월 18일을 얼마 앞두지 않은 10월 4일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고종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장예원 경 서리(掌禮院卿署理) 이용선(李容善)이 아뢰기를, "왕위에 오른 40돌 경축 의식을 음력 계묘년(1903) 4월 4일로 날을 받아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승정원일기는 조금 더 자세하다. 의정부 의정 윤용선이 삼가 말씀드립니다. 어극 40년 칭경예식을 이듬해 좋은 날로 잡아 거행하도록 조서를 내리심이 어떠하십니까. 장예원에 명하여 다시 날짜를 선정해 거행하겠다는 뜻을 전하겠사옵니다. 상주한 대로 하라. 장예원경 서리, 장예원 소경 이용선이 상주합니다. 의정부 주본에 의거하여 어극 40년 칭경예식을 다시 날자를 선..
2. 잔치에 진심인 고종 1902년 4월 24일 고종은 조칙(詔勅)을 내려 10월 18일(陰9.17.)에 경운궁(慶運宮)에서 칭경예식을 거행하겠다며 신료들에게 의식 및 절차에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당부하였다. 약 3개월 뒤인, 7월 20일 의정부 의정 윤용선은 고종의 조칙에 대한 회답으로 의식 및 세부 사항을 보고하였다. 공식적인 "잔치의 서막"이었다. 고종39년(1902) 7월 20일(양력) 의정부 의정 윤용선이, ‘어극(御極) 40년을 칭경(稱慶)하는 예식을 참작하고 의논해서 마련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신들이 정부(政府)에 일제히 모여 자세히 상의해서 의정(議定)한 내용을 별단(別單)에 써 들입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윤허하였다. 【별단 1. 올해 10월 18일 대황제 폐하(大皇帝陛下)의 즉..
역사 마켓팅으로 새롭게 태어난 "대한제국", 그 실제를 들여다 보면 고구마도 이런 고구마가 없다. 드라마, 뮤지컬에서의 모습과 달리 고종은 자신을 잘해보겠다는 마음은 있어도 나라를 잘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 대표적 증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와 비각이다. 교보문고 옆에 딱 달라붙어있어 지나가는 사람은 많아도 대개 그저 지나칠 뿐 유심히 들여다 보는 이는 별로 없다. 그럼 이 비석이 섰던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 그날을 돌아본다. 1. 고종 잔치를 결심하다. 1901년 12월 22일 동지, 훗날 순종이 될 황태자는 상소를 올렸다. “신자(臣子)가 군부(君父)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복록이 그치지 않고 장수하는 것뿐입니다. 때문에 나라의 경사는 그 일에 ..
'대한제국'은 성공한 역사 마케팅 중 하나다. 실체에 접근하기보다는 격동의 근대에 우리가 좀 잘했으면 하는 심리에 (일본만 아니었으면) "잘했어", 또는 (계속 존속했더라면) "잘했을 거야"라는 애정이 더해져 매스미디어에는 곧잘 고종과 명성황후(민비)가 우국의 아이콘으로 등장한다. '드라마나 소설을 역사로 보지 말아야' 하는 건 당연지사고 또 두 부부에게서 나라 살릴 마음이 없었다고 단언하기 어려우나 신하와 백성들은 나라를 살리겠다고 목숨을 내던지는 판에 일본 황실의 일원이 되어 호의호식하거나 정권욕에 불타 일가친척을 요지에 앉히고 미신에 휘둘려 국정을 농단했다는 점에 지나친 미화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각설하고, 조선이 독립을 선언하고 제국으로 국체를 바꾸고 국호도 바꾼 1897년 이후를 대한제국이라고..
요 며칠 전 미공군 특수작전비행단 C-146A 울프하운드가 타이베이 송산공항에 착륙했다. 송산공항 우리로 따지면 김포공항이다. (인천공항은 도원공항-중정공항) 울프하운드는 특수작전 지원(인력 및 화물 수송)을 수행한다. 민주당이 당선되면 좋을 듯했던 중국 입장에서 요즘 미국의 행동을 보면 당혹스러울 듯 하다. 미 군용기 대만 착륙 사건에 대해 CCTV(중국중앙전시대, 국영방송국)는 바로 논평을 냈다. 중국을 보면 더러 정부가 차마 못하지만, 진정 하고픈 이야기를 관영언론을 통해 발표하곤 한다. 이번 발표에도 "중국 인민의 피와 살점으로 만든 만리장성에 머리 박살, 피가 철철"이란 시진핑의 발언이 다시 나왔다. 중국 정부(방송국 포함) 논평을 보면, 전근대 조서를 읽는 느낌이 든다. 옛날 토벌 조서를 보면..